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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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기억에서는 사라져버린 꿈속을 부유하는 것만 같은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분명 눈을 뜨기 직전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듯 그 모든 세계가 사라지면서 잠에서 깨어나 버리는 기분. 비록 꿈속의 경험과 기억은 전부 잊고 말았지만 꿈을 꾸던 동안의 감각만큼은 몸에 들러붙듯 남아있는 기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의 해리 오스본이 느끼고 있는 기분이었으며 그 탓에 해리는 영 뒤숭숭한 아침이 맞이하는 중이었다. 본래 꿈은 깨어나면 잊는 법인지라, 기상 직후 꿈의 잔재가 남아있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으나 그날 아침은 조금 달랐다. 분명 꿈일 터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생생하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 마치 또 다른 삶을 살았던 것마냥 현실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은 꿈이라는 듯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분명하게 존재하던 현실에서 억지로 내팽개쳐진 것만 같은 불쾌감이 있었다.
해리는 한참 동안이나 침대에 앉아 자신이 꾸었던 꿈을 떠올려보기 위해 노력했다. 고작 꿈 따위에 미련이 남는 것 또한 해리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한들 기상과 함께 꿈은 이미 무의식의 아래로 추락해 버렸고 깨어난 뇌가 활동을 시작하자 오히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심연까지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해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묘한 감각만을 간직한 채로 출근 준비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협탁 위의 시계를 집어 들려던 해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멋들어진 월넛 컬러의 고급스러움이 돋보이는 고상한 디자인의 가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농구공이 눈에 거슬렸다. 해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여기저기 흠집이 난 농구공을 잡았다. 아주 잠깐,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농구를 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교내 여자아이들에게 잘 보이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었던 탓에 농구 자체에는 그리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결국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농구부를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해리는 농구공을 잡은 적이 없었다. 애당초 농구는 팀 운동이 아니던가. 정식 경기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 파트너 한 명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의미가 없는―…
그런 사람이 있었을 리가.
공립학교의 생활은 해리의 상상과는 달랐다. 오스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거창한 의미를 전부 떼어내고 평범한 학생다운 고교 생활을 기대했건만, 해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그는 오스본이었고 그건 꼭 물컵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 같았다. 해리는 재학 내내 컵 속의 이물질에 지나지 않는 기름 덩어리처럼 아이들의 경계가 섞인 배척의 시선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를 걸어 다니는 달러 사인처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롤드로만 봐주는 진짜 친구의 존재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아버지의 바람대로 얌전히 사립학교에 있었을 것이다.
해리가 농구부에 금방 질려버린 이유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친구를 사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팀 운동임에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아니, 아니지. 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구부는 여자애들에게 잘 보이려고… 생각에 잠기듯 해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서, 농구부에 들어간 이유가 정확히 뭐였더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수년이 지난 탓인지 안개라도 낀 것처럼 그 시절의 기억이 희미했다.
고작 손때 묻은 농구공이 뭐라고 소중하다는 듯 침실에 놔두었는지 통 기억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눈치채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것의 존재에 무관심했다는 뜻이리라. 애당초 버나드가 이런 물건이 침실에 굴러다니도록 놔둔 것도 의아스럽긴 했지만 이름을 썼다가 지워진 흔적까지 있는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못한 것이겠거니, 적당히 납득하면서 도로 내려놓았다. 문득 눈에 띈 김에 버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해리는 다시 한번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눈을 뜨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얼룩처럼 남은 꿈의 잔재가 그의 사고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해리가 잊은 농구공에 대한 어떤 추억이 간밤의 꿈속에서 떠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꿈이란 그런 것이니까. 해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머릿속에서 농구공을 털어내 버렸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해리는 여느 꿈이 그렇듯 곧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리라 여겼다. 그날의 꿈이 유난히도 더 현실 같은 감각으로 남아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마치 오래된 기억이 꿈속에 묻혀버린 것만 같은 위화감은 농구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그 한 마디가 하루종일 몇 번이나 해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오늘따라 신경이 쓰이다니. 갑자기 인식하게 된 농구공처럼 어디선가 그런 것들이 자꾸만 튀어나와 해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넥타이를 매던 중 발견한 방 안의 작은 액자 같은 것이 그랬다.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그것은 홀로 찍힌 졸업사진이었다. 학사모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성인으로서 첫발을 디디게 될 졸업생다운 설렘이 엿보였지만 해리는 그 얼굴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을 마주하는 낯섦을 느꼈다. 혼자 뭐가 그리 기쁜 듯이 웃고 있는 걸까. 애당초 그리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공립학교 졸업사진 따위를 왜 굳이 방에 두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졸업 때 놓고서 지금까지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나 보지. 해리는 방을 나서기 전 액자를 뒤집어 놓았다.
출근을 하고도 내내 거슬리는 것들 투성이었다. 어차피 회장실에 직접 들어오는 사람이라고는 해리 자신과 비서 한 명밖에 없는데, 그저 의례적으로 들여놓은 소파 테이블에는 누굴 위한 것인지도 모를 과자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늘 떨어지지 않게 채워놓으라고 하셨잖아요.”라는 비서의 말처럼 해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지시로 그것을 두었던 것을 기억했다. 나도, 펠리시아도 과자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어느 날 문득 텅 빈 테이블이 허전해 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본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변덕스러운 법이라지만 좀체 무슨 생각으로 먹지도 않을 과자 따위에 예산을 허비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뿐이랴. 모든 일정과 연락은 무조건 비서를 통하고 있는데도 틈만 나면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마당에 개인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라고는 어릴 적부터 그를 돌본 늙은 집사와 옛날에 잠깐 만났다가 헤어진 전 여자 친구가 고작이다. 해리에게 사적인 관계는 지극히 좁았을뿐더러 집사도, 전 여자 친구도, 일상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해리는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그렇듯 휴대폰을 꼭 시야가 닿는 곳에 두었고 습관적으로 불 꺼진 화면을 힐끔거렸다.
꼭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네. 비서가 가져다준 데일리 뷰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참에 정기 구독을 취소하라고 지시한 해리가―애초에 이런 찌라시를 왜 구독하신 거예요? 들고 왔던 신문을 그대로 다시 들고나가면서 비서가 투덜거렸다.―새로 올라온 보고서를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론 응대 부서로부터 보내진 그린 고블린에 대한 건이었다. 오스코프와 그린 고블린의 연관성이 드러난 지 벌써 수년이 지났거늘 그로 인해 촉발된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슬슬 시간 아래에 묻힐 만하면 다시 기사가 나오는 통에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피해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린 고블린―노먼―의 테러 사건은 물론, 해리 오스본과 스파이더맨의 관계에 대한 석연찮은 의문 역시도 언론에서 꾸준히 다루어지는 소재였다. 아무래도 비밀에 휩싸인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이기 때문일까. 언론은 전자보다도 후자를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번에도 해리가 의도적으로 스파이더맨에 대한 정보를 함구하고 있다고 믿는 치들이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의 사명을 앞세워 인터뷰를 요구했으리라.
물론 해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취재에 응하지 않았기에 인터뷰 요청은 모두 사내 언론 응대 부서의 선에서 처리되었다. 물밑에서 떠도는 의심과는 다르게 해리는 스파이더맨과 그 어떤 모종의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고, 정체를 알고 싶은 건 오히려 해리 쪽이었다. 그놈을 잡겠답시고 설치다가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해리는 무심코 인공 피부를 덧씌운 오른쪽 얼굴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애초에 납치된 게 메리제인만 아니었어도… 철천지원수로만 여겼던 스파이더맨과 졸지에 함께 싸웠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스파이더맨을 죽이기 위해 손에 넣은 힘으로 그를 구했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상대였는데도 감정이란 소모적인 건지 반목의 증거였던 얼굴의 화상 자국과 함께 사라지고, 오히려 스파이더맨의 목숨을 대신한 가슴의 흉터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러니 언론에서도 의심을 거두지 않을 수밖에.
뭐, 스파이더맨에게 빚을 만들어 두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런 것치고 해리는 그 이후로도 스파이더맨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는커녕 언론이 눈에 불을 켜고 파헤치려 드는 그놈의 ‘친분 관계’또한 조금도 형성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열받네. 해리의 손가락 끝이 불만스럽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천하의 해리 오스본이 그런 밑지는 짓을 하다니! 메리제인을 구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다고는 해도 무슨 생각으로 목숨까지 걸었느냐는 말이다. 비록 반사이익으로 오스코프의 주가가 조금 상승했으며 노먼이 저지른 테러로부터 약간의 이미지 회복을 꾀할 수 있었다지만 목숨을 담보로 받은 대가치고는 참으로 사소하다. 스무 살 언저리의 해리 오스본은 아무래도 퍽 순진했나 보노라고, 마치 타인을 평가하듯 냉정한 시선으로 과거의 행적을 합리화하며 보고서를 덮었다.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으나 아침부터 마음속을 술렁이게 만드는 이질적인 감각은 통 사라질 줄을 몰랐고 해리는 결국 평소보다도 일찍 업무를 마친 채 회사를 나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앙적으로나 미신적으로나 꿈은 일종의 예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데 어쩌면 지난밤에 꽤 중요한 꿈을 꾸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갑자기 눈에 띈 농구공과 홀로 찍은 졸업사진, 테이블의 과자 바구니나 데일리 뷰글 같은 것들 따위가 잊어버린 꿈의 잔재라면 고작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꿈이 중요하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기분 탓일 뿐이다. 해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근래에 유난히 야근이 잦았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 한계에 달한 체력이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이다. 느긋하게 귀가해서 차분한 음악을 틀어놓고 책이라도 한 권 읽으면 잡념은 사라지고 일상은 이전과 같이 익숙한 평범함을 되찾으리라. 타임스퀘어에 네온사인이 채 켜지기 전에 퇴근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기분이 좋아져서 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설핏 웃었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차량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도로의 표지판이 가리키는 지역은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저택이 있는 미드타운의 어퍼이스트와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의아스러움과 함께 인상을 찡그린 해리가―“Hey!”―다그치듯 큰 소리로 운전기사를 부르며 차창을 두드리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남자가 당황했다.
“오, 이런…”
한결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던 차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스본 회장님.”
그는 백미러를 통해 해리의 눈치를 살피면서 황급히 차를 돌리려 했지만 U턴 신호까지는 한참 남았을뿐더러 무엇보다 반대 방향에는 차가 너무 많았다. 해리의 운전기사는 뉴욕의 모든 도로와 골목들을 꿰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길을 잘못 들거나 목적지를 착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행여라도 해리가 불쾌한 낯을 보일까 안절부절못하면서 “제가 잠시 딴생각을 했나 봅니다.” 자신 없는 변명을 내놓았다. 해리가 좁아진 미간을 꾹 눌렀으나 이내 한숨과 함께 몸을 늘어트리듯 카시트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됐어.”
어느새 다운타운에 접어들었는지 해리에게는 낯선 거리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센트럴파크 하단에 위치한 오스코프 본사와 어퍼이스트의 저택을 오가는 일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해리였기에 다운타운 역시 올 일이 없는 지역이었으나 생소해야 할 터인 거리의 풍경을 구경하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냥 드라이브나 하는 셈 치자고.”
해리의 목소리에는 짜증은커녕 나긋한 즐거움마저 스며들었다. 그래봤자 조금 돌아가는 것이 고작인데 가끔은 이런 이벤트가 생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해리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운전기사가 속도를 조금 줄이고 한결 여유롭게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에 표시되는 도착 시간이 훌쩍 늘어나 버린 덕분에 해리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하늘빛에 서서히 주홍색이 섞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창가에 팔을 기댄 채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보던 문득 해리가 입을 열었다.
“조금 출출하지 않아?”
생각해 보면 어차피 빨리 퇴근해 버릴 요량으로 점심도 커피와 베이글 하나로 적당히 때워버렸다. 평소에도 식사량이 많은 편은 아닌지라 그리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시야에 들어온 다이너 때문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공복 상태가 허기를 불러일으켰다.
“잠깐 세워봐.”
해리가 뒷유리를 통해 이미 지나쳐온 다이너를 돌아보며 말했다.
“요깃거리라도 포장하게.”
운전기사는 곧장 갓길로 비켜나더니 해리가 점찍었던 다이너가 어디인지 잘 아는 듯이 후진을 했다. 차는 정확히 그 가게 앞서 멈추어 섰다. 기사는 자신이 포장을 해 오겠다고 말했지만 해리는 딱 잘라 마다하고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평소였다면 당연하다는 듯 카드를 건네었을 텐데 계속 앉아만 있었던 탓일까. 굳이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미드타운과 다운타운의 경계에 위치한 그 다이너는 지나가던 길에 적당히 들른 곳임을 감안하고서도 일반적으로 해리가 이용하곤 하는 식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법 오래된 곳인지, 좋게 표현하자면 레트로한 감성을 풍기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녹슨 도어벨이 둔탁한 종소리를 내었다. 해리는 계산을 하고 있는 남자의 뒤에 서서 카운터 위에 붙은 메뉴판을 흩었다. 예상대로 제대로 된 다이너라기보다는 차라리 싸구려 패스트푸드점이라고 할 만한 가격과 메뉴 구성이었다. 소금과 후추를 뿌린 감자튀김과 양상추 한 장을 끼워 넣은 치즈버거, 프랭크 소시지와 피클을 넣고 머스터드를 뿌린 핫도그, 계란프라이 하나와 베이컨 두 줄을 곁들인 토스트… 마치 먹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기본적이라면 기본적이고 보잘것없다면 보잘것없는 수준의 퀄리티가 자연스럽게 예상되었다. 뭐, 이런 걸 먹자고 기다리는 것도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이지. 해리는 드물게 관대함을 느끼며 앞사람의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렸으나 점원과 트러블이 생기기라도 했는지 그 남자는 여전히 비킬 기미가 없었다.
무료하게 핸드폰만을 들여다보고 있던 해리가 앞에서 오가는 대화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짜증을 담은 점원의 목소리와 곤란함이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두어 마디 정도로도 맥락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힐끔 눈동자를 굴려 바라본 남자는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쯧, 혀를 찬 해리가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서 그의 옆으로 끼어들었다. 오늘따라 참 별나게도 군다, 해리 오스본. 대화 한 번은커녕 얼굴도 마주치지 않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역시 평소의 해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고작 5센트가 부족해 이 다이너에서 제일 저렴한 감자튀김조차 사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동정심이 들 만큼 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면서 해리가 말했다.
“칠리 핫도그 두 개 포장. 그리고 이 사람 몫도 같이 계산해 줘요.”
“아뇨, 전…”
남자는 양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사양하려 했으나 해리에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운을 띄우려던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는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살짝 깨물었던 아랫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 해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리도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벌써 수년째 오스코프를 운영하고 있지만 언론에 얼굴을 내비친 적은 거의 없는 탓에, 이런 허름한 다이너에서 오스본 회장을 알아볼 가능성은 없다. 아니면, 점원에게 내민 블랙 카드라도 본 걸까. 카드를 받아 들던 점원 역시 퇴근을 향한 열망이 엿보일 만큼 심드렁하던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이며 두 눈을 부릅떴으니 말이다.(그리고 즉시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해리는 결제를 끝낸 점원에게 돌려받은 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 남자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불편할 정도로 빤한 시선이었다. “뭐 할 말이라도?” 결국 부담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해리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시선이 겹치자 남자가 당황했고 해리는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름을 내뱉었다.
“피터?”
남자가 입을 벌리더니 말문이 막힌 듯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순식간에 처연한 강아지처럼 얇은 눈썹을 축 늘어트린다. 해리는 남자의 새파란 눈이 투명하게 울렁이는 것을 보았다. 울 것 같은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손가락 끝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해리에게 그는 그럭저럭 낯익은 사람이었다.
“피터… 파커? 그 사람 맞죠?”
행여 점원이 들을세라, 해리는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스파이더맨의 사진 기사.”
“아…”
피터의 눈썹이 더욱 힘없이 처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피터가 겨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여전히 유약하지만 담담한 표정을 하고서 힘없이 웃었다.
“맞아요. 안녕하세요, 오스본씨.”
왜 그리도 저를 빤히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일하러 왔다가 다짜고짜 뺨을 맞은 경험을 하고 나면 그 뺨 때린 인간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수밖에. 잊고 있던 흑역사의 기억이 떠올라 해리가 머쓱하니 뒷목을 문질렀다. 사과해야 하나? 시간이 약이라고,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정말 무례한 짓이었다. 제아무리 그 당시 스파이더맨에 대한 행방을 찾을 실마리가 피터 파커뿐이었다 한들, 정보를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 생판 남의 뺨을―무려 남의 약혼식장에서!―갈겨버리다니. 그러나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에 대한 사과를 이제야, 그것도 우연히 만난 김에 겸사겸사 처리해 버리듯 가볍게 내뱉기에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망설이고 있으려니 점원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불쑥 끼어들었다.
“포장 나왔습니다.”
두 개의 포장 봉투를 함께 받아 든 피터가 해리에게 하나를 내밀며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예.”
반사적으로 받아 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주고받을 만한 대화를 찾았다. 이대로 등을 돌리면 다시 이 사람과 만날 일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름대로 빚을 졌다고 말할만한 상대인 탓일까, 내내 잊고 있었던 주제에 어쩐지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다. 피터 역시 곧장 식당을 나서지 않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 왠지 좀 더 안면을 터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연락처를 교환할까? 아니면 명함이라도 건네줄까. 짧게 고민하던 해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둘 중 무엇도 아닌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혹시 시간 좀 괜찮으면 같이 한잔 어때요?”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고개를 끄덕인 후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피터가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으나 해리는 이미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피터는 어쩔 수 없이 포장 봉투를 손에 꼭 쥐고 해리의 뒤를 따라갔다. 뒷문을 열어주는 해리의 고갯짓을 따라 익히 알고 있는 롤스로이스에 올라타자 난데없는 외부인의 등장에 의아스러워하면서도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 인사를 건네는 친숙한 운전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피터는 행여 목소리가 떨릴까, 대답을 꺼내지는 못한 채 그저 고개만 꾸벅였다.
운전기사에게 간식으로 먹으라며 포장한 핫도그를 넘긴 해리는 지시한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피터 역시 그 옆에 얌전히 앉아있을 뿐, 차마 먼저 대화를 건넬 수가 없었다. 일상처럼 익숙한 동시에 너무나 낯선 기분이었다. 피터는 변함없이 단정한 해리의 옆얼굴을 훔쳐보면서 어째서 다시는 보지 못할 줄만 알았던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에 몸을 싣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피터와 어울리는 동안 해리는 늘 태생답지 않게 소탈한 모습만을 보여주고는 했지만 그것이 그의 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학창 시절 내내 저녁을 먹으러 왔던 말리부 다이너가 오로지 피터를 위한 선택에 지나지 않았음을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리부 다이너는 피터 파커를 친구로 두지 않은 해리 오스본은 절대 오지 않을 곳이었다. 애당초 미드타운 내에 저택과 회사를 두고 있는 해리가 다운타운 쪽으로 내려올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평소처럼 간단한 저녁거리를 포장하러 온 다이너에 해리가 나타났을 때는 숨이 멈출 만큼 놀랐고, 눈이 마주친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미 받아들인 현실과 상황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줄로만 알았다. 모두가 피터 파커를 잊게 되는 사건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게 분명하다고. 아니, 적어도 단 한 사람, 해리 오스본만큼은 피터 파커를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해리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물론 그 즉시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해리가 피터의 존재를 완전히 잊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피터 파커 없이 개연성을 메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스쳐 지나간 사소한 인연을 떠올리려는 사람 특유의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해리를 마주하고서도 피터는 상심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찰나의 순간 기적과도 같은 희망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내심 그럴 리 없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던 해리의 모습이 피터에게 포기한 줄로만 알았던 미련을 남겼다. 떠올려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차는 맨해튼 한가운데의 호텔 앞에서 멈추었다. 해리가 피터를 데리고 간 곳은 피터가 평생 발을 들일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고급 호텔의 와인 바였다. 투숙객은 물론 외부인도 제한 없이 이용하는 1층의 라운지 바와는 달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그 고층 바는 고객층이 따로 존재하는지 출입증을 제시하고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해리는 프런트의 바 좌석이 아닌 창가 쪽의 테이블 석에 자리를 잡았다. 통유리 너머 뉴욕의 고층 빌딩으로 이루어진 외곽선이 어스름한 노을빛을 품고 반짝였다. 어느덧 대부분의 건물이 네온사인을 켰다. 잠시 후면 흩뿌려진 태양 빛의 잔상마저 사라지고 화려하게 번쩍이는 야경이 창밖을 장식할 것이다.
비록 해리와 함께 와본 적이라고는 없었지만 허름한 다이너가 아닌 이런 멋들어진 바야말로 해리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피터가 아는 해리였다면 제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알고 굳이 선택하지 않을 장소이기도 했다. 알코올에 약한 피터를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와인을 주문하는 해리의 모습이 낯설었다. 피터는 다시 한번 제 앞에 앉은 해리는 자신이 아는 해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해리의 기억 속에 있는 피터 파커는 더 이상 인생에 다시없을 친우는커녕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조차도 아니었다.
간단한 샤퀴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두 사람 앞에 잔이 놓였다. 각 잔에 짙은 색의 레드와인을 절반 가량 채운 웨이터가 얼음통에 보틀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본래도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피터는 먼저 대화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피터가 기억하는 추억 중 해리와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해리의 기억이 어떻게 맞추어져 있는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입을 열기 조심스러웠다. 피터는 애써 딴청을 피우려는 사람이 그러하듯,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을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피터를 따라 와인 잔을 기울이면서 해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닥터 옥토퍼스에게 당신 이름을 팔았어요.”
아, 그 사건은 남아있구나. 행여 피터가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반응을 살피는 해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긴, 피터 파커를 통하지 않고서야 스파이더맨을 캐낼 수 있는 연결고리가 존재할 리 없다. 스파이더맨을 쫓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제일 먼저 그의 유일한 사진 기사를 떠올릴 테니까. 그린 고블린이 그랬듯이 말이다. 아무래도 해리에게 피터는 ‘스파이더맨에게 복수하기 위해 알아낸 전속 사진사의 정체’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듯했다.
아예 잊어버리는 것에 비하면 그런 부수적인 존재로나마 해리의 기억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 터인데도 짙게 깔리는 우울감을 감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피터는 해리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애꿎은 와인만 들이켰다. 순식간에 잔을 비워버리는 행동을 화를 삭이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해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스파이더맨을 잡는데 눈이 멀어서, 섣부른 짓을 했어요. 나를 거꾸로 매달아 협박하던 그놈이 당신에게는 얌전하게 질문만 할 리가 없는데도.”
피터의 빈 와인 잔을 다시 채워주면서 해리가 계속 말했다.
“하다못해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 제일 먼저 당신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고요. 내가 그 정도로 개자식일 줄은 몰랐는데… 그때는… 나도 심적으로 여유가 없었거든요.”
해리가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든 다 변명이죠. 미안해요. 당신을 보니까 늦게라도 사과해야 할 것 같았어요.”
피터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대답할 수 있는 말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나야말로 그때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내가 먼저 거짓말을 했으니 나야말로 사과해야 한다는 말,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한다는 말, 그럼에도 날 용서해 준 네게 고맙다는 말… 그러나 입속을 맴도는 그 무렵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복잡한 감정들은 더는 해리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피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와인으로 마르는 목을 축이던 피터가 간신히 내놓은 말이라고는 고작 단 한 마디뿐이었다.
“…괜찮아요.”
그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쨌든 전 무사했으니까요. 지금 이렇게 당신 앞에 있는 것처럼.”
담백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의외였는지 해리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살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조금 전에 비하면 한결 후련해졌는지, 마치 농담을 건네듯 다소 짓궂어진 목소리가 친근하게 들렸다.
“저런, 그 말 후회 안 할 수 있어요? 보상금을 왕창 뜯어낼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한때, 호의를 돈으로 표현할 줄만 알던 어린 해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마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 앳된 얼굴이 지금의 해리 위에 고스란히 겹쳐지면서 목소리마저 들리는 것만 같다. ‘후회할 텐데? 너 돈 필요 없어?’ 돈을 대가로 피터에게 대리 과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해리가 한 말이었다. 그것은 피터와 해리의 첫 대화였으며 재미있게도 그들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대화이기도 했다.
“정 보상해주고 싶으면 돈보다도 다른 게 어때요?”
피터는 그때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를테면, 친구라던가.”
해리의 눈이 커졌다. 늘 그렇듯 능청스럽게 대화를 되받아치지도 못하고 마냥 피터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당혹감이 전해졌다. 그때는 어땠더라. 피터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연신 와인을 홀짝거렸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필요하지.’ 그때도 피터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돈보다도 친구가 더 좋을 것 같아.’ 그리고 해리는…
“아, 맙소사!”
이번에도 해리는 그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두 사람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서만 추억을 곱씹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유쾌하게 웃는 해리를 앞에 두고서도 오히려 피터의 마음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날 앞에 두고 돈보다도 친구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러나 해리는 퍽 즐거워 보였다. “친구라.” 씩 웃으면서 그 단어를 한 번 더 곱씹어보더니 피터를 향해 와인 잔을 내밀었다.
“좋아요. 친구.”
쭈뼛거리며 망설이는 피터에게 좀 더 잔을 내민 해리가 턱짓으로 재촉했다. 그제야 덩달아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린 피터가 서툰 제스처로나마 해리에게로 잔을 기울였다. 챙― 가볍게 잔을 부딪치자 맑은 소리가 울리면서 바닥에 옅게 깔린 와인이 찰랑거렸다. 피터는 해리와 함께 와인을 비우며 벌써 몇 잔째였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애당초 자신의 주량을 알 만큼 마셔본 적은 없었으나, 아직은 딱히 취기랄 것이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해리가 권하는 것을 마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새 와인 한 병을 비웠던 건지 해리는 이제 칵테일을 주문하기 위해 피터의 취향을 물었다. 와인은 물론 칵테일도 피터에게는 낯선 영역이었다. 적당히 달콤한 종류를 요청하면서, 해리와 술을 나누는 일도 꽤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피터를 배려해서 양과 횟수를 자제했을 뿐 해리는 음주를 제법 즐기는 쪽이었다. 저택의 지하에는 질 좋은 와인 저장고가 있었고 응접실에는 칵테일 제조대를 마련해 두었으며, 심지어 해리의 서재에도 다양한 종류의 양주를 넣어놓은 진열장이 있었다. 가끔씩 밤늦은 시간에 해리를 찾아가면 잠들지도 못하고서 여즉 끝나지 않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가 커피 대신 브랜디로 피곤함을 달래던 것을 기억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옛날에도 종종 어울려 주는 거였는데. 뒤늦은 후회 탓인지 피터는 해리가 권하는 족족 사양 한번 없이 연거푸 잔을 비웠다.
피터의 아침은 대체로 그리 상쾌하지 못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거나 충분한 체력 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피터의 거주 환경으로 인해 흔히 표현되고는 하는 ‘포근한 이불에 둘러싸여 싱그러운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을 맞이하기는 어려운 탓이다. 피터의 아침은 늘 스프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푹 꺼진 매트리스와 보풀이 잔뜩 일어나 거칠어진 이불, 시끄러운 차 소리가 뒤섞인 이웃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었다. 상쾌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별다른 불만 역시 없을 정도로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피터는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를 억지로 잠에서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소음이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눈을 뜨는 것부터가 피터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각성과 동시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부드러운 감촉과 따듯한 온기. 심지어는 은은한 향기를 머금은 주변의 공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도저히 자신 낡은 셋방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들이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침내 침대 위에서 일어난 피터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침대, 깔끔한 분위기, 너무 밝지 않은 적당한 조명과 생활감 없는 가구들. 와인 바가 있었던 호텔의 스위트 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조금씩, 조금씩, 느릿한 자각이 찾아왔다. 어제 무려 해리와 술을 마셨다. 제 주량도 모르는 주제에 바보같이 고삐를 완전히 풀어버리고서. 기억이 불확실할 정도로 마신 것치고 말로만 듣던 숙취랄 게 느껴지지 않는 건 피터의 빠른 회복 능력만큼이나 경이로운 신진대사 속도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의 모든 숙취를 없애준 신체 능력도 지난밤의 흐릿한 기억을 또렷하게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피터로서는 매우 난처하게도, 기억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필름이 끊긴 이후의 일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그건 마치 카메라의 순간적인 번뜩임 같았다. 플래시가 터지는 그 찰나의 강렬함이 눈꺼풀 속에 남아 어스름한 잔상을 만들어내듯이, 단편적인 장면 장면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았다. 무엇보다도 피터가 알몸이라는 사실과 그렇기에 곧장 시야에 들어온 몸의 흔적까지 제아무리 둔감한 피터라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나, 해리랑 잤구나.
신기하게도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이토록 넓은 침대에서 홀로 덩그러니 깨어났다는 점이 더 신경이 쓰였다. 피터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찾기 위해 바닥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포기하고는 알몸에 이불을 둘둘 말고서 침대를 내려왔다. 침대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지만 조금 전에 청소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기만 하다. 피터는 저도 모르게 “해리?”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해리를 불렀다. 그러자 그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하려는 양, 침실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피터가 얼른 문을 돌아보았다.
“해리?!”
피터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으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해리가 아니었다. 실망과 동시에 그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사람임을 깨달은 피터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해리를 만나기 위해 오스코프에 찾아갈 때마다 인사를 건네며 차를 내주었던, 해리의 개인 비서였다.
“펠리ㅅ…”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터 파커.”
반사적으로 이름을 부를 뻔했던 피터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펠리시아는 미처 듣지 못했는지 피터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두른 피터의 민망한 꼴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서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용건을 전했다. 오스코프를 방문한 피터가 해리를 기다리는 동안 친근하게 잡담―을 빙자한 상사의 뒷담화―를 건네고는 했던 그녀가 다른 사람처럼 여겨질 만치 냉량한 모습을 하고서 피터의 앞에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업무 일정으로 인해 먼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입장 상 불가피한 일이었으니 부디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펠리시아가 들고 있던 것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지금 막 건조를 끝낸 참인지 보송보송한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피터의 옷가지가 잘 세탁되어 개어져 있었다.
“룸서비스를 마련해 놓았으니 입고 나와주세요. 회장님과는 오늘 저녁때 다시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피터가 더듬더듬 대답하자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비켜주었다. 얼핏 열린 침실 문 틈으로 테이블 가득 차려진 조식이 보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여전했으나 적어도 해리가 저를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해리가 옆에 없다는 걸 알고서는 행여 지난밤 와인 잔을 부딪히며 나눈 친구라는 관계마저 무의미해진 걸까 덜컥 겁이 났었다.
보잘것없는 상상력으로도 쉽게 연상되는 상황이 있지 않은가. 간단히 무마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와 가볍게 즐기고서, 돈 따위를 대가로 제시하며 다시는 아는 척을 하지 않도록 입막음하는 상황 같은 것. 물론 해리가 부도덕한 놈팽이라는 뜻은 결단코 아니지만, 피터의 친구가 아닌 ‘오스코프의 젊은 회장’으로서의 해리라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피터는 펠리시아가 했던 말을 믿었다. 해리랑 또 만날 수 있어. 피터에게는 그 하나면 충분했다.
업무 데스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서류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를 못했다. 벌써 삼십 분째 같은 페이지를 붙들고 있는 해리의 시선이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맴돌고 있었다.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으니 내용 역시 머릿속에 입력될 리가 없다. 어제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업무가 많았던 탓에 잠든 피터를 남겨두고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건만, 이러느니 역시 피터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을 성싶다. 혹시 일어나서 엉뚱한 오해를 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일부러 펠리시아를 보내놓았는데도─자신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얼마나 화를 내던지!─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괜스레 만년필의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까딱거렸다.
해리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경솔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오스코프 회장으로서 가지는 영향력과 주목받는 삶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았다. 언론에 알려지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행동거지를 조심하던 해리의 신중함은 오스코프의 회장이 된 이후로는 더욱 견고해졌다. 해리의 회장직 취임은 이사진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랐을뿐더러 노먼의 죽음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일이었기에 아주 사소한 구설수만으로도 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되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것이 성인이 되고도 돈 많은 부모의 울타리에 둘러싸인 철부지 도련님과 해리의 가장 큰 차이였다. 돈 많은 집 자제들이 옆에 여자를 끼고 흥청망청하게 구는 건 예삿일이었으나 행여 원나잇이라도 했다가는 상호 합의된 관계라도 지저분한 성추문으로 부풀려질세라, 이성에게 아주 사소한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만남의 계기가 무엇이든, 상대가 누구든, 제아무리 신원이 확실하고 상대의 의사가 명확하더라도 연인이 아닌 성적으로만 맺어지는 관계는 해리가 가장 기피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랬을까.
분명 처음에는 어떤 성적인 감정도 없었다. 친구를 운운하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처음 보는 타입이라 관심이 가는 정도였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 이상의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동성을 상대로 호감을 느낀다 한들 성적이 아닌 인간적 호감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분명 그랬을 터인데도.
술김에, 라는 변명을 하기에는 해리는 사리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았다. 거진 성인이 되자마자 휘청거리는 회사를 물려받아 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이사회는 물론 다른 기업의 중진들이나 무수히 많은 정계 인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음주량을 조절하는 일은 해리에게는 이미 숨을 쉬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었다. 어느새 편안하게 말을 놓고서 제 이름을 부르는 피터에게 충동적으로 키스했을 때, 해리는 자신이 멀쩡한 맨 정신이었노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해리 자신이 아닌―정말 쓰레기 같은 소리지만―피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주문하는 대로 냉큼 잘도 받아 마시길래 생긴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음주를 즐긴다고 지레짐작한 것부터가 실수였을지 모른다. 처음부터 그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서서히 취해가는 것을 미리 눈치채지 못한 건 명백한 실수였고 말이다.
해리가 거의 모든 대화를 주도하면서 간간이 짧은 대답만을 내놓던 피터의 반응이 퍽 느려졌음을 알아차렸을 때쯤엔 이미 양 뺨에는 발갛게 열이 오른 채 그러잖아도 맥없는 눈이 한층 더 힘없이 풀려있었다. ‘피터? 괜찮아?’ 그제야 자신이 상대의 페이스를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해리가 황급히 피터의 상태를 살폈다. 졸린 사람처럼 게슴츠레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한 번에 술기운이 훅 올라왔는지 그새 눈에 띄게 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제 탓도 있으니 호텔 룸을 잡아서 재워놓을 생각이었다. 그러잖아도 빚이 있는 처지에 이토록 취하게 만들어버리기까지,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에 일부러 제일 비싸고 좋은 객실로 잡은 것이 스위트 룸이었다. 피터를 부축해 침대에 눕혀주는 동안에도 해리에게는 그 어떤 의도도 없었다. 용케 잠들지 않고 침대까지 도착한 피터가 해리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 저택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피터는 취한 사람답지 않은 완력으로 막 등을 돌리려던 해리의 손목을 붙잡았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리.’ 그를 붙잡은 손아귀의 힘이 단단하지 않았더라도 해리는 차마 그것을 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그 얼굴이야. 못 박힌 듯 걸음을 멈추고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피터는 다이너에서 해리가 무심코 이름을 입에 담았던 순간과 꼭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그러나 동시에 필사적으로 참고 억누르는 얼굴을 하고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해리를 불렀다. ‘가지 마, 해리…’
같은 것 달린 사내자식의 징그러운 애원이 뭐라고, 그 모습이 해리를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성욕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 느껴보는데도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감정은 단순한 성욕 따위와는 전혀 달랐다. 그보다는 좀 더 복합적이고 절실하며 필사적인 것. 숨이 막힐 만큼 맹목적이면서 눈물이 날 만큼 애달픈 감정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몸뚱이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독한 알코올 냄새를 머금은 입술에 입을 맞추자 갈증으로 목이 마르는 동시에 희열로 목이 메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입술이 맞닿고 몸을 겹칠수록 이성은 빠르게 흐려졌다. 마치 오랫동안 염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것만 같은 환희가 해리의 모든 정신을 지배하면서 보다 더 그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어째서일까, 피터. 해리는 저항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옷을 벗고 몸을 벌리는 피터의 부드러운 피부 곳곳에 붉은 흔적을 남기면서 생각했다. 꼭 오래전부터 널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 피터 파커. 그 이름을 부를 때의 혀의 움직임과 입술의 달싹임이, 성대를 울리는 모든 발성의 감각이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것마냥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밤사이 취했던 나신의 발간 열상과 새파랗게 일렁거리는 시선이 눈꺼풀 속에서 어른거린다. 고작 반나절 남짓의 만남을 두고서 섣불리 사랑이라고 결론짓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단순한 유흥거리 이상의 감정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해리는 지난밤의 일을 한순간의 충동이나 실수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고 없었던 일인 척 덮어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피터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리고 피터를 만나 그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면 일을 끝내야 하고 말이다. 갑자기 똑딱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재촉처럼만 느껴졌다. 해리는 자꾸만 딴생각을 하려 드는 머리통을 애써 서류의 활자에 집중시키고서 부지런히 만년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른 일을 정리해야 피터를 만나러 갈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었다.
잠시 뒤, 오른손 근처에 올려두었던 휴대폰 화면에 [자택까지 모셔드렸습니다.] 비서의 메시지가 떠오르자 해리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보고 싶다. 어느새 해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