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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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거미인간이 되고 난 후 알게 된 점 하나. 이 몸은 물리적인 상처에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회복능력을 보이지만, 신체 내부적인 유해성분에는 취약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초인의 예민한 자기 보호 본능이 소량의 유해물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버리기 때문이리라. 피터는 그 사실을 평범한 커피 한 잔으로 인해 깨달았다.
전 날 새벽까지 뉴욕의 밤하늘을 돌아다니느라 유난히 피곤한 아침이었다. 피터는 집을 나서면서 저렴한 가격과 많은 양 덕분에 특히 애용하고 있는 카페 체인에 들렀다. 대개는 달콤한 과일 주스나 초콜릿 라떼를 주문하겠지만 말했듯 유난히 더 피곤한 아침이었던 탓에, 평소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카페인 음료를 골랐다. 그러나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바닐라 라떼는 피터에게 끔찍한 두통과 식은땀, 급격한 심장박동을 불러일으켰다. 오전 강의에 늦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웹스윙을 하던 피터는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느낌과 함께 쓰레기 더미 위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지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노숙 중인 주정뱅이나 약쟁이를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거미에 물린 후로는 물론 그전에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피터는 벽을 짚고 간신히 일어서서 두 어번 헛구역질을 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직 술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분명 숙취라는 것도 이런 기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술은 마시지 말자는 생각 역시도.
그렇게 반도 채 마시지 못하고 버려진 바닐라 라떼와 하루치 출석을 대가로 지불하고서 피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 되어버렸으며, 그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카페인 민감 체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고, 다시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고작해야 호기롭게 들이킨 바닐라 라떼 세 모금만에 그보다 많은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증상을 겪은 이상 언감생심 아메리카노나 드립 커피는 꿈도 꾸지 못하리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다면, 첫 번째로 애당초 피터는 진한 블랙커피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시험 삼아 먹어본 초콜릿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피터로서는 초콜릿을 포기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커피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그 사실에 기뻐하느라 '커피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치 카페인 함량이 적은 초콜릿'이라는 명제를 제대로 검증하려 하지 않은 건 피터의 큰 실책이었다.
초콜릿, 정확히는 초콜릿의 원재료가 되는 카카오빈에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음은 누구나 알 법하다지만 놀랍게도 세상에는 카카오빈 없이도 초콜릿이라고 불리는 물건이 더러 존재했다. 피터가 평생을 알아오고 먹어온 초콜릿이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초콜릿이라기에는 차라리 초콜릿 유사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마트에서 2달러도 채 되지 않는 저렴함을 앞세워 버젓이 팔리고 있었다. 그러니 피터의 안일한 실수는 오롯이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자본주의적 사회의 잘못인 셈이다.
피터는 초콜릿을 좋아했다. 간식이란 기호식품이고 기호식품을 즐기기에 용돈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피터에게 있어 혀 위에서 느긋하게 녹여먹는 초콜릿 한 알은 그 어떤 간식거리보다 달콤했다. 초콜릿은 스낵처럼 한 번 뜯으면 눅눅해지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 대량 포장이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소포장되어 있는 사탕에 비하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풍미가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는 봉지 하나를 사면 하루에 두어 알 씩 야금야금 꺼내먹으면서 몇 주는 거뜬히 용돈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리는 피터의 가장 친한―그리고 유일한―친구로서 그의 취향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해리는 피터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것, 그러나 그에게 있어 초콜릿이란 팜유가 성분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싸구려 허쉬 초콜릿이 그나마 제일 좋은 선택이라는 것도 알았다. 바로 그 점이 학창시절 해리에게 사소한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해리는 초콜릿을 좋아하는 피터에게 팜유 초콜릿 따위가 아니라 카카오빈으로 만들어진 '진짜 초콜릿'의 맛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작 초콜릿 향을 첨가했을 뿐 설탕과 엿기름 섞인 초코시럽을 듬뿍 넣은 초콜릿 라떼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피터를 보고 있노라면 선뜻 무책임한 선의를 발휘할 수가 없었다. 한 번 트여버린 입맛을 되돌리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진짜 초콜릿의 맛을 알게 된 후로도 피터는 여전히 팜유로 된 초콜릿을 먹을 수밖에 없을 테고, 팜유 초콜릿 특유의 기름진 미끌거림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초콜릿을 먹으면서도 이전만큼 행복해지지는 못하리라. 그건 피터의 행복 하나를 빼앗는 짓이었다.
만약 해리가 진작에 피터에게 카카오빈의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을 알려주었다면, 그래서 피터가 마트 초콜릿의 실체를 일찌감치 깨달았더라면. '커피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치 카페인 함량이 적은 초콜릿'이라는 명제가 그 초콜릿이라기에도 민망한 팜유 덩어리에나 해당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 되었을 때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초콜릿과 먹을 수 없는 초콜릿을 구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피터가 마침내 초콜릿의 진실을 깨달은 사건은―다시 말해 해리가 피터에게 초콜릿을 공급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그들의 하우스 쉐어로 인해 시작되었다. 생활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곧 해리에게 다이닝 테이블의 간식통을 채워놓을 정당한 구실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쭉, 영원히, 오로지 최고급의 초콜릿만이 피터의 입에 들어가도록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해리에게는 피터와의 동거를 단기적인 이벤트로 끝낼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으므로.
물론 피터는 고등학생 시절 그랬듯이, 하우스쉐어를 한다는 이유로 해리의 호의를 넙죽넙죽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단순한 '쉐어'일 뿐이니까. 한 집에 각자의 방이 있듯이 피터는 해리의 영역을 존중했고 해리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계획에 앞서 해리에게는 피터의 독립심을 다소 느슨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뜻밖에도 피터로부터 야기되었다.
두 사람은 피터의 강력한 의견으로 인해 소위 '생활비 통장'을 만들었다. 제 아무리 서로의 구역과 물건을 나눈다 한들, 함께 생활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공용자금을 각자 같은 비율로 분담하기로 한 것이다. 서로 다른 태생 만큼이나 서로가 생각하는 생활비의 씀씀이 역시 전혀 다를 것에도 불구하고 해리는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는데, 예상대로 피터는 그 내역의 쓰임새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늘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것치고 피터는 수전노와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금전전인 부분에 있어 그리 꼼꼼한 성정이 아니었다. 공용비 분담을 제안한 건 그저 공통적으로 발행하는 자금을 해리가 일방적으로 떠맡게 할 수 없다는 정직함을 발휘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공용비의 운용은 전적으로 해리의 몫이 되었다. 피터는 해리가 구비하는 물건의 금액이나 우편으로 날아오는 공과금을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았고 둘이 함께 채워 넣인 한 달 치 생활비의 잔액을 가늠해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해리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절반은 피터의 자금이 포함된 '공용비'를 방탕하게 운용했다. 그들의 생활을 보다 쾌적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소비를 자신의 개인 자금이 아니라 공용비로 둔감시켜 버렸다는 뜻이다.
그건 마치 마법의 언어와도 같았다. 설령 해리가 라뒤레의 마카롱을 박스 째 냉장고에 넣어 놓더라도, 그저 '공용비로 사놨어.' 라는 말 한 마디면 그것의 가격과는 무관하게 존재에 정당성을 가지는 동시에 그것을 맛볼 권한을 피터와 나눌 수 있었다. 해리의 자산 관리에 대한 피터의 무한한 신뢰는―마냥 피터를 순진하다고 여기기에는, 기업 후계자인 해리를 의심하기란 누구라도 어려운 일이다.―해리가 공용비 명목으로 무슨 짓을 하든 한 가지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쓰겠지. 물론 피터가 기호품의 시세에 무지한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1층 공용공간의 다이닝 테이블에는 해리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간식 바구니가 놓였다. 처음 피터가 그것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표했을 때, 해리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피터 너, 식사는 제대로 안챙기면서 군것질은 자주 하잖아." 다만 거기에 뻔뻔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나도 집에서 입이 심심할때면 버나드가 쿠키를 구워줬었거든."
해리는 처음에는 그 간식 바구니를 m&m이나 트윅스 같은, 피터에게도 별 것 아닌 종류로 채웠다. 마트에서 대용량으로 파는 싸구려들로, 언제나 항상 간식 바구니가 가득 채워져 있어도 딱히 신경쓰이지 않을 법한 것들로. "공용비 좀 남는 걸로 채운거니까 너도 여기서 꺼내 먹어." 라는 말로 피터의 심리적인 방어막을 무너트리면서.
늘 풍족함을 유지하는 바구니 안에 담긴 간식들은 정말로 사소한 것들이었고 어느덧 피터는 굳이 자신의 용돈을 지출하지 않고도 군것질이 필요할 때마다 바구니 안에 있는 것을 꺼내 먹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덧 그 마르지 않는 화수분의 존재가 당연해졌을 때 해리는 피터의 호기심을 끌만 한 새로운 간식을 은근슬쩍 끼워넣었다. 스니커즈와 하리보, 츄파춥스 사이에 피에르 마르콜리니의 생초콜릿과 마리아쥬의 마르코폴로 쿠키, 팔란스의 수제 카라멜이 딱 한 개씩 뒤섞었다. 변화라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갯수였기에 예상대로 피터는 새로운 간식의 등장을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피터는 이제 일상적으로 간식을 꺼내 먹었고, 바구니 안의 간식을 거덜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과자를 집어들었다. 피터는 그것이 처음 먹어보는 과자라는 사실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서 낯선 포장지를 벗겼다.
자그마한 쿠키 하나를 입에 넣은 피터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포장지를 확인하고 같은 것을 찾아보려는 듯 바구니 안을 뒤적거렸다. 이미 피터에게는 그것이 어떤 과자인지 보다는 그저 그 과자를 하나 더 먹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해리, 이거 진짜 맛있다!" 그러면 그 한 마디를 기다렸다는 내색을 감쪽같이 감추고서 해리가 대답하는 것이다. "그래? 그럼 앞으로는 그걸로 사다 놓을까?" 또 하나를 발견하지 못해 내심 실망스러웠던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해리의 계획에는 드디어 마침표가 찍혔다. 그렇게 교체된 새로운 간식 바구니는 오로지 피에르 마르콜리니와 마리아쥬, 팔란스로만 구성될 수 있었다.
마침내 몸값을 수십배로 불려버린 간식 바구니가 테이블에 놓인 날. 한 입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의 초콜릿 한 알을 집어 먹은 피터의 얼굴에 순식간에 행복이 깃들었다. 표정만으로 피터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같았다. '그래, 이 맛이야!' 달콤한 간식거리를 좋아하긴 해도 딱히 음식에 감명을 받는 타입은 아닌 피터였으나 지금껏 먹어왔던 초콜릿과는 전혀 다른 풍미와 식감을 가지고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버리는 그 작은 초콜릿 한 조각은, 감정 표현에 무딘 피터에게도 생동감을 부여했다. 피터는 흥분을 감추기 어려운 듯 살짝 상기된 얼굴로 쌉싸름한 달콤함을 머금은 입술을 작게 오물거리며 혀끝을 맴도는 초콜릿의 풍미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그 맛을 음미했다. "해리."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피터는 반짝이던 눈매를 나른하게 내리감고서 여전히 초콜릿의 맛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고조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이거 더 먹어도 돼?"
"그야 당연하지."
해리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어차피 공용비라니까? 마침 이번달은 여유로우니 한 번 더 채워놓을 수 있어."
해리는 일부러 공용비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예상대로 아주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던 피터는 공용비에 여유라는 단어까지 더해지자 곧장 망설임을 던져버리고 초콜릿을 또 하나 집어들었다. 두 번째 초콜릿 역시 혀 끝에 닿자마자 마치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며 피터의 미각 구석구석에 황홀한 달콤쌉싸름함을 남겼다. 초콜릿이라는게 이렇게 부드럽다는 것도, 단맛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도록 매혹적인 씁쓰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입안에서 이토록 깔끔하게 달콤한 향을 남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피터는 처음 맛보는 다크초콜릿의 맛에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한 알을 입에 넣는 동시에 또 한 알을 집었다. 그렇게 셋, 넷, 다섯… 해리는 초콜릿의 껍질을 벗기고 있는 피터의 눈매가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잠시 뒤.
툭. 피터의 손에서 떨어진 초콜릿이 바닥을 굴렀다.
"…피터?"
그제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해리가 피터에게 다가갔다. 피터는 초콜릿을 입에 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초점을 잃은 눈을 깜박였다. "어…" 피터가 간신히 소리 비슷한 것을 내었으나 이미 풀려버린 혀를 억지로 움직여 내뱉는 웅얼거림은 알아듣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것이 '어지러워'라는 의미를 깨닫는 동시에 피터가 비틀거렸다.
"피터!"
해리는 화들짝 놀라 무너지려는 몸을 안아들었다. 피터는 힘이 빠진 몸을 축 늘어트리고서 해리에게 흔들리는 몸을 기대었다. 어느새 피터의 얼굴은 발갛게 열이 올라있었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자꾸만 고꾸라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라톤이라도 한 사람처럼 가빠진 숨을 헐떡이더니 급기야는 구토감이 올라온 듯 우욱. 심상치않은 소리를 내었다. 다행히 게워내는 것은 없었지만 두 어번은 더 헛구역질이 이어졌다.
순간적으로 바구니 안에 위스키봉봉이라도 섞여있던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모습이었다. 해리는 반사적으로 바구니 주변에 흩어진 포장 껍질을 흩었지만 하나같이 평범한―단지 좀 고가인―다크 초콜릿일 뿐이었다. 에당초 해리가 직접 채워넣은 바구니에 알코올이 든 초콜릿이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들이킨 것만 같은 이 몰골은 뭐란 말이냐. 해리는 피터가 술을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술에 취한 모습 역시 본 적이 없는데다, 앞으로도 볼 일이 없으리라 여겼지만 그럼에도 앞으로는 술에 취한 피터를 너무나 생생하게 상상해낼 수 있을 것같았다. 그야 바로 지금 눈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일 테니까.
"맙소사, 피터? 너 괜찮은 거야? 대체 왜 이래?"
당황한 해리가 더듬더듬 물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피터가 대답을 할 수 있을리 없다. 피터는 꼭 머리가 아픈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그 다음에는 실없는 미소를 지으면 헤실거리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해리를 부르기도 했다. 그나마 몇 번의 헛구역질 덕분에 속은 좀 나아졌는지 적어도 구토를 하려는 모습은 없었다.
"너 지금 이상해."
피터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끼워넣고 고꾸라지려는 것을 부축해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면서 해리가 말했다.
"일단은 좀 눕는게 낫겠어."
고작 초콜릿 좀 먹었다고 왜 이런 꼴이 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해리는 피터를 주정뱅이로 생각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실, 당황스러움을 갈무리하고 단순하게 생각해보자면 이건 제법 유쾌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을테니 평생 볼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취기 오른 피터를 알게된 셈이 아닌가. 그러자 해리의 표정에도 여유가 돌아오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너 지금 취한게 맞는 거 같다."
"우으…"
피터의 방은 2층이었지만 도저히 무사히 계단을 올라갈 것같지가 않았다. 해리는 결국 피터의 허리를 감은 팔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어 지지하면서 자신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유도했다.
"졸업도 했으니까 같이 한 잔 하자고 할때는 그렇게 빼더니."
"응…"
걸음걸이가 꼬이면서 피터가 자꾸만 넘어지려고 했기 때문에 고작 방까지 가는데에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카페인 때문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러냐."
"우웅…"
해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간신히 문턱을 넘었다. 해리는 으레 취한 사람을 상대로 그러듯, 어차피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핑계삼아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뭐, 덕분에 버킷리스트 하나는 채웠네. 같이 대학에 가면 이런게 일상일 줄 알았는데. 같은 대학은 무슨, 난 후계수업이나 받고 있고, 넌 맨날 아르바이트하느라 집에는 붙어있을 새가 없고… 그 와중에도 난 너 좋으라고 별 수작까지 부려가며 간식 좀 챙겨줬더니 줘도 못먹어서 이 꼴이야."
드디어 침대에 도달한 해리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던지듯 피터를 눕혔다. 피터는 정말로 술에 취한 사람마냥 게슴츠레한 눈을 추켜뜨려 시도했다가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직전까지도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던 해리에게는 피터에게 토로하려던 불만이 여전히 잔뜩 남아있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서도 차마 계속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해리는 결국 웃으면서 피터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정돈된 머리칼을 헝클이자 열이 올라 붉어진 이마 위로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삐죽 흐트러졌다. 그러자 피터가 침대 가장자리에서 힘없이 펄럭이던 손으로 불쑥 해리의 손을 움켜잡았다.
"해리…"
여전히 피터는 해리와 정확히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고, 이름을 부를 때의 발음은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피터는 마치 술주정을 하는 사람처럼 웃으며 꼭 붙잡은 해리의 손에 뺨을 대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대로 한참이나 말이 없자 조금 전 피터가 어눌하게 중얼거린 것이 제 이름이였던 건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해리가 곧 손을 빼내려 했지만 피터는 완전히 늘어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놀랄만큼 강한 손아귀로 재차 해리를 붙들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흐물흐물해진 정신 때문인지 한참을 더 유의미한 발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해리는 뿌리치려던 것을 포기하고 피터가 손을 놓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카페인 쇼크로 정신을 아득히 날려버린 사람의 행동에 의미가 있진 않을 것이다. 피터는 여전히 단어나 문장이라기보다는 그저 신음에 가까운 끙끙거림을 반복하다가 금방이라도 잠들 사람처럼 숨소리가 느려진 후에야 겨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하려던 말을 끝냈다는 듯, 그제야 피터의 손에도 힘이 빠졌다. 겨우 그 말 하나를 하고싶어서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었나 싶어 맥이 빠졌다.
"참나."
해리가 피식, 웃었다.
"고마운 줄 알면,"
해리는 자연스럽게 맞받아치려던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서 그 사이 완전히 눈을 감아버린 피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른 숨소리가 고요한 공기 속에 내려앉았고, 천천히 들썩이는 가슴팍의 움직임은 평온했다. 제 할 말만 끝내놓고는 홀랑 잠들어버린 피터를 보면서 해리는 여전히 자신이 하려던 대답의 끝을 찾을 수 없었다. 고마운 줄 알면, 뭐? 나 좀 알아달라고? 어차피 해리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는 바랐을런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해리가 피터에게 가지는 애착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종류였으며 그건 피터와 함께하기 위해 터득해낸 전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해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의 뒤에 이어질 문장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
해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와서 아쉬움이나 미련 따위를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모처럼 생긴 기회를 무의미하게 날려버리지 않는 건 다른 문제였다. 해리는 곤히 잠든 피터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그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이 정도 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