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x

피터 파커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만큼 쉬운 건 없다. 적어도 해리 오스본에게는 그랬다. 여느 평범한 가정이라면 응당 얻을 수 있어야 했던 아버지의 애정을 제외하면, 결코 평범하다고 표현하기 힘든 가정환경 탓에 해리는 어릴 적부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쉽게 가질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아버지의 관심을 대가로 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부모의 애정이란 그 무엇으로도 가치를 메길 수 없는 것이니까.

 

현대 사회에서 값어치를 환산하기에 가장 유용한 도구는 돈이었다. 물건은 말 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성장한 후에는 사람의 마음조차도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노먼은 마치 그가 표현할 수 없었던 애정을 돈으로 대신하듯 해리에게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해리에게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유일한 자산이었기에─역설적이게도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돈은 편하다. 세상 모든 건 돈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명제에 대한 해리의 견고한 믿음은 퍽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미들스쿨을 지나 하이스쿨에 진학하고, 사립에서 공립으로 환경이 바뀌었을 때에도 마치 만고의 진리처럼 굳어진 그 명제는 변함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쉬우리라. 공립 학교의 학생들이라면 그래봤자 중산층 이하일테고, 돈이란 없는 자에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해리의 예상대로 그는 공립고등학교에 오고서 한 동안은, 몇몇 학생과 교사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이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평탄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피터 파커는 그런 해리의 세계를 돌아가게 만들던 법칙으로부터 처음으로 어긋난 소년이었다. 돈을 받지 않는 건, 그래. 간혹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는 치들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피터는 해리의 대리과제 요구를 수락하지 않은 이유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는 듯, 돈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정말로 그의 리포트 작성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순전히 상대의 선의에만 의존하여 무언가를 얻어내는 경험은 해리에게 있어 굉장히 낯선 기분을 들게 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받지 않고도 피터는 마지막까지 해리의 과제를 완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는 B+라는 점수로 돌아왔다. 그것은 숱한 과외에도 불구하고 해리가 지금껏 받은 것 중 가장 높은 점수이기도 했다.  

 

해리는 피터가 보여준 대가 없는 인내심과 도움의 손길을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으로 여겼다. 해리가 생각했을 때, 피터가 만들어낸 성과는 무상으로 끝내기에는 아까울 만치 가치가 있었다. 노먼이 데려왔던 과외 선생보다도 두 단계는 더 높은 점수다. 그렇다면 응당 그 자가 받아먹은 과외비용보다는 더 많은 돈을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해야만 하는 과제를 타인에게 돈을 주고 시키는 일이 원칙에 어긋남은 인정했지만, 그것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일은 적어도 해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해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피터는 여전히 돈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번 일은 대리과제와 같은 부정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가라는 해리의 설득에도 마찬가지였다. 해리는 피터에게 자신이 주려는 금액은 결코 부적절할 정도로 많은 액수가 아니며, 과제를 하는 과정에서 받은 도움을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과외 비용으로서 적절한 수준임을 설명했지만 돈을 받지 않겠다는 피터의 의사는 확고했다. “하지만 난 네 과외 선생님이 아니잖아.” 그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아니었지만. “친구 사이에는 돈을 받지 않아.” 

 

해리는 그 말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수준 낮은 공립 학교에 친구라고 할 만한 녀석은 없었으나 미들스쿨을 보냈던 사립 학교에는 나름대로 비슷한 급을 가지고 어울리던 몇 몇 학생이 있었다. 공립으로 옮겨오자마자 연락이 끊겨버린 그 놈들이 ‘친구’의 정의에 부합한지는 차치하고서, 해리는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비록 오스코프 만큼은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기업에서 한 자리 차지한 이들의 자녀였기에 해리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은, 해리 만큼이나 주고 받는 일에 계산이 빨랐다. 다만 공립 학교의 양아치들과 약간 다른 점이라면 셈을 위한 수단이 꼭 돈 하나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돈에는 크게 아쉬울 것 없는 녀석들이니까. 

 

혹시 그런 걸 원하는 걸까? 해리는 내심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다만 피터가 새로운 약이나, 클럽 VIP룸의 출입권 따위를 원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고위직 자제들에게 한 다리 걸쳐볼 연결다리를 원하는 것도 아닐테다. 해리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피터에게는 무얼 주어야 할까. 명품 시계? 한정판 조던? 사진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최신 카메라가 나을까? 선물로서 물건을 마련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가격에만 의존하여 무턱대고 물건을 고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노먼이 일찍이 당부하던 말 중에도 있지 않던가. 쓸모 없는 선물은 주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다행히도 해리는 이런 경우에 써먹을 수 있는 차선책을 알고 있었다. 이 역시 어릴 적부터 옆에서 노먼을 보며 습득한 요령이었다. 유형의 물건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무형의 가치를 활용해라. 물론 사회적으로, 그리고 비지니스적으로 접대라고 부르는 노먼의 그것에 비하면 해리가 하려는 제안은 지극히 점잖은 종류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밥이나 한 번 사게 해줘.”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거린 해리가 퍽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의외로 상식적인 제안에 놀랐는지 피터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비로소 해리의 얼굴에서 평범한 고등학생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는지 피터는 옅게 웃고서 

 

“그래.” 

 

라고 선뜻 대답했다. 마침내 피터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해리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쨌든, 피터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그만큼 그에게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일 저녁이야.” 행여 피터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 세라 냉큼 말했다. “아주 끝내주는 곳으로 예약해 놓을 테니까.”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내심 갸웃거렸다. 해리가 왜 예약이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일하게도 피터는 그 말을 해리의 실수라고 대수롭지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 그래봤자 고등학생, 밥을 사겠다느니 한 턱 쏘겠다느니 하면서 제 아무리 거창해져도 결국은 맥도날드 아니면 쉐이크쉑 정도를 예상한 것이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자 마자 해리와 함께 그의 개인 기사가 모는 자가용의 뒷자석에 오르면서도 피터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맥도날드, 아니면 쉐이크쉑. 잘 빠진 검은색의 본네트가 번쩍이는 롤스로이스를 타고서 패스트푸드점에 가는 건 물론 신선한 경험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지나치자 피터의 머릿속에도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맥도날드와 쉐이크쉑은 물론 피터가 알고있는 적당한 가격대의 식당을 계속해서 지나치기만 하자 뒤늦게나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해리는 대답 대신 자신만만한 얼굴로 씩 웃을 뿐이었다. 

 

“내가 기대하라고 했지?”

 

피터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가방을 끌어 안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렇게 도착한 레스토랑 앞에서 피터는 해리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가방끈을 질끈 움켜쥔 채 못박힌 듯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레스토랑 입구로 진입하는 차를 발렛이 맞이해주는 그 곳은 출입문에서부터 고객을 안내하기 위한 웨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피터가 단 한 번이라도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곳일 뿐더러 애당초 위치부터가 값비싼 명품샵이 몰려있는 쇼핑 스트리트다. 맨해튼에서도 특히 물가가 높은 지역인 탓에 그 근처로도 발길을 향할 일이 없는 곳. 비록 퀸즈 출신이긴 하지만 나름 뉴욕 토박이라고 할 수 있는 피터에게조차 지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거리였다. 

 

그곳에서도 가장 입지 좋은 길목에 보란듯이 위용을 뽐내고있는 레스토랑은, 주변이 온통 고가의 상점들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틈새에서도 독보적으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워보이는 외관을 자랑했다. 이런 곳이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라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레스토랑 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새만으로도 계급적인 차이가 한 눈에 보였다. 피터가 가진 경험과 지식만으로는 차마 이 레스토랑의 가격대를 가늠해볼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밥 한끼 사주겠다’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설령 그 범위를 고등학생이 아닌 사회인까지 확장시킨다 하더라도 말이다.

 

“뭐 해, 안 들어가고.”

 

피터가 움직이려 하지 않자 해리는 그의 망설임을 다른 이유로 해석했는지

 

“혹시 프렌치 코스요리는 취향이 아니야?”

 

약간은 불안한 기색으로 묻더니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도 일단 먹어보면 입에 안 맞는다고는 못할 걸. 미쉐린에서 3스타를 받은 곳이라고.”

 

결국 피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가 해리를 전혀 알지 못했다면 꽤나 정성을 들여가면서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짧게나마 함께 과제를 하면서 어울린 해리 오스본은  재수없다는 교내의 소문과는 달리  악의적인 과시나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해리의 지금 행동 역시 결코 거들먹거리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 해서 넙죽 받아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이 피터에게는 너무나 과했다. 이건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잠깐 자존심을 내려놓고 제 처지로는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을 누리는 일은 쉬웠으나 그 잠깐의 일탈은 앞으로 해리와의 관계에 있어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모처럼 새로 사귄 친구가 아닌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사귄 친구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피터는 설령 지금껏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서 세상을 보아왔더라도  친구란 동등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역시 이건 아냐, 해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해리에게 피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곳은 너무 비싸.”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내가 사는 건데.”

 

그러나 해리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도 피터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이게 올바른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해리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해리는 피터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그는 해리에게 무언가를 제공받거나, 대가를 약속받지 않았음에도 선뜻 호의를 베푼 첫 번째 사람이었다. 다만 매번 그렇게 물질적인 이득이 없어도 친구라고 부르는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별개의 문제다. 해리는 대가 없는 선의에 대해 퍽 회의적이었다. 더군다나 해리처럼 많은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지금 당장이야 무언가를 주고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리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알게 될수록 선의는 소모되고 저 순진한 녀석도 현실적인 계산을 하게 되리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도움을 받은 일에 대한 정당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젠장, 뭐가 그렇게 복잡해? 내가 괜찮다잖아. 넌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리는 단정하게 세팅된 머리칼을 헤집으며 짜증을 부렸다. 

 

“돈도 싫어, 식사도 싫어. 그러면 네가 말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게 뭔데?”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추켜들며 대답을 재촉하자 피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말의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지금까지 쭉 하려던 말을 입 속에서 곱씹고 있기라도 했던 것만 같은 모습에 해리는 내심 고소했다. 그래, 너도 뭔가 바라는게 있긴 했었나보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요구가 명확한다는 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얼마나 대단하고 거창하길래 이토록 피곤하게 굴었는지 궁금해서라도 해리는 얌전히 피터의 남은 말을 기다렸다. 피터가 무엇을 원하든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You didn’t say yet ‘THANK YOU’”

 

그러나 피터가 내놓은 ‘요구사항’은 거창하기는 커녕 지극히 단순했으며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해리가 미처 예상할 수 없었을 만치 뜻밖이었다. ‘Thank you.’ 그저 간단한 말 한 마디에 지나지 않는 그 짧은 문장은 해리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말이기도 했다. 고작 말 뿐인 입 바른 감사 인사에 사회적인 합의 외에 무슨 가치가 있느냔 말이다. 그에 비하면 금액의 크기는 마음의 크기라고도 하지 않던가.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 물질 만큼 알기 쉬운 척도도 없다. 때문에 해리가 만나 온, 그리고 알아 온 모든 사람들은 형식적인 말 보다는 눈에 보이는 명확한 물질을 선호했다. 해리의 세계에서 고작 말 하나로 무마되는 감사란 지불할 대가가 없다는 의미였고 그건 곧 빚을 진다는 뜻이었다. 

 

“그냥 그거면 돼.”

 

그러나 피터는 정말로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친구 사이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해, 해리.”

 

해리는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연신 벌어지려는 입을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며 벙긋거렸다. 돈은 늘 해리에게 가장 손쉬운 수단이었다. 누구도 마다한 적이 없기에 배신도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거면 된다고? 해리는 처음으로 겪는 거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꾸만 잇사이로 말려들어가는 아랫입술을 질겅거렸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불신이 맴돌았다. 진심인가? 그렇게 세상물정을 모르나? 나중에 가서 딴 말을 하진 않을까? 피터가 원한 것은 정말인지 간단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고민은 한참을 더 이어졌으나 결국 피터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뿐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고도 해리는 망설였고 몇 번이나 크흠. 헛기침을 한 끝에 어색함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그러나 약간은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과제 도와줘서 고마웠어, 피터.”

“응.”

 

피터가 웃었다. 단순한 만큼 깔끔했다. 정말 이걸로 끝이라고? 해리는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피하면서 괜스레 뒷목을 문질렀다. 어색한 만큼이나 민망하기도 했다. 해리는 꼭 빚을 남긴 것만 같은 부채감과 동시에 모순적인 편안함을 느꼈다. 관계에 값어치를 메기고 가치를 따져가며 가격을 지불하던 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낯선 감각이여서 해리는 영 마뜩찮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구두 끝으로 바닥을 툭, 툭 치는 행동을 반복했다.

 

피터는 해리에게서 전해지는 묘한 불편함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친구와 함께 과제를 한 일이 무언가 보답을 받을 만큼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여지껏 알아 온 삶의 방식을 단숨에 바꾸기란 어려울 것이다. 피터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레스토랑 입구와 다소 기가 죽은 것 같은 해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음, 정 네가 뭔가를 사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고개를 든 해리가 피터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해리가 자신의 방식에서 한 걸음 물러서 주었으니 이번에는 피터의 차례다. 그 둘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이해보다는 조금씩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일이었다. 친구란 그런 것이지 않던가. 적응과 양보는 해리 뿐만 아니라 피터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은 아무래도 무리였지만 오늘 일을 기념 삼아 딱 한 번 얻어먹는 것쯤은 괜찮을 것이다. 피터는 머릿속으로 그의 기준에서 지나치지 않은 가격이면서도 해리의 기준에서 너무 형편없지는 않을 만한 식당을 면밀히 골라내며 말했다. 

 

“여기 대신 내가 고른 식당으로 가자.”

 

과연 피터가 말하는 식당이 어떤 곳일지, 적어도 해리가 선택한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과는 전혀 다른 곳이리라 예상할 수는 있어도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해리는 그 곳에서 15달러 짜리 로스트 비프가 가장 비싼 메뉴라는 사실과 함께, 그 다이너야말로 피터가 선택할 수 있는  어쩌면 알고 있는  식당 중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리의 세계는 15달러 짜리 로스트 비프를 특별한 식사로 여기는 피터의 조그마한 세계로 인해 넓어지게 되리라.

 

이 소박하기 짝이 없는 소년의 존재가 자신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해버릴지 아직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해리는 피터와 함께 말리부 다이너로 향했다.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