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는 책상에서 웹슈터의 기능을 조정하는 중이었고, 파커는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 미세하게 파지직거리는 전기 회로의 소리와 인두를 지지는 납땜 소리를 제외하면 방안은 고요한 정적으로 가득했다. 애당초 그리 말수가 많지 않은 파커에게조차 피터를 곁에 두고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건 꽤 어색한 일이었다. 마침내 파커가 책을 무릎 위에 뒤집어 얹으면서 입을 열었다. "피터." 이름을 부르자 막 웹슈터의 회로를 연결하고 있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몸을 돌려 파커를 바라본 피터는,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대답 대신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띠링. 파커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붙잡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피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화면을 톡. 톡. 두드려 대답할 내용을 적었으나 잠시 뒤, 글자를 전부 지워버리고 직접 입을 열어 말했다.
"작업은 잘 돼가?"
띠링. 이번에도 핸드폰. 다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은 알림음이 띠링. 띠링. 띠링. 연달아 울렸다.
파커가 던진 질문은 극히 짧았지만 피터는 마치 대화의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쉬지도않고 속사포같은 메시지를 쏟아내었다. 텍스트만 읽고 있어도 현란하게 양손을 휘적거리며 수다를 뱉어내던 평소 피터의 모습이 고스란히 상상될 정도였다. 머릿속으로 그런 때의 피터를 떠올리며 슬쩍 미소짓던 파커는, 그러나 금방 입매를 굳혔다. 어쨌든 지금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더욱 바쁘게 손을 놀려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핸드폰 메시지는 지금도 멈추지않고 피터가 웹슈터의 도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대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지만 파커는 그것을 읽지도 않고 말꼬리를 잡아 채듯이 물었다.
"언제까지 말하지 않을 셈이야?"
뚝. 메시지가 멈추었다. 애당초 조용했던 방안이지만 유난히 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예 의자를 돌려 앉아 파커와 마주본 피터는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파커가 눈썹이 살짝 추켜 올라갔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는 것은 화가 났다는 뜻이었고,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잇사이로 밀어넣은 입술을 꾹 악물자 피터가 당황했다. 안절부절 못하며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그 뿐, 파커를 달래기 위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기가 죽은 강아지처럼 눈썹을 늘어트리고서 파커의 눈치를 설설 보면서도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만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건 알았다. 자신의 세계에는 없는 마법의 존재가 신기해서 쉬지않고 입을 재잘거리며 생텀을 돌아다니다가 짜증이 솟구친 스트레인지에게 마법으로 얻어맞은 일이 불과 며칠 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피터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 시전한 마법이 그의 멈추지 않는 수다와 뒤섞여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피터는 지금도 언제든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단, 딱 한 마디. 그가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만.
이를테면, 이렇다. 자신이 마법에 걸렸음을 알게된 피터가 스트레인지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짜증나요." 였다. 그것이 혼잣말이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든, 그 대상이 스트레인지이기만 한다면 피터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직 '짜증나요.' 가 전부였다. 제 아무리 입을 열기 전 하려는 말을 수번이나 되뇌이고, 한글자 한글자를 천천히 곱씹어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성대를 울려 유의미한 단어를 만들어내려는 그 순간 혀와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여버렸고, 피터는 또다시 스트레인지를 향해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짜증나!"
반면 핏을 향해 내뱉은 말은 "자랑스러워." 였다. 때문에 스트레인지는 피터의 증상이 '짜증나' 밖에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한 가지 말뿐이 못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었다. 바로 그 사람을 향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이렇듯 스트레인지에게는 짜증나, 핏에게는 자랑스러워 라는 말을 하게된 피터였으나 파커는 아직도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가장 강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파커를 앞에 두고 무심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리던 피터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허겁지겁 자신의 입을 꽉 틀어 막은 탓이었다. 피터는 아예 숨까지 참아가면서 짓눌린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남을 만치 필사적으로 움직일 뻔 한 입을 저지했다. 마치 절대로 이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는 듯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했지만 다른 이들과 자신을 대할 때의 반응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대부분의 일들은 무던하게 넘겨버리는 파커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는 핏과 대화를 할때면 입에 의한 발화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주절거리며 손으로는 핸드폰 메시지를 보냈다. "자랑스러워. 자랑스러워.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단조로운 중얼거림으로 시작되었던 말에는 어느샌가 운율이 붙어 이제는 거의 노래처럼 들렸다. 처음에는 이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핏조차도 이제는 질린 표정으로 "알겠으니까 입은 좀 다물면 안될까?" 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파커의 앞에 서면 피터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가도, 흠칫 놀라 입을 막거나 혀를 깨물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대체 피터가 자신을 보면서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는 몰라도 상대에게 알리기 어려운 종류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핏에게 할 때처럼 그냥 말해도 돼. 그게 너도 더 편하잖아."
글자를 통해서도 피터의 호들갑과 다급함이 느껴졌다. 설령 의미없는 발화라 한들 떠들어대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피터의 성정을 생각하면 장시간의 침묵은 고행이나 다름이 없을텐데도 고집을 꺽지 않았다.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대체 이렇게까지 하면서 절대 말 못할 감정이란 뭘까 의문도 있었다. 제 아무리 숨기고 싶은 것을 밝혀내거나 캐내는 일에 관심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이 당사자가 된다면 계속 무시하기가 힘든 법이다.
"사실 날 싫어하기라도 해?"
"그럼 한심하다거나, 지루하다거나, 촌스럽다거나. 뭐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파커의 말이 이어질수록 피터의 눈이 커졌고 끝내는 입을 떡 벌리고서 고개를 가로젓는 동시에 마구 양손을 내저었다. 얼토당토않는 오해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반응이었으나 정작 말로는 부정문 한마디 내뱉지 못해 음소거로 표현되는 마임은 온전한 신뢰를 주기 힘들었다. 그저 말 한 마디만으로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상황이라면 더욱이.
"그냥 말해줘도 돼. 자주 겪어봤거든."
파커의 표정에 남은 의심과 불신보다도 체념과 자조의 웃음이 피터를 괴롭혔다. 수 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폭풍처럼 맴돌아 수 번이나 입을 벌렸다 닫기를 반복했으나 머리를 쥐어 뜯고 답답함에 가득 찬 신음을 토해내면서도 피터는 결국 핸드폰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파커의 핸드폰에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양의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니야, 형. 그거 진짜 아냐. 아, 제발 좀 믿어줘. 진짜! 절대! 완전 아냐! 형은 완전 멋지고, 대단하고, 다정하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어, 그리고 또, 또─…
피터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파커의 핸드폰이 더이상 울리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 발 늦게서야 손을 멈추고 핸드폰 화면에 처박힌 고개를 들어 파커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무성의하게 던져놓은 핸드폰은 아예 전원을 꺼버렸는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묵묵부답이었다. 파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한숨을 내쉬자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할게."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들어올린 양손을 툭. 떨구고서 말했다.
"못 믿겠어."
피터로부터 몸을 돌린 파커가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터는 당황했지만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그저 입술 만을 달싹이면서 파커에게로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촉촉해진 눈빛과 힘없이 처져버린 팔자눈썹 만으로도 피터의 갈등을 가늠하기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언으로 전해지는 진심은 없었다.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던 피터는, 파커가 기어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기 직전. 황급히 달려가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마침내 내내 말소리를 삼키듯 꾹 다물고 입술을 말아넣고만 있던 입을 열었다. 질끈 눈을 감은 피터가 소리쳤다.
"사랑해!!"
"…뭐?"
우뚝, 파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피터는 손목을 놓았지만 여전히 눈을 뜨기는 커녕 이제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서 열렬한 고백의 말을 반복해서 늘어놓았다. 뭐가 그리 담아둔 말들이 많았는지, 배속 버튼을 누른 것 마냥 평소보다 두 배정도는 빠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진짜 사랑해. 오직 형만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내 목숨보다 사랑해!"
누구랄 것도 없이, 그 말을 하고있는 피터는 물론 듣고있는 파커까지도 서서히 목 아래쪽에서부터 발갛게 열이 올랐다. 숫제 귓불까지 붉게 물들어버린 피터가 아악, 절망에 찬 비명을 지르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사랑고백을 숨돌릴 틈도 없이 연사로 얻어맞고 있는 쪽은 파커인데도, 어째 저가 더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더니만 또 다시 그놈의 핸드폰을 쥐었다. 이미 파커의 핸드폰은 꺼져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서 뭐가 그리 서러운지 훌쩍이는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가며 메시지를 적었다. 한 번 트여버린 입이 그동안 참아온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열심히도 움직였다.
"내가, 내가! 내가!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런게 아니라 훨씬 멋지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같이 저녁도 먹고, 분위기를 잡아서, 남자답고 진지하ㄱ… 어어?"
작성 중인 메시지의 내용을 그대로 입을 통해 줄줄 읊어가던 피터가 뚝. 멈추며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번에도 유치하기만 한 날것의 구애 멘트를 반복해서 지껄일 줄 알았던 입은 뜻밖에도 피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슬그머니 추켜든 시선이 머리 끝까지 스팀이 올라버린 파커를 향했다.
"분위기를 잡아서… 남자답고 진지하게 고백하려고 했거드은…"
"그러니까 네가 날, 어, 그런 의미로?"
더듬더듬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핸드폰이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서 띠링. 수신음을 토했다. 피터의 핸드폰이었다. 마음같아선 그 역시 전원을 끄고 침대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발신자명이 다름아닌 스트레인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도망갈 구실이 필요하기도 했기에 굳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피터는 울고싶어졌다.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건데요, 닥터 스트레인지. 누구보다도 멋지게 고백하고 싶었던 원대한 야망과 계획은 진작에 망해버렸다. 이제 파커의 머릿속에 남은 피터의 첫 고백은 떼쟁이 아이의 발악과 투정 사이의 무언가 같은 꼴사나운 모양새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만약 스트레인지가 눈앞에 있다면 마법이 풀리지 않은 척, 반나절은 붙들어놓고 환청이 되어 귓가에 딱지가 내려앉을 때까지 소리쳐 주고 싶었다. 짜증나. 당신 완전 짜증난다고! 어쩌면 그걸 예상했기에 방문을 넘어오듯 피터 앞에 직접 나타날 수 있는 양반이 문자 메시지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