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내쉬(라스트홈::앤드류 가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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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


언제부터인가 그 아이가 통 보이지를 않았다. 하루 종일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이 좁지도 않은 뉴욕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지, 거의 매일같이 뉴욕 어디에선가 한 번씩은 마주치곤 했던 말간 얼굴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피터를 발견할 때면 늘 망가진 스쿠터를 질질 끌고 있거나, 아르바이트 사장에게 호통을 듣고 있거나, 활짝 열린 가방에서 질질 흘린 물건을 줍느라 행인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둥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까. 난 자리는 빠르게 눈에 띄었고 걱정을 이기지 못한 데니스가 피터의 자취방을 직접 찾아가기까지는 채 일주일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딧코비치는 주방 수도를 고치기 위해 불렀다가 부탁하지도 않은 셋방 문고리까지 바꿔주었던 친절한─이라고 표현하면서 호구라고 생각하는─수리공의 방문을 환영했으나 이번에는 선의를 베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깨닫고 빠르게 실망하고 말았다. 딧코비치는 일찌감치 피터의 부재를 알았지만 그 사실에 대해 딱히 관심을 가지는 눈치는 아니었다. "뻔해, 집세 내기 싫어서 살금살금 도망이나 다니는 거겠지!" 그는 굳게 닫힌 피터의 방문을 노려보며 역정을 내었다.

그런 딧코비치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피터가 사라지고 한 달째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어쩌면 어느새 월세 날이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데니스는 꾸준히 피터의 대답 없는 방문을 두드렸고, 그때마다 딧코비치는 데니스의 등 뒤에 팔짱을 끼고 서서 집세를 받아낼 준비를 갖추었다. 대답은 물론 아무런 인기척도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딧코비치의 수전노 같은 얼굴에도 설핏 걱정이 떠올랐다. 자존심인지, 고집인지, 굳게 다문 입매는 여전히 심술궂기만 했으나 그 역시 피터의 방문 앞을 기웃거리는 이유가 단순히 밀린 집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길거리에서 뜻밖에 피터를 마주칠 때는 그리도 좁게만 느껴졌던 뉴욕이거늘, 갑자기 증발해버린 단 한 명의 행적을 좇기에도 뉴욕은 터무니없이 넓은 도시였다. 그저 심각한 일이 생긴 것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피터가 증발하고 두 달째가 되자 딧코비치는 지극히 집주인 다운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부디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그 낡은 빌라를 찾아갔을 때, 피터의 방 문은 바람대로 활짝 열려있었으나 그 안에 보이는 얼굴은 온통 낯선 사람뿐이었다.

비록 얼굴은 낯설었으나 그 풍경만큼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입구에는 집행 절차를 확인하기 위해 경관 한 명이 서 있었고, 방 안을 헤집고 있는 두 사람은 부동산 업자와 인부일 것이다. 그들은 빈 박스에 피터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쑤셔 담아 방 문 밖으로 내놓았다. 커다란 박스를 한가득 메운 물건들을 보면서 데니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굳이 질문을 던졌다. 현실을 상기하는 것 외에는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문 밖에 서서 그들이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딧코비치가 대답했다.

"집세 한 푼 내지 않고 날라버린 세입자를 강제퇴거시키는 중이오."

표독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의 한 귀퉁이에는 씁쓸함이 배어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양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가 편해지기 위한 위선임을 경험으로 알았다. 저 일말의 망설임에 속아 감성에 호소하는 일은 현실과 금전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딧코비치는 의외로 오래 참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애당초 그는 예전부터 집세를 밀려오던 피터에게 독촉과 잔소리를 퍼부을지언정 강제 퇴거 협박만큼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다만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세입자의 뒤통수에 집세를 외치는 일과, 거진 실종이나 다름없는 세입자를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건 분명 다른 문제였다. 모든 물건이 그대로인 만큼 자의에 의한 부재가 아닐 것임에도 그랬다. 데니스는 딧코비치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그렇다 한들 순순히 수긍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통보도 없이 퇴거라구요?"
"난 법대로 했소, 내쉬씨. 납입 독촉장을 발송했고, 퇴거 요구장도 보냈단 말이오."

물론 공증을 받아 법적 효력을 지니는 그 증서들은 지금까지도 우편함에 처박혀 있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데니스 역시 알고 있었으며, 동시에 딧코비치의 주장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부동산 업자의 멱살을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제아무리 엿같아도 법은 법이었다. 뉴욕에 와서도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데니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낡은 옷가지가 담긴 박스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어쩌시려고요?"
"그야 적당히 버려야겠지."

미간을 찡그리며 끄응, 난처하기 짝이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 딧코비치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닐지언정 언젠가 피터가 나타날 때까지 물건들을 보관해줄 만한 인물은 못 되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이여서, 데니스는 망설임없이 박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제가 가지고 있을 테니 나중에라도 그 녀석이 오면 연락해 주세요."

영 마뜩잖은 시선이 데니스를 흩었다. 낡아빠진 문짝의 손잡이와 경첩부터 시작해, 데니스가 피터에게 베푸는 소소한 친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봤자 가족이나 친구라고도 표현하기 어려운 타인이다. 뉴욕에서 아무런 의도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선의는 보기 힘들었다. 딧코비치는 미심쩍다는 눈치였으나 아예 버려지는 것과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수리공에게 맡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일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결국 그는 데니스가 피터의 박스를 옮기는 일을 막지 않았다. 짐은 간소하기 그지없어서, 계단을 두어 번 정도 오르내리고 나니 문밖에 차곡차곡 쌓인 박스를 전부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피터의 물건들은 데니스가 끌고 다니는 업무용 벤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트렁크는 공구와 자재들이 가득했기에 박스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놓였다. 의자 위에 한 박스, 아래에 한 박스. 종종 그와 함께 작업을 나가는 스코티는 앉는 자리가 좁아졌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 번은 제멋대로 박스 안을 뒤적이거니 이름표가 달린 구식 카메라를 끄집어내고서 물었다. "피터 파커가 누구야?" 데니스는 당장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으면 다시는 차에 태워주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 후로 또 한 달 가까이 딧코비치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니, 연락이라면 있긴 했다. 천장에 물에 샌다거나, 창틀이 삐뚤어졌다거나, 변기가 막혔다거나 피터의 방이 그 꼴이 되어도 셋방을 위해서는 수리 요청 한 번을 한 적이 없으면서, 제 집만큼은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곧잘 데니스를 불러대곤 했다. 이제는 당연다는 듯 비용을 후려쳐버리는 딧코비치의 수리 요구 전화쯤이야 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아직도 그 집의 층계를 올라가면 집세 독촉을 피해 범 만난 토끼처럼 후다닥 뛰어 내려오는 어린 청년과 마주칠 것만 같아서. 데니스는 차마 이 몹쓸 고객을 잘라낼 수가 없었다.

거의 열정페이나 다름없는 수리비에도 불구하고 그 열악한 5층짜리 빌라를 오가던 미련은 마침내 한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어서야 열매를 맺었다. 피터의 부재가 어느덧 4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는 날이었다. 공구함을 들고 벤에서 내렸다가, 빌라 입구의 계단 아래에 오도카니 앉은 피터를 발견했을 때 데니스는 제가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손꿈치로 눈을 꾹, 꾹 눌러가며 문지른 후에도 피터는 사라지기는 커녕 고개를 들어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내쉬씨." 3개월이 훌쩍 지났다는 점을 빼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궁금했고 혹시라도 신변에 문제가 생긴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행여 다친건 아닌지, 감당하기 힘든 큰일이 있는건 아닌지 묻고 싶었지만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날들을 통째로 들어낸 것마냥 변함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데니스의 시간까지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결국 데니스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서 뭐 해?"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서"

난처하게 웃은 피터가 뺨을 긁적이더니 황급히 덧붙였다.

"아, 물론 제 잘못이니까요. 쫓겨나는 건 당연해요. 그냥, 제 물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밀린 집세를 드릴 수가 없거든요"

침울해진 고개를 푹 숙이면서 멋쩍게 중얼거렸다. 데니스였다면 제아무리 언질도 없이 장기간 사라졌다지만 함부로 방을 빼냐며 한 번쯤 항변이라도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피터같은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분명한지라, 딧코비치의 절차가 정당했다 한들 억울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아직도 집세를 부르짖는 딧코비치의 호통 소리를 가장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적어도 사라진 동안 험악한 꼴을 당한건 아닐성싶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온갖 부정적인 가설들이 무색하게도 피터의 미소며 목소리는 한결같기만 해서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데니스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역량과 한계를 잘 알았다. 피터에게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강제 퇴거로 내던져진 소지품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보관하는 것 정도다. 강제 퇴거당한 방의 집세를 걱정하는 심성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하며 감사를 표할게 분명해서,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네 물건은"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잘 챙겨두었으니 가져가라고 말하려던 데니스는 곧 한 가지 의문점을 깨달았다.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고 있어?"

피터는 대답하는 대신 멍하니 입을 벌렸고, 동그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데니스의 시선을 피했다. 홈리스로 보이는 차림새는 아니었던 덕분에 곧장 떠올리지 못한 문제점이었다. 데니스는 피터의 옆에 똑같은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거처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한 손에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모텔비가 있었다면 차라리 밀린 집세를 먼저 해결했을 성정이니 딱히 묵는 곳이 없는게 분명했다. 조막만한 머리로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센트럴 파크의 노숙자들 틈새에 끼어들어 웅크리고 잠드는 모습이 너무나 그럴듯하게 연상되고 말았다.

뉴욕에 오기 전의 경험들 때문일까. 한때 뻔뻔스러운 거짓말과 탐욕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데니스에게 피터 파커는 계속해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특이한 청년이었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지도 모르는 순진함은 오히려 데니스로 하여금 한없이 제한 없는 선의를 건네고 싶어지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그조차도 선의라기보다는 지난날을 잊고 싶은 기만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데니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집으로 올래?"

피터의 눈이 커졌다. 데니스의 제안은 다분히 충동적이었으나, 어쨌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결코 가볍게 내뱉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피터의 몫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의심할 것이다. 어쩌면 불쾌하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눈빛에는 날을 세워 본의를 탐색하려 들지도 모른다. 설령 내색하지 않는다 한들 점잖은 거절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향한 경계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피터는 이내 놀랐던 눈을 접으며 웃었다. 자기 자신의 불운에 둔감하기 짝이 없는 이 어린 청년은, 그만큼 타인의 친절을 쉽게 믿었고 굳이 속내를 가려내려 들지 않았다.

"내쉬씨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감탄과 호의가 섞인 목소리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기만 하다. 데니스는 아이 같은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도록 미소 짓는 입술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계속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피터의 시선에는 오로지 사람을 향한 신뢰만이 담겼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투명하고 파란 눈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가장 깊은 본심까지 낱낱히 들여다 보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정말 그냥 도와주려는 것 뿐이야?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이 애는, 정말인지. 피터가 없는 동안 흡연을 다시 시작해버린 탓일까. 또다시 입 안에 씁쓰름함이 맴돌았다. 정말인지, 자신은 피터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 안으로 뛰어든 데니스는 연신 떨리는 팔뚝을 문질렀다. 봄이 오기 시작한다는 3월, 사시사철 따듯하다 못해 덥기까지한 플로리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데니스에게 뉴욕의 3월은 한 겨울이나 다름이 없었다. 낮 동안 차체를 데웠던 햇빛의 열기는 밤공기에 식어버린지 오래였다. 얇은 티셔츠 위에 걸친 겉옷을 꼭꼭 여미고 앞좌석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래봤자 6피트를 훌쩍 넘기는 성인 남성에게는 좁기만 해서, 구기듯 몸을 굽히며 대시보드 위에 발을 얹었다.

당장 잘 곳을 걱정하는 피터를 집으로 데려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혼자 사는 남자의 집에는 1인용 싱글 배드 하나 뿐이 없다는 점이다. 호기로웠던─아니, 사실은 긴장했지만서도─제안에 비해 볼품없을 정도로 좁은 침대에는 도무지 두 사람이 누울 수가 없었다. 뒤늦게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데니스에게 피터가 말했다. "저는 소파에서 잘게요."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는 싱글 침대보다 작은 2인용 소파에서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웅크리는 꼴을 보기 위해 피터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소파에서 자야만 한다면 차라리 데니스가 되어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피터가 집을 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차라리 맨 바닥에 누우면 누웠지, 절대 집주인을 소파에 자도록 내버려두고 침대를 차지할 성정은 아닌지라 데니스는 결국 겉옷을 다시 주워입고 내려놓았던 공구 가방을 집어들었다. "난 오늘 야간 작업이 있으니까, 침대에서 자." 그렇게 손님을 두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 차 안으로 기어들어온 것이 조금 전 일이다. 당연하지만 소형 벤의 앞좌석은 잠들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소파보다도 형편 없으리라.

차창 밖으로 들이치는 가로등의 불빛이 자꾸만 잠에 들려는 속눈썹을 파고들어서 모자를 꾹 내리 눌렀다. 야구모자의 넓은 챙이 얼굴을 거진 반 정도 덮어버리자 눈은 조금 편해졌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어중간한 날씨의 묘한 한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히터를 틀기에는 너무 아까웠기에 양 팔을 더욱 단단히 감싸 팔짱을 끼었다. 내일 일을 하려면 잠을 자야 했다. 한숨이 섞인 하품을 하면서 데니스는 불편한 몸을 뒤척였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조수석 쪽에서 똑.똑.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려 고개를 돌린 데니스는 모자 챙 아래로 설핏 보이는 얼굴을 확인하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젠장. 허둥거리며 대시보드에서 발을 내리다가 계기판을 걷어 찼고, 핸들에 정강이를 부딪혔다. 낮은 천장을 정수리로 들이 박는 바람에 차체가 흔들리자 당황했는지 피터가 한 걸음 물러섰다. 간신히 문을 열기 위해 조수석으로 팔을 뻗던 데니스는, 컨트롤 패널 아래에 놓인 재떨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콘솔 박스에 통째로 쳐넣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열쇠며 카드 같은 잡동사니가 담뱃재와 뒤섞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그제야 데니스는 조수석을 열 수 있었다. 피터는 데니스가 꺼내주었던 얇은 실내복을 그대로 입고서 조수석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알게모르게 움츠러드는 어깨를 본 데니스가 얼른 히터를 틀었다. 거처를 찾지 못한 피터의 짐은 여전히 차 뒷좌석에 있었다. 행거에 걸려있는 옷 중 아무거나 걸치고 나와도 괜찮았을 텐데, 데니스의 옷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왜 안 자고 나왔어?"

당황한 데니스가 더듬더듬 묻자 피터는 슬리퍼를 벗은 맨발을 의자에 올리고 무릎을 끌어 안으며 대답했다. 아직 밤 공기가 차갑기는 한지, 꼼질거리는 발가락 끝이 붉었다.

"손님이 왔었어요. 한 잔 하려 했다가, 내쉬씨가 없어서 돌아가셨지만요."

끄응, 약간의 짜증이 섞인 난처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누구인지는 이름을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주변에 양 손 가득 맥주를 싸들고서 예고도 없이 처들어오는 지인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데니스는 입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스코티. 피터는 트렁크 아래로 훤히 드러난 종아리를 문지르면서 이어 말했다.

"내쉬씨는 야간 작업에 갔다고 말씀드렸더니 오늘은 야간 일이 없다고 알려주셨어요."

눈치 없고 그만큼 생각도 없는 놈이란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도움이 안 될 줄이야. 데니스는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달리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해 외면하는 데니스에게 피터가 물었다.

"저도 여기에서 자도 돼요?"

형식은 질문이었지만,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웃고 있을지언정 꾹 다물린 입술에는 순한 얼굴과 대조되는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이제와서 거절을 해봤자 쫒아낼 방법은 없을 뿐더러, 쫒아낸다 해도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을성 싶었다. 데니스는 묵묵히 히터를 조금 더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 안에 담요 정도는 가져다 놓을걸, 때늦은 후회를 했다.

"등받이 젖혀줄게."

데니스가 조수석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콘솔 박스에 한쪽 다리를 올리면서 팔을 쭉 뻗었다. 데니스의 상반신이 조수석 쪽으로 넘어가 피터와 겹쳐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목덜미에 피터의 숨죽인 호흡이 닿았다. 데니스는 작고 느릿한 숨소리를 의식하지 않는데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면서 조수석 아래를 더듬었다. 우습게도 그럴수록 숨소리는 점점더 가까워져서 데니스의 집중력을 흐트려놓았다.

제 자리에서는 손쉽게 잡히던 레버가 남의 자리에서는 영 찾아지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좀 더 아래쪽까지 더듬기 위해 더욱 몸을 기울이자 내리누르는 무게감이 답답했는지 피터가 옅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미세하게 진동한 공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귓가가 핫핫하니 달아오르는 동시에 마침내 손가락 끝에 레버가 닿아서, 생각할 것도 없이 힘껏 당겼다.

의자가 덜컹이더니 순식간에 등받이가 젖혀지고 덩달아 피터의 몸도 휙, 뒤로 넘어갔다. 아무런 예고도, 대비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데니스는 놀란 피터가 반사적으로 허우적거린 팔에 턱을 얻어맞았다. "내쉬씨!" 마냥 가늘어보이던 손목의 스냅이 의외로 매서워서,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피터의 허벅지에 엎어져버린 데니스의 머리 위로 피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면서 내심 생각했다. 이 녀석, 힘 좋구나. 짧은 찰나였지만 뺨에 눌린 허벅지의 단단함이 퍽 인상적이었다. 짐짓 유순하기만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근육이었지만 동시에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은 딱 생각한 것만큼이나 부드러웠다. 턱이 욱씬거리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미쳤지. 데니스는 얼른 제 자리로 돌아와 떨어졌던 모자를 툭툭 털어내고 얼굴이 가려지도록 깊이 눌러썼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그 한번의 손찌검에 간단히 넉다운 되었다는 사실이 민망하기 그지없어서, 큭큭 웃었다. 약간의 유쾌함을 담은 웃음소리에 안심이 되었는지 그제야 당황으로 가득하던 피터의 얼굴도 조금은 풀어졌다. 데니스는 저를 향해 돌아 누운 피터에게 팔을 뻗었다. 큼지막한 손이 정수리를 가볍게 문지르자 금세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자."
"네에"

챙에 가려진 데니스의 얼굴을 살피면서 피터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수마를 품은 파란 눈 위에 조금씩 눈꺼플이 내려앉았다. 피터는 가만히 눈을 감았지만 평온했던 눈매는 곧 미세하게 찌푸려지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데니스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던 가로등의 불빛이 영 거슬리는 것 같았다. 데니스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주황색 불빛이 내려앉은 눈덩이를 덮어 주었다. 피터가 살짝 턱을 추켜 들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벙긋거리던 입술은 이내 양끝에 움푹 들어간 보조개를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수줍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제야 숨소리가 한층 작아지고, 오르내리는 가슴팍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데니스는 고르게 색색이는 피터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른하게 풀린 팔이 주륵 미끄러져 콘솔 박스 위로 떨어지는 모양새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불편한 잠자리에도 불구하고 피터는 금세 잠이 든 것 같았지만, 데니스는 그를 앞에 두고 과연 제대로 잘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피터가 내쉬는 나지막한 날숨은 좁은 차안을 떠다니다 데니스의 귓가에 살그머니 내려앉아 귓바퀴를 간질럽혔다. 점점 더 쌓여가는 그 미세한 간질거림 때문인지 혹은 히터의 더운 공기 때문인지 문득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니스는 창문을 조금 열고, 겉옷을 벗어 피터에게 덮어주었다. 으음. 옅은 잠꼬대 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이는가 싶었지만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차가운 밤공기가 조금이나마 열기를 식혀주었지만, 데니스는 여전히 잠들 수가 없었다.


벌컥, 뒷좌석을 열고 수그린 상반신을 밀어 넣었다. 행여 먼지라도 앉을까, 피터의 물건들로 가득한 박스에는 현장에서나 쓰는 방수용 천이 덮여있었다. 데니스는 그것을 걷어내고 박스 안을 뒤적였다. 피터가 당장 오늘 입어야 할 옷을 꺼내가기 위해 내려왔으나 정리되지 않은 박스에는 너무나 많은 물건이 불규칙하게 뒤섞여 있었다. 데니스는 미처 읽지도 못하는 단어로 적힌 논문 서적과 구형 카메라, 낡은 재봉틀을 파헤치고 그 아래에 깔린 옷가지 몇 벌을 간신히 끄집어내긴 했으나 지금 계절에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다. 

의자 아래에 있는 박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는 자명종 시계와 신발, 용도를 알 수 없는 전선과 몇 몇 기계 장치들이 옷과 뒤엉켜 있었고 그 옷들은 여름옷인지, 겨울옷인지, 잠옷인지 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딱 알맞는 옷을 찾기 위해서는 아예 박스를 한 번 뒤집어 엎는 편이 나을 성 싶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러기에는 차 안이 너무 비좁았다. 잠시 고민하던 데니스는 아예 박스 하나를 통째로 들어올렸다. 그것을 들고 아파트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고른 박스에 적당한 옷이 있기를 바랐다. 

집으로 돌아와 박스를 소파에 올려놓고 있을 때, 샤워를 끝낸 피터가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한 번 더 탈탈 털어내자 티셔츠의 어깨 부근에 어두운 물자국이 생겼다. 수건을 목에 걸친 피터는 데니스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따듯한 온수가 피터의 몸을 후끈하게 데워놓았기 때문인지 거실의 온도가 조금 높아진 기분이 들었다.

"욕실까지 빌려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뭐."
 
발갛게 열이 올라 따끈따끈해보이는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데니스가 어색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비죽비죽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수더분하게 내려앉아 평소의 피터보다 한층 앳된 인상은, 성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분명 어제 자면서도 입고 있던 셔츠와 트렁크인데, 이상하게 눈길을 주기가 어려웠다. 데니스는 피터를 애매하게 등진 채 턱짓으로 박스를 가리켰다. 

"옷만 꺼내기가 어려워서 일단 다 가져왔어."
"감사합니다."

박스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다가오자 피터의 몸에 스며있는 열기와 향기까지 훅 가까워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곁눈짓을 하자 아직도 축축하게 젖은 뒷통수가 보였다. 피터는 허리를 굽히고서 박스를 뒤적이고 있었다. 데니스의 시선이 얇은 머리카락으로부터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쫒았다.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일부는 박스 안으로 떨어졌고, 일부는 뒷목을 흘러내려 수건에 흡수되었다. 

피터의 몸에서 피어오른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데니스는 낯설어야 할 터인 피터의 체취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슬쩍, 앞섶을 잡아당겨 숨을 들이쉬었다. 두 팩 묶음에 9.99달러. 데니스의 몸에도 은근하게 남아있는 싸구려 바디워시의 향이 피터의 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데니스가 그 제품을 구입한 이유는 단순히 대용량에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다. 데니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제품의 라벨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것이 꽃 향기인지 혹은 과일 향인지 조차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살짝 묵직하게 내려앉는 우디한 코코넛 향은 단번에 데니스의 후각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지금껏 무심하기만 했던 그 향기가 이제는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