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내쉬(라스트홈::앤드류 가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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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대도시의 아침은 그 어떤 곳보다도 빠르게 시작되고, 꺼질 줄 모르는 뉴욕의 불빛은 늦은 밤에도 밝기만 하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대도시답게 공사 일정은 언제나 빠듯했다. 기자재를 손에 쥐는 그 순간부터 정신없이 나르고 세우고, 연결하는 작업에 매진하다 보면 어느덧 해가 지고 작업 현장을 비추는 불빛은 전부 주홍색 가로등으로 바뀌어 있다. 그제서야 그날 작업의 종료를 알리는 보스의 고함소리와 함께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동료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흙과 먼지로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고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면 하루의 일거리는 완전히 끝을 맺었다.

뉴욕은 일거리가 많았고 그만큼 바빴다. 현장이 하나 마무리되면 금세 다른 자리가 생겼다. 벤을 타고 돌아다니며 에어컨 실외기나 수영장 펌프 따위를 떼어내고, 퇴거 통보를 알린 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안관들의 집행 처리를 바라보는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고되었다. 근래 데니스는 한참을 잊고 지냈던 근육통에 다시금 시달렸다. 밤부터 아침까지 몸에서는 파스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릭 카버의 꽁부니를 쫓아다니던 시간은 마치 신기루마냥 빠르게 잊혀졌다. 몸은 힘들었으나 마음은 편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주말을 앞둔 날이면 동료들과 밤새 맥주를 마셨고, 그럴 때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깔끔하게 빗질을 하고 스프레이를 뿌려 정돈한 머리카락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넥타이는 목을 조르듯 답답했다. 독한 위스키는 입에 맞지 않았으며 고작 담배주제에 영 까다로운 시가는 피우는 것조차 어려웠다. 자신의 시가 한 개피를 건네주면서 릭 카버는 너무 깊이 들이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속까지 같이 마셔버리기에는 지나치게 뜨겁고 매울테니 그저 천천히, 겉 연기를 머금고 향만을 즐기라고.

데니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고급 시가에서 느껴지는 풍미는 분명 중독적일만치 향기롭고 달콤했지만 데니스는 오롯이 표면적인 향미만을 입에 담기가 힘들었다. 습관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키면 혀끝을 맴돌았던 잠깐의 향미는 빠르게 사라져버리고, 어느덧 그를 집어 삼키는 매캐한 독성만이 남아 괴로운 기침이 터져나왔다. 릭 카버는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아무래도 네게는 맞지 않는 것 같노라고 말했다.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시도를 해보았지만 애초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공구를 잡고 건설 현장에서 직접 몸을 움직여 일할 때 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래봤자 그 순간 뿐, 플로리다와는 달리 가로등의 불빛이 모자 챙 아래를 파고들도록 훤한 밤거리를 걸으면서 파고들기 시작하는 상실감은 아무도 없는 방 한칸짜리 아파트에 도착하면 데니스를 심해로 끌어내렸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등졌다는 것은 비단 거주지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플로리다에 두고온 모든 것들이 마음에 걸렸으나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그리 길지도 않았던 시간이 발목을 잡았다. 법적인 책임은 기소 유예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직접적인 증거 조작에는 관여하지 않은데다 오히려 고발자가 된 데니스는 기소 유예로 끝날 수 있었다지만 릭 카버와 프리맨은 달랐다. 물론 그들이 실형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끌어모은 부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벌금형이 전부였다. 다만 그러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쏟아부어야 했던 돈과, 재판으로 얻게된 막대한 손실은 데니스의 몫이 되었다. 불공평했지만, 그건 법원의 선고와는 별개로 데니스가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어머니는 편지를 통해 코너와 탬파에 있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알렸다. 더 이상 동네에 남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탬파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프리맨은 캘리포니아 전체의 부동산 시장과 건설업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예 다른 주로 뜨는게 좋을거야." 릭 카버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평생 화장실 수도나 고쳐주고 살겠다면 상관 없겠지만, 그런 소일거리로 애를 키우기는 힘들잖아." 그 역시 데니스로 인해 적지않은 손해를 떠안았지만 잠깐이라도 손을 잡은 동업자를 향한 미약한 잔정이라도 남았는지 뉴욕행 티켓을 마련해 주었다. 혹은, 피차 서로를 너무 깊이 알게된 탓일지도 모른다. 데니스는 감사인사 대신 권련 한 개피를 건네주었고 릭은 그것을 한 모금 깊숙히 빨아들였다. 이딴건 다시는 안 피우려 했는데,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릭의 충고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것보다도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데니스로 하여금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차마 가족들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간신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코너를 저 자신의 문제로 또 다시 낯선 도시에 끌고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래봤자 전부 핑계일 뿐, 데니스는 그저 코너를 다시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데니스의 눈꺼플 속에 남아 때때로 시야에 떠올랐다. 밤거리의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다보면 데니스가 쫓아냈던 사람들의 얼굴이 어스름한 불빛 안에 환영처럼 떠돌았다. 몸을 의탁할 곳이라고는 없는 노인부터, 만삭의 임산부, 말 조차 할 줄 모르는 이민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녀들. 그 끝에는 늘 코너가 있었다. 실망과 배신으로 가득한 아이의 얼굴이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릭 카버가 굳이 뉴욕행 티켓을 건넨 의도는 새출발을 하라는 뜻이었겠지만 뉴욕에 온다고 해서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한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일상으로 인해 잠시라도 잊을새라, 어김없이 자신의 잘못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 형태는 거리를 맴도는 부랑자일 때도 있었고, 공원에서 캐치볼을 하는 사이 좋은 부자의 모습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의심이나 불신도 없이 오로지 호감만을 담고 데니스를 바라보는 어린 청년의 시선일 때도 있었다.

기어코 뉴욕까지 데니스의 흔적을 쫓아온 프리맨의 유치한 보복이 있던 날이었다. 그에게 고용된 불량배들에게 흡씬 두들겨 맞았다. 얻어맞은 눈에는 핏줄이 서고, 입술이 터져서 침을 뱉을 때마다 핏물이 섞였다. 갈비뼈에 금이 갔는지 구부정한 몸을 질질 끌고서 간 곳은 우습게도 제 집이 아닌, 보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형편없이 낡은 아파트였다.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피터는 데니스의 몰골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서는 그를 자신의 방 침대에 앉혔다. 다급하게 온 수납장을 뒤적였지만 마땅히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평소 구급상자를 잘 채워놓지 않던 것을 후회하면서 연신 불필요한 사과를 하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비가 붙은건지, 아니면 어디서 싸움질이라도 한 건지. 피터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오로지 염려만을 담은 피터의 깨끗한 눈에는 순진하기 짝이없는 믿음이 있었다.

고작 몇 번을 봤다고, 고작 몇 번을 도와줬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감사 인사가 퍽 귀여웠고, 그런 주제에 자신이 겪는 부당함에는 말 한마디 못하는 답답함이 안쓰러워서 시작된 무심한 선의였으나 피터가 보여주는 시선은 그를 한없이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쉬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그 말과 눈빛이 숨통을 트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뉴욕에 오고서 마침내, 뭍으로 건져 올려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는 그대로 가라앉아 있어야 하는 물고기였나보다. 청산되지 않는 지난 날의 실수를 덕지덕지 달고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피터의 순수한 호의는 오히려 데니스로 하여금 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똑바로 마주하기에는 도저히 숨이 막혀서, 고개를 숙이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