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내쉬(라스트홈::앤드류 가필드)

x

피터 파커(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


크라이슬러 빌딩에 내려앉기가 무섭게, 피터는 마스크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답답했던 숨을 들이켰다. 밤공기를 헤치며 웹스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화끈거리는 양 뺨의 열기는 쉬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조금 전 그는 화마에 완전히 잡아먹혀 소방대원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건물에서 어린아이 두 명과 노인 한 명을 구해낸 참이었다. 바로 그 전에는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는 차량 탈취범을 끄집어내 거미줄로 둘둘 말아 도로에 던져놓았고, 또 그 전에는 3인조로 구성된 보석 가게 털이범을 간판에 매달아 주었으며, 그 직전에는 어리숙한 관광객에게서 현금을 뜯어먹으려는 불량배 두 명을 골목의 더러운 벽면에 붙여버렸다. 하루 종일 쉴 새도 없이 업타운과 다운타운을 오가면서 그만큼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피터는 무수히 많은 감사 인사를 들었다. 고마워요, 스파이더맨! 덕분에 살았어요. 다 당신 덕분이에요. 역시 대단해요. 멋져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스파이더맨 수트를 평범한 바지와 셔츠로 가리고서 일상 생활을 하다가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보이면 피터는 늘 그것을 지나치지 못했다. 덕분에 피터는 그가 하루 동안 받은 시민과 경찰의 감사에 못지않은 비난을 들었다. 강의 중간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피터를 보면서 한숨을 쉰 교수님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학생들은 짜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규정된 배달 시간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다 식어버린 피자를 받아든 손님의 욕설은 예삿일이었으며 가게 사장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친 끝에 마침내 피터를 해고해버렸다. 피터는 자신이 운이 없는 편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강의에 늦은 만큼 급하게 집을 나서는 바람에 제출해야 할 과제물을 착각했고 깜박 떼지 못한 세탁소 태그를 하루 종일 달고 다녔다. 큰맘 먹고 계산한 더블 사이즈 샌드위치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총성을 들은 피터는 가게를 뛰쳐 나가야 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돌아와 샌드위치를 달라는 피터를 점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남아있는 돈으로는 새 샌드위치는 커녕 자그마한 크기의 칩스 하나가 전부였거늘, 봉지를 뜯는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하나도 먹지 못하고 지나가던 꼬맹이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피터는 크라이슬러 빌딩 꼭대기에 던져놓았던 가방에서 옷을 꺼내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누군가는 정말인지 운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이런 하루가 피터에게는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오늘 하루를 불운하다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 많은 재수없는 일들에도 불구하고 피터에게는 자신의 운을 점치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피터는 버스나 전철을 타지도 않고, 그렇다고 곧장 자신의 집으로 향하지도 않고서 미드타운의 이스트 스트리트를 걸었다. 오직 가로등과 상점의 불빛에만 의존해야 하는 늦은 밤이었다. 일찌감치 일을 마친 사람들은 대부분 집으로 귀가해 버렸을 시간일 뿐만 아니라 미드타운으로 한정짓는다 한들 충분히 넓은 구역이었기에 무작정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는 순전히 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작 다섯 블록을 걸었을 뿐인데 가게들이 하나둘씩 영업을 끝냈다. 맞은편 길가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펍의 출입문이 열리더니 몇몇 사람이 밖으로 나오고, 곧 그 가게의 불도 꺼졌다. 일과를 마치고 한 잔 걸치기라도 했던듯 조용했던 밤거리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그 소음을 지나쳐가는 피터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한껏 취기 오른 호탕한 웃음소리들을 헤집고 날아와 꽂혔다.

"피터?"

우뚝, 피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몸을 돌리자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잿빛 모자가 보였다. 모자 챙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피터는 그가 챙 아래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을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데니스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길을 건넜다. "내쉬, 어디 가!" 동료들이 불렀지만 뒤를 돌아보기는 커녕 성의 없이 손을 내저었다. "먼저들 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 소리에 잠깐 멈추었던 발걸음은 차가 지나가고 나니 좀 더 빨라졌다. 피터는 가만히 서서 데니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깨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던 수많은 불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피터가 생각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야. 피터는 제 앞에 서서 모자를 벗은 데니스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내쉬씨."
"이 시간까지 왜 밖에 맙소사, 이게 뭐야?"

모자를 겨드랑이 사이에 대충 구겨 넣은 데니스가 황급히 피터의 손을 잡아챘다. 놀란 눈으로 빨개진 손바닥을 살피더니 이내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영문을 몰라 마냥 눈을 깜박이던 피터는 데니스의 손끝이 손바닥 위를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자 따끔한 통증을 느끼고서 어깨를 움츠렸다. 앗. 반사적으로 옅은 신음이 섞인 탄식이 튀어나와 데니스는 얼른 손을 뗐다.

그제야 피터 역시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비단 손바닥 뿐만이 아닌 몸에서까지 느껴지는 미약한 아픔을 눈치챘다. 화재가 난 건물 안에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무너진 가구며 자재를 치우다 생긴 화상이 틀림없었다. 제아무리 수트로 몸을 감싸고 있다 한들 그래봤자 아무런 기능도 없는 평범한 수트일 뿐이었고, 결국은 맨몸으로 불길 속에 뛰어든 셈이니 당연한 상처였다. 피터의 옷 안에는 그것과 비슷한 저온 화상이 빼곡할 테고 어차피 하룻밤이면 전부 사라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새하얀 피부에 새빨간 열상이 오른 손바닥의 화상이 심각하게 보일 법도 했다. 슬쩍 주먹을 말아쥔 피터가 자신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 그, 아르바이트할 때 서빙하다가 데였나봐요."
"다친 애를 이 시간까지 일을 시켜?"

데니스가 피터의 손을 다시 펼치며 혀를 찼다. 다행히 피부가 벗겨지거나 물집이 잡힌 정도는 아니었으나 열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을 보건대 한동안은 쓰라릴 터였다. 그러나 약국은 이미 한참 전에 문을 닫았고, 일하다 얻는 상처라고는 자상이 대부분인 데니스의 구급통에는 화상에 쓸만한 연고가 없었다. 지금 와서 찬물을 적셔봤자 별 의미는 없는 짓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해봤지만 딱히 도움이 될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헤집었다. 꾹 다문 데니스의 입매는 짐짓 무겁게 굳어있었으나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피터는 오히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이 정도는 별것 아니에요."
"별것 아니라니"

데니스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피터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데니스의 시선에는 그저 피터를 향한 걱정뿐이었다. 피터에게 있어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걱정을 담은 데니스의 눈과 마주하는 것이 좋았다. 피터는 잡아 뺀 손을 살그머니 거두면서 선뜻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눈썹을 축 늘어트린 데니스가 입술을 뻐끔거렸으나 이내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잔소리를 대신하듯 피터에게로 뻗은 손이 뒤통수를 감쌌다.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손길에는 데니스의 표정에서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걱정이 가득해서, 이번에는 순순히 몸을 기댔다. 데니스는 피터를 품에 안고 정수리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큼지막한 손이 피터의 등을 토닥이더니 천천히 쓸어내렸다. "힘들었지?" 나긋한 목소리가 편안하게 귓가를 감싸 피터는 눈을 감았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네."

고요한 밤거리에는 오직 피터의 것과 섞인 데니스의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렸다. 피터는 한참을 가만히 서서 어깨를 단단히 감싸는 온기를 느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피터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기분 좋은 보상이었다. 그제야 오늘 하루를 온전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차올라 몸에 힘을 뺐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손이 데니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두근거리는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피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