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3(앤드류 가필드) = 앤드류 피터 파커
x
피터2(토비 맥과이어) = 토바이어스 피터 맥과이어
“형, 형!!”
갑자기 퍽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온 톰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있던 앤드류의 무릎을 홀랑 베고 누웠다. 사람을 불러놓고서 톰은 앤드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얼굴 위로 들어올린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야, 토미. 그리 흥미롭지도 않은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보던 앤드류는 결국 TV를 꺼버리고서 톰을 내려다 보았다. 톰이 핸드폰으로부터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앤드류와 눈이 마주쳤다. 소파 팔걸이 너머로 삐죽 튀어나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드는 것이 퍽 장난스러워보였다. 톰은 눈을 굴려 자신의 핸드폰 화면과 앤드류를 번갈아보더니 씩 웃었다.
“내가 MJ에게 끝내주는걸 알아왔어.”
톰은 대체 무얼 하고있는지 모를 핸드폰 화면을 톡 톡 두드려 조작하면서 말했다. 형, 연애 하고싶다고 했잖아. 그러더니 화면이 앤드류 쪽을 향하도록 핸드폰을 빙글, 돌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 톰이 들이민 핸드폰 화면을 빤히 바라본 앤드류는 화면에 비친 어플리케이션을 보고서 톰이 말한 '끝내주는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앤드류가 다소 김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게이 데이팅 어플?
맙소사. 신이나서 프로필 정보를 입력하고 있는 톰을 두고 앤드류는 두통마저 느껴지는 이마를 꾹 눌렀다. 모든건 얼마 전 동생에게 쓸데없는 불평을 한 제 잘못이었다. 한창 연애중인 동생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옆구리는 시렵고, 늘 다니는 게이바에는 언제나 그렇듯 괜찮은 사람은 보이질 않고. 들어오는 플러팅을 죄다 거절해가며 잔뜩 취하기만 하고 돌아와서는 술김에 아직 고등학생인 동생을 붙잡고 나도 애인이 있으면 좋겠다고 징징거렸더랜다. 다음날 술에서 깬 앤드류가 이불이 걸래짝이 되도록 발차기를 하고 있을 동안 이 착하기 짝이 없는 동생은 제 나름대로 앤드류의 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던 듯 하다. 그리고 톰의 과도한 배려와 친절 덕분에 앤드류는 다시 한 번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이불을 걷어 차고 싶어졌다.
“생각해준건 고맙지만, 토미…”
앤드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아무리 톰에게 한탄 아닌 한탄을 하긴 했다지만, 동생의 손을 빌리는 것도 유치한 데이팅앱 따위에 가입하는 것도 전부 부끄러운 짓으로만 느껴졌다. 데이팅 앱이라니, 10대 소녀들이나 할 법한 발상 아니던가! 물론 게이앱은 제법 연령대가 높긴 하지만, 그런 것을 하는 사람 치고 변변찮은 놈은 하나도 없는 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톰은 이미 가입을 마치고 앤드류의 프로필을 작성 중이었다. 톰이 등록된 프로필의 분류 태그를 읊었다. 20대. 학생. 브루넷. 활동적. 늘씬한 근육. 너드.(거 참 고맙다, 토미. 앤드류가 중얼거렸다.) 해당되는 태그를 하나 하나 클릭하던 톰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의아스럽게 물었다.
“이건 뭐야? position?”
“Top.”
그리고 반사적으로 대답한 앤드류는 잠깐 동안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의문을 가득 담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톰은 착실하게 프로필 포지션의 'Top'에 체크 표시를 했다. 공개 프로필을 완성하고 나니 톰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좋아… 그럼 이제 선호 파트너 차례야.”
“토미, 난 정말로 그런건 별로…”
“연상? 연하?”
“연상.”
톰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고 앤드류는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연상… 추천 키워드… 핫대디…? 오, 이건 나도 뭔지 알아!”
잘 아는 단어의 등장에 반색하던 톰의 미간이 이내 확 좁아졌다. 그는 충격이 가득한 표정으로 앤드류를 바라보면서 따지듯 소리쳤다.
“형, 핫대디 취향이야?!”
이것 만큼은 절대 가만 놔둘 수 없는 오해였다. 앤드류가 황급히 외쳤다.
“아니, 절대!! 절대 아냐!”
하지만, 하지만…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화면을 휙휙 넘겨보는 톰의 찡그린 미간은 여전히 펴질 줄 몰랐다. 그가 보고 있을 데이팅 앱 프로필 사진들이 대강 예상이 되는 것 같아 앤드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가 게이전용 바나 클럽을 다니면서도 마땅한 파트너를 찾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자각했을 때 부터 유구하게 연상이 좋았던 앤드류의 취향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선호하는 상대의 나이 역시 높아졌다. 그로 인해 스물 둘의 대학생이 된 지금, 앤드류의 선호 바운더리는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중반까지로 늘어나고야 말았다. 완숙미가 한창 물오르기 시작할 중년의 초입 남성. 톰의 말마따나 '탑' 혹은 '핫대디'의 카테고리로도 분류되는 연령대였으며 은근히 마초적인 근육덩어리를 좋아하는 게이에게는 보편적인 취향이기도 했다. 물론 앤드류가 원하는 쪽은 바텀이었지만, 슬프게도, 앤드류의 취향은 가장 보편적인 바텀 중년과도 다소 동떨어진 구석이 있었다.
“잘들어, 토미.”
여전히 데이팅 앱에는 아무런 믿음도 가지지 않은 앤드류였으나 적어도 자신의 동생에게 취향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오해를─핫대디라니!─남겨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난 말이지. 근육잡힌 탄탄한 몸이여야하지만 나보다는 아담해야하고 귀여운 인상이지만 어려보이거나 앳된 얼굴인건 안돼. 역시 연상이라면 연상다운 어른스러움이 있어야지.”
“……”
안타깝게도, 톰의 미간은 더욱 더 좁아졌다. 다행히 톰의 표정은 이제 충격에서 벗어난 것 같았으나 그 대신 앤드류를 향해 되묻는 목소리는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뭔데, 그거. 유니콘?”
“토미…”
“귀여운데 어른스러운건 대체 뭐야? 근육이랑 아담? 그 둘이 공존할 수 있는거였어?”
“어딘가에는 있겠지. 어딘가에는.”
하지만 앤드류의 목소리에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그으래, 뭐, 있을 수도 있겠지………”
이제 톰의 시선에는 동정심이 가득했다. 앤드류의 설명을 참고하여 선호 파트너에 키워드를 지정해 넣으면서도─연상, 근육, 아담, 귀여움, 중년, 바텀─톰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결과가 훤히 그려졌다. 톰이 생각했다. '글렀네.' 비록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앤드류 역시 곧 톰이 하게 될 말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키워드 검색 결과를 확인한 톰이 어깨를 으쓱였다.
“0명.”
톰은 뺨을 크게 부풀렸다가, 피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툭 떨구었다. 앤드류가 자신의 무릎에서 톰의 머리통을 슬쩍 밀어내자 벌떡 일어나 고쳐 앉더니 약간의 타박과 한탄을 섞어 말했다.
“혼자 늙어 죽지 않으려면 현실과 타협하는 자세도 필요해.”
어쭈.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언에 앤드류는 살짝 눈썹을 추켜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듣게될 줄 정말 몰랐다.”
아무래도 너드 기질이라면 결코 앤드류에게 지지 않았던 그의 어린 동생은 최근 연애를 시작하더니 꽤나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앤드류는 조금 심술을 부려 보기로 했다. “너의 MJ는 현실과 타협한 결과인가보지?” 반응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왔다. 불끈 주먹을 움켜 쥔 톰이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열성적으로 외쳤다.
“MJ는 내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비현실적일 만큼?”
“당연히…! …어, 어…? 그러니까, 내 말은, MJ는 현실에 없을 만큼 완벽하지만, 형은 좀 더 현실적인 조건을 붙일 필요가 있는… 물론 그렇다고 내가 타협을 했다는건 아니고… 나는 다만 현실적인, 어, 그래도 MJ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음, 으응…?”
앤드류는 낄낄 웃으면서 한창 연애중인 여자친구를 향한 콩깍지 낀 숭배와 자신의 충고 사이에서 방황하는 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축 처져버린 톰의 어깨를 보는 일은 마음아팠으나 이번 것은 제법 괴씸했으니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앤드류는 톰을 달래주는 대신 양 팔을 위로 쭉 뻗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해가 진 저녁이었다. 허리를 좌 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하자 톰은 입술을 비죽이면서 뚱하게 물었다.
“오늘도 나가려구?”
“가볍게 한 바퀴만 돌고 올게.”
흐음. 톰이 가늘어진 눈으로 앤드류를 올려다 보았다.
“형이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하나 더 알았어. 그 쪽으로는 전혀 시간을 못 쓰고 있잖아. 인연이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 쟁취해야하는─…”
“까분다.”
쏘아 붙이듯이 말했지만 입매 만큼은 웃고 있었다. 앤드류는 꾹 말아쥔 주먹으로 톰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툭 때리고서는─아야! 톰이 호들갑을 떨었다.─웃옷을 훌렁 벗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 안에서 빨갛고 파란 화려한 컬러의 스판덱스를 꺼내 입고 있는 앤드류의 등 뒤로 톰의 외침이 날아와 꽂혔다. "조심해서 다녀와!" 이제는 일상이 된 듯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톰은 매일같이 앤드류의 외출을 걱정했다. 간혹 짓궂은 농담이나 장난을 치는 얄미운 면모에도 불구하고 앤드류가 톰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걱정 마!" 마찬가지로 방문 너머로 대답해 준 앤드류는 현관으로 나가는 대신 자신의 방 창문을 밀어 올렸다. 해가 진 덕분에 무려 5층 높이에서 몸을 내미는 인형을 발견하는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앤드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뉴욕의 밤공기는 언제나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 창문 밖으로 힘껏 몸을 날리며 오른팔을 뻗자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았던 앤드류의 몸은 밤하늘을 향해 빠르게 비상했다. 차가운 바람이 스판덱스를 사이에 두고도 앤드류의 얼굴과 몸을 거칠게 흩었지만 앤드류는 그 감각 마저도 좋아했다.
“Good evening, New York!”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들뜬 목소리가 뉴욕의 고층 건물 사이 사이를 가로질렀다. 앤드류 파커, 그는 벌써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뉴욕을 지킨 스파이더맨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매일같이 패트롤을 나간 것은 아니었다. 뉴욕에는 경찰도, 소방관도 있으니까 말이다. 가끔 경찰만으로는 해결하기 버거운 사건이 벌어질 때도 있었지만─대표적으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생화학 테러라던가 분쟁지역에서나 볼 법한 전투 로봇을 타고 설치는 탈옥수라던가─제 아무리 혼돈과 범죄의 도시라 하더라도 그런 일이 밥먹듯이 생기지는 않는다. 대충 일년에 두어번, 앤드류가 표현하길 '특근'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스파이더맨이 하는 일은 대개 강도를 잡거나 사고를 예방하는, 경찰이 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류가 그 모든 일을 경찰에게 맡기지 못하고 매일 틈만 날 때 마다 움직이는 이유는 스파이더맨의 능력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예민함 때문이었다.
한 사람에게 달린 눈은 두 개 뿐이고 뉴욕은 넓으며 경찰은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뉴욕에 존재하는 모든 경찰이 하루 동일 움직이며 돌아다녀도 뉴욕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미스러운 일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앤드류라고 해서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애초에 그는 단 한 명 뿐이니─적어도 앤드류에게는 걷는 것보다는 훨씬 가동성이 좋은 이동 수단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앤드류가 마음대로 on/off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러한 감각이 느껴질 때면 도무지 모른 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힘을 가진 자의 책임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앤드류는 소위 특근이 없는 날에도 코스튬을 입는 쪽을 택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건 앤드류에게 있어 딱히 힘들지 않은 일이었기에 앤드류는 이 생활에 만족감이 있었다. 웹스윙을 하며 도시를 누비다보면 어느 순간 스파이더 센스가 울렸다. (톰은 이걸 앤디-찌리릿이라고 불렀고 그 단어를 처음 들은 날 녀석의 코를 움켜잡아 비틀어줬다.) 스파이더 센스가 반응하면 그 지점에서는 꼭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노부인의 가방을 낚아 채 달아난다거나, 골목에서 뻗어나온 손이 지나가던 레이디의 입을 틀어막고 안쪽으로 끌어 당긴다거나. 혹은,
“오, 저런!”
막 웹스윙의 반동을 이용해 건물 코너를 돌려던 앤드류는 뒷머리가 쭈뼛 서는 어떤 '예감'을 감지해 고개를 돌렸고, 신호등도 없는 4차선 대로변을 지나가던 남자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남자가 품 안에 소중하게 안고 있던 파일철이 활짝 열리자 그 안의 서류들이 순식간에 바람을 따라 대로 방향으로 날아갔다. 당황한 남자가 반사적으로 종이를 잡으려 몸을 뻗는 동시에 앤드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밤거리를 달리는 트럭은 갑자기 대로 안으로 뛰어든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남자의 얼굴을 비추자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급제동 소리가 울려 퍼졌고, 막 트럭이 남자와 부딪히려는 찰나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으악…!”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바둥거렸다. 금방이라도 치여 날아갈 것 같았던 몸은 도로 저 편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었다. 트럭에 치이길 바랬다는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상황에 남자는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여댔다. 인간을 뛰어넘는 앤드류의 완력이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옆구리에 낀 남자를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잠깐, 잠깐! 괜찮아요, 이제 내려줄게요!”
남자를 낚아 채고도 웹스윙의 탄성으로 인해 바로 멈추지 못해 몇 블록을 더 날아가던 앤드류는 사고 지점에서 꽤나 떨어진 후에야 겨우 그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간신히 다시 두 발을 바닥에 딛고 설 수 있게된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리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남자의 안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런. 앤드류는 얼른 그것을 주워들어 남자에게 내밀었다.
“여기, 안경이요.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일단 심호흡을 하세요. 습-하-습-하. 그럼 이제 반성을 해보죠. 방금 엄청 위험했다구요. 아무리 급해도 차도에 함부로 뛰어들다니 제 동생이 코흘리개였던 시절에도 하지 않은 경솔한 짓이거든요.”
“미…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정말 고마워요…”
뒤늦게서야 멍청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남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안경을 받아 썼다. 끊어지지 않고 주절주절 떠드는 두서없는 잡담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느릿하게 모든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말 그대로 '허공을 나는 것만 같았던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서는 깜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뉴욕 시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명실상부한 뉴욕의 아이콘이 눈앞에 있는데 계속 시선을 피하기만 하려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네! 제가 바로 친절한 이웃 스파이ㄷ… 헉!”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내밀며 엄지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려던 앤드류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남자는 입을 떡 벌린 스파이더맨의 세상 멍청한 얼굴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굳어버린 스파이더맨의 반응을 보고 남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젠장! 앤드류는 마음 속으로 잔뜩 흥분된 감탄을 주워 삼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 보라고, 토마스 파커! 여기에 유니콘이 있단 말이야!
남자는 3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그 나잇대의 성인 남성 답지 않게 동글동글한 얼굴과 순한 눈매, 말랑해보이는 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앳된 것과는 다른 묘한 완숙함이 있었다. 도톰한 아랫입술과 동그란 안경이 그를 퍽 유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으나 동시에 날렵하게 뻗은 눈썹과 단단한 아래턱은 마냥 어리게만 보이지 않도록 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가 앤드류의 취향인 '귀엽고 어른스러운 연상남'에 완벽하게 들이맞는 얼굴이라는 점이다. 주변이 좀 더 밝으면 좋을 텐데. 앤드류는 그의 눈동자 빛깔과 중년에 접어드는 남성의 매력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얇은 주름, 옅은 면도 자국 따위를 꼼꼼히 관찰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지만 친절한 이웃이 사실은 변태라는 소문이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앤드류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설 수 있겠어요?”
“아. 고마워요.”
앤드류의 손을 잡은 남자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치 수줍은 듯 웃었다. 작은 입의 양쪽 끝에 그만큼 작은 보조개가 파이자 그 조차도 혼이 빠질 만큼 귀여워보였다. 뭐지? 토끼? 다람쥐? 햄스터인가? 작고 보들보들한 아무 동물들을 입 속으로 주워 삼키면서 앤드류는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마스크 속에 감추어진 앤드류의 시선이 빠르게 남자의 몸을 흩었다. 앤드류보다 조금 더 작은 남자는 의외로 그리 왜소하지만은 않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근육질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지만 적당히 벌어진 어깨와 가슴, 두께감 있는 팔뚝은 탄탄하게 관리된 몸을 가늠할 수 있게 하면서도 셔츠 소매 밖으로 보이는 얇은 손목이 그를 여리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그는 정말로, 완벽하게 앤드류의 취향이었다.
먼지가 묻은 바지를 툭 툭 털고서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앤드류의 머릿속은 온갖 잡음으로 가득했다. 이름을 알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캐묻기에는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앤드류가 첫 눈에 반했다고해서, 마스크를 뒤집어 쓴 채로 난데없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 제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가 헤테로인지 게이인지 하다못해 바이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일단은 좀 더 남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해볼까? 그건 너무 수상해보이지 않을까? 조금 오버하는 것 같은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있는 앤드류에게 대뜸 톰의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인연은 챙취하는 거라고!' 지금 상황에는 최고의 충고였다. 마음을 굳인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런, 내 연구 자료들!”
그러나 낭패감에 젖은 남자의 외침이 한 발 빨랐다.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허망하게 자신의 빈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제야 앤드류는 남자가 대로로 뛰어들기 전 들고있던 서류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전부 그걸 붙잡으려다 일어난 일이었지. 물론 지금쯤 서류뭉치는 전부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겠지만 말이다. 아아. 남자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통을 감싸쥐었다.
“이틀동안 야근하면서 리서치 한건데…”
절망에 빠진 회사원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앤드류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앤드류에게 일말의 이성적 판단력이 남아있었다면 이것이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 만큼이나 뜬금없고 얼토당토않은 수작질임을 자각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앤드류에게는 제 눈 앞에 나타난 유니콘을 붙잡아야 한다는 다급함 뿐이었다.
“제,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네?”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 서두르면 몇 장은 건질 수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줄래요?”
남자가 동그래진 눈을 깜박였다. 한층 더 귀여워진 얼굴을 바라보면서 앤드류가 생각했다. 아, 파란 눈이네. 강화된 신체 능력을 따라 밤눈에 밝아진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빛에 따라 회색이 섞인 듯한 옅은 푸른 색이었는데, 잔잔한 바다 표면을 닮은 눈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부드러운 따듯함이 느껴졌다. 앤드류는 내심 탄식했다. 젠장, 아직도 더 좋아질게 남았단 말야? 눈동자의 색 하며, 순진해보이는 눈매 하며, 놀라는 표정까지 무엇 하나 취향에 어긋나는 구석이 없었다. 앤드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조금 미심쩍다는 눈치면서도 설마 스파이더맨이 불순한 의도를 가졌으리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 그래줄 수 있어요…?”
“그럼요! 물론이죠!”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앤드류는 아주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아예 거짓말은 아니라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앤드류는 정말로 남자가 날려먹은 종이들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사건 지점에서 시작해 사방을 들쑤시다보면, 굴러다니는 종잇조각 몇 장 쯤은 구할 수 있으리라. 남자를 다시 만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도 그것들을 찾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남자는 앤드류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앤드류는 그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서조차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아직 학생 신분인 앤드류로서는 누군가에게 명함을 받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고, 주소 따위를 적어주거나 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스럽게 명함을 내미는 모습마저도 연상에게서만 볼 수 있는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명함을 받아들었고 마침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토바이어스 P. 맥과이어
오스코프 주식회사 과학개발부
“어, 음. 그러니까… 맥과이어씨?”
“토비 맥과이어. 그냥 토비라고 불러요.”
첫 대면에도 불구하고 선뜻 친근한 호칭을 허락해준 토비는 이제 완전히 경계를 허문 얼굴로 웃었다. 앤드류는 방정맞게 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했다.
“고마워요, 스파이더맨.”
“천만에요!”
마스크가 없었다면 토비는 앤드류의 헤벌쭉 벌어진 입매를 볼 수 있었으리라. 행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명함을 한 손에 꼭 쥔 채로 앤드류가 웹슈터를 발사했다. 토비를 위해서 귀중한 자료를 찾아내려면 일 분 일 초가 급했다.
“그럼 내일 봐요, 토비!”
신나게 손을 흔들며 발랄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마친 앤드류의 몸이 떠올랐다. 건물 사이를 빠른 속도로 누비면서 앤드류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토비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가슴 가득 벅차올라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뉴욕의 밤거리에 스파이더맨의 환호성이 넓게 울려 퍼졌다. 실로 최고의 밤이었다. 마침내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앤드류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모처럼 오전 강의가 없는 요일인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제 새벽 내내 흩어진 종이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이었다. 거진 모래알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는 짓이었지만 스파이더맨의 뛰어난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은 절망적일 것 같은 상황에서도 톡톡히 빛을 발했다. 덕분에 앤드류는 곳곳을 날아다니며 포착한 모든 ‘A4 사이즈의 구겨지지 않은 깨끗한 종이’를 닥치는대로 확인한 결과 토비에게 전해주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분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사이 해는 떠버리고, 톰이 기절하듯 잠든 앤드류의 이마에 ‘로맨티스트’ 라는 낙서를 남긴 채 등교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앤드류는 책상 위에 곱게 올려놓은 명함 위에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사회인이라면 한창 일을 하느라 정신없을 시간이었다. 앤드류는 토비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헌팅에 성공한 놈팽이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스파이더맨을 어린애라고 여기에 되는 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대신 앤드류에게는 토비의 명함을 받자마자 떠올린 기막힌 계획이 있었다. 그가 일하는 부서가 과학 분야라는건 정말인지 끝내주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앤드류는 곧장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급한 마음 만큼이나 서둘러 움직였지만 오후에 토비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앤드류는 샤워에 10분을 더 할애했고 다섯 번이나 옷을 바꿔 입었으며 왁스를 바르다가 머리를 두 번 더 감았다. 마침내 집을 나서게 되었을 때 앤드류는 늦잠을 자지 않았음에도 오후 강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링을 완성할 수 있었다.(어차피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입어야 한다는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래 세상 돌아가는 일은 늘 갑작스럽기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에는 속옷 한 장조차도 허투루 입지 않는 법이다. 앤드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공 서적을 대신해 토비의 자료를 챙겨 학교에 도착하자 앤드류는 이미 출석 체크가 전부 끝났을 것이 분명한 강의실을 뒤로하고 학과 사무실로 직행했다. 오스코프 과학개발부. 분명 앤드류의 기억 속에 있는 단어였다. 그야 오스코프 정도의 대기업을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만, 그런 의미와는 달랐다. 앤드류는 얼마 전 학과 게시판에 올라온 취업 관련 공고를 똑똑히 기억했다. 분명 인턴 채용을 위한 기업 설명회가 있었다. 모집 분야가 전공과는 미묘하게 달라서 한 귀로 흘려버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스파이더맨이 아닌 앤드류 파커가 토비 맥과이어와 가까워질 수 있는 아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긴다면, 인턴이 아닌 청소부라도 좋았다. 어쨌든 같은 건물 안에 있다 보면 한 번쯤은 엘리베이터에서라도 마주칠 수 있는 일 아니던가. 그렇게만 된다면 친근한 척 말을 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인턴으로 들어온 앤드류 파커라고 해요! 몇 층이세요? 눌러드릴게요. 오, 거기는 무슨 일을 하죠? 혹시 시간이 되면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첫 인턴이라, 모든게 다 흥미롭거든요…’
앤드류에게 있어 과학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학문이었기에 토비가 정확히 뭘 연구하든 적당히 이해하고 맞장구칠 자신이 있었다. 앤드류는 이 또한 정말로 운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외형적 취향에 들어맞는 사람이 앤드류의 전공과 가까운 분야에 종사하고 있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설명회는 아직 신청 기간이 남아있었다. 앤드류는 곧장 신청서를 작성하고 학교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라는게 정확히 몇 시에 끝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쩌면 추가 근무를 할 수도 있고. 앤드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새로 들여놓은 학술지 몇 권을 뒤적거리거나 도서관 컴퓨터로 오스코프 기업 홈페이지에 접속하기도 했다. 정확한 토비의 연구 분야를 알지 못했기에 오스코프에서 진행 중인 연구 프로젝트를 닥치는대로 읽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내용들이 제법 흥미로워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제격이었다.
어느덧 자체 휴강을 때려버렸던 강의도 끝나가고 있을 때쯤, 앤드류는 공중전화로 토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행여 공중전화 번호는 받지 않는게 아닐까 문득 걱정도 들었지만 스파이더맨의 개인 번호를 노출할 수는 없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지갑의 카드 사이에 끼워둔 명함을 보면서 숫자를 누르는 손동작에는 긴장과 신중함이 역력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앤드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컬러링을 설정해놓는 상정은 아닌지 건조하고도 기계적인 통화연결음이 퍽 길게 느껴졌다.
「토바이어스 맥과이어입니다.」
전화 부스의 벽을 번갈아 두드리는 검지와 중지의 템포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을 때쯤, 마침내 설레도록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들뜬 기색을 감추려 했건만 앤드류는 제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토비! 저에요! 스파이더맨!”
잠깐의 침묵 끝에 전화 너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났다. 다소 놀란 기색이 섞이긴 했어도 유쾌함이 느껴지는 웃음이라, 앤드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연락해줄 줄은 몰랐어요.」
“그야 약속했잖아요.”
앤드류는 자신의 언어가 행여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웃에게 도움이 된다는건 최고의 기쁨이죠.”
「절 구해준 것만으로도 과분할 정도로 도움이 됐는걸요.」
“이것도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오, 그럼요. 물론이에요.」
앤드류는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토비의 목소리는 지난밤과는 조금 다르게 들렸는데, 놀람과 당황을 걷어낸 그의 평소 목소리는 살짝 낮았지만 동시에 가늘었고 조곤조곤하면서 부드러운 어투에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한편 마음이 편안해지는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와서 앤드류는 자꾸만 벌어질 것 같은 입가를 꾹 꾹 눌렀다.
“언제쯤 제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으음, 하고 고민하는 옅은 목울림 소리를 감상하며 기다리자 곧 대답이 나왔다.
「한 시간 뒤에는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좋아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몸뚱이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제 자리에서 통통 튀어오르며 앤드류가 말했다.
“제가 찾아갈게요!”
「고마워요.」
전화가 끊어졌다. 앤드류는 곧장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그것이 토비라도 되는 양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채 빙그르르, 회전했다. 감출 필요가 없어진 웃음을 고스란히 내보이자 헤벌쭉 벌어진 입가의 양 끝이 귀 아래에 걸렸다. 좋아, 아주 잘했어, 앤드류 파커. 한심하거나 멍청하게 굴지도 않았고, 헛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은 데다 양아치마냥 껄떡거리지도 않았다. 상대는 앤드류보다 열 살을 훌쩍 넘은 어른이다. 그에게 어울리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전화 부스를 나온 앤드류는 화장실로 달려가 남은 시간의 절반 가량을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데 허비했다. 물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도 십분 이내로 오스코프사에 도착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할애하여 재정돈한 머리는 마스크를 쓰자마자 엉망으로 헝클어졌지만 그렇다고 지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표현 그대로 ‘날아갈 듯한’ 몸짓으로 오스코프까지 단숨에 도달해 근처 건물의 외벽에 달라붙어 토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앤드류는 동그란 정수리만으로도 즉시 토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스코프 건물 밖으로 나온 토비가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패브릭 백을 고쳐 맸다. 제기랄, 대체 왜 서류 가방을 숄더로 매는 거야? 양손으로 어깨끈을 꼭 붙들고 있는 모양새가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앤드류는 그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토비는 고개를 들고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앤드류가 막 아래로 내려가려 했으나 때마침 토비가 그를 발견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토비는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반갑게 흔들었다. 문득 그를 따라 위를 올려다 본 행인 한 명이 앤드류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자―스파이더맨!―주변으로 조금씩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움찔 놀란 토비가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자신이 불필요한 이목을 끌었다고 여겼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자 오히려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앤드류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토비의 앞에 섰다. “스파이더맨이야!” “스파이더맨이 있어!” “저건 누구지?” “스파이더맨이랑 아는 사이인가?” 작았던 소란이 전염되면서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자 토비의 뒷덜미가 붉어졌다. 당황한 토비에게 바짝 다가서면서 앤드류가 말했다.
“아무래도 조용한 곳이 필요할 것 같죠?”
“이런. 정말 미안해요. 내가 괜히아악!!”
그러나 순식간에 토비의 허리를 잡아 채 웹슈터를 발사한 앤드류에 의해 사과는 곧 비명이 되어 덧없이 울려 퍼지고 말았다. 두 발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자 토비는 반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을 와락 끌어안았다. 물론 그건 앤드류였고 토비의 몸이 밀착되며 그가 자신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자 앤드류는 그만 추락할 뻔했다.
“제발, 제발! 미리 좀 알려줘요!”
토비가 소리를 질렀다. 토비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게도 앤드류는 이 상황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꽉 끌어안은 몸은 앤드류의 예상대로 그보다 작았지만 약간의 군살이 덮인 근육이 느껴졌다. 너무 딱딱하지 않은 적당한 살집은 퍽 부드러워보였던 토비의 뺨 만큼이나 말랑거릴 것이다. 이대로 뉴욕을 수십 바퀴는 돌 수 있었지만 꾹 참고서 한 팔 안에 딱 알맞게 가두어진 허리의 감촉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앤드류는 재차 웹슈터를 쏘았고 탄력적으로 솟아오르며 신나게 외쳤다.
“꽉 잡아요, 토비!”
“으아아아!!!”
계속해서, 계속해서 몸이 솟구쳤다. 빠르게 넘어가는 바람 소리가 연신 귓가를 때리는 탓에 토비는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게 맞는지 조차 알기 힘들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딘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기 두려워 토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유난히 더 바람이 강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츠리려니, 마침내 발아래에 지면이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벌써 두 번째 웹스윙이었지만 토비는 이번에도 비틀거리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그가 꽤나 활달한 성격이라는건 진작에 짐작했었지만 머리 위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들리자 괜히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삐뚤어진 안경을 붙잡고 홱 고개를 든 토비는 앤드류의 얼굴 뒤로 펼쳐진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자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여긴 어디에요?” 토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씩 웃은 앤드류가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에요. 끝내주죠?”
그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의 첨단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빌딩의 최상층보다,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빌딩의 옥상보다 더 높은 곳에. 창문도 난간도 없이 탁 트인 풍경은 아슬아슬하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토비는 이 숨 막히는 기분이 높은 상공의 공기 때문인지 자신이 보는 절경에 압도되었기 때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간 채 뉴욕의 전경을 바라보는 토비의 감탄 어린 얼굴을 보면서 앤드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곧 노을이 져요. 그때 내려다보는 뉴욕은 정말 아름답거든요.”
앤드류의 말대로 저 멀리 지평선에서부터 붉은 태양빛이 울렁거렸다. 은은한 오랜지 빛 썬셋은 강렬하게 불타오르며 지평선으로부터 뉴욕의 고층 빌딩들을 야금야금 삼키며 퍼져나갔다. 토비는 눈이 부셨지만 그 광경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하늘을 바라보았고, 앤드류는 그런 토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옅은 하늘빛 눈동자에는 붉은 태양이 담겨있었다. 서로 상반되는 색깔임에도 불구하고 토비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따스함 때문일까. 그 두 빛깔은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섞였다. 노을빛 아래에서 바라보는 토비는 어두운 밤거리의 가로등 아래에서 볼 때보다도 훨씬 더 예뻤다. 보석 같아. 무릎 위에 얹은 고개를 기울인 채 앤드류가 생각했다. 자그마한 불꽃을 가둔 푸른 보석 같았다. 흩뿌려진 황금색 알갱이가 반짝이는 속눈썹 아래에서 토비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앤드류에게는 이미 수백 번을 본 뉴욕의 노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건, 정말.”
일렁이는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건물들이 하나둘씩 불빛을 밝히며 낮 동안의 태양 빛을 대신할 때쯤 토비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난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일 거예요.”
그건 나에게도 가장 큰 행운이에요. 앤드류는 애써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는 이미 사랑에 빠졌으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스파이더맨이 아닌 앤드류 파커로서 사랑을 이루고 싶었다. 작게 헛기침을 하며 얼른 목을 가다듬은 앤드류는 배낭을 열어 가지런히 챙겨 넣은 종이 다발을 꺼냈다.
“여기, 당신 거에요.”
잠시 멍한 눈을 깜박이며 앤드류의 손에 들린 자료들을 바라보던 토비는 뒤늦게서야 스파이더맨에게 붙잡혀 엠파이어 스테이트 꼭대기까지 온 이유가 떠올랐는지 화들짝 놀라면서 그것을 건네받았다.
“오, 맞아. 이거 때문이었죠. 그랬었지. 고마워요.”
자료를 빠르게 흩어본 토비가 그것을 가방 안에 넣었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괜찮아요.”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르는 토비가 퍽 곤란해 보여서, 앤드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사양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앤드류는 얼마 뒤에 있을 채용 설명회에 가서 인턴 신청을 할 것이고, 충분히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앤드류가 무엇보다도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오스코프에서 당당하게 마스크를 벗은 후의 만남이었다. 토비에게 엠파이어 스테이트에서 바라보는 뉴욕의 땅거미를 선물해줄 수 있는 스파이더맨은,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앤드류 파커라면 뭐든 할 수 있다. 귀여운 동생에 관한 이야기나 학교생활, 전공 강의 따위를 조잘거리며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저녁 식사에 초대하거나 함께 센트럴 파크를 산책할 수도 있다. 토비와 함께할 때, 고작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관심이 집중되는 스파이더맨보다는 앤드류 파커이고 싶었다.
“전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잖아요! 보답을 바란게 아니에요.”
앤드류는 일부러 더 발랄하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네요.” 토비의 목소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앤드류를 따라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그렇죠. 친절한 이웃.” 고개를 든 토비가 앤드류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날 내려놔 줄래요?”
앤드류가 토비에게 다가갔다. 토비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앤드류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긴장했는지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앤드류는 허리를 감싸면서 슬쩍 토비의 머리칼에 고개를 기댔다. 처음 그를 품에 안았을 때에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통에 미처 알지 못했던 은은한 향기가 마스크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달콤한 과일향 너머에 감추어진 스파이시한 어른의 향이 후각을 스쳐서 앤드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기분 좋다. 앤드류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옅은 코오롱향도, 마스크 너머로도 느껴지는 머리칼의 부드러움도, 꼭 알맞게 안긴 품 안의 체구와 등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설레여서 두근두근 울리는 은밀한 심장박동 소리까지도. 앤드류는 행복감마저 느끼며 전신의 모든 감각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스파이더맨?”
앤드류를 현실로 건져 올린 것은 토비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앤드류는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토비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심장 소리가 좀 더 빨라졌지만 앤드류는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오른손을 뻗었다. “오, 죄송해요!” 당황한 마음을 감추느라 작위적으로 끌어올린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면서 우스꽝스럽게 갈라지자 웃음을 참는지 토비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스러운 떨림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웹스윙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점잖았다. 토비를 땅에 내려놓고 앤드류는 팔에 힘을 풀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토비가 그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결국 의례적인 감사 인사였을 뿐이다. 앤드류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토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덩그러니 선 그를 뒤로하고 웹슈터를 발사했다. 조만간 토비는 앤드류 파커라는 이름의 청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거리낄 것 없이, 마음껏 그의 곁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다녀왔… 어우, 뭐야!”
신나게 MJ와의 데이트를 끝내고 막 집으로 돌아온 톰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가로놓인 어떤 거대한 물체를 밟고서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다. 톰은 곧 발아래에 놓였던 물컹한 감촉이 다름아닌 자신의 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언제 귀가하여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앤드류는 겉옷을 벗기는커녕 가방조차 내려놓지 않고서 현관 앞에 길게 엎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앤드류의 위를 타 넘어간 톰은 발끝으로 앤드류의 옆구리를 쿡 쿡 찔러보았다. 힘을 쫙 빼고 늘어진 몸이 망망대해에 표류한 배 마냥 흔들거렸다.
“어… 음, 형? 무슨 일 있어?”
이미 온몸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시위 중이여서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오스코프 인턴쉽에 합격했다며 희희낙락하던 앤드류였기에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앤드류가 채용 설명회에 갔던 날, 톰의 핸드폰에는 문자 그대로 불이 났었다. 채 1분을 넘기지 못하고 띠링띠링 울려대는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어 버렸더니만 액정이 꺼질 새도 없이 메시지를 날려대는 통에 하루 종일 보조배터리를 끼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으로 다른 것을 하려 해도 계속해서 상단에 뜨는 채팅 알람의 방해로 불가능했고, 톰은 결국 채팅 어플리케이션을 계속 실행시켜 놔야 했다. 일방적이었던 채팅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세상에, 그 사람이 왔어! 토비가 직접 왔다고!」 「양복 쩐다」 「너무너무 멋있어」 「사진」 「사진」 「사진」 「이것 좀 봐, 토미」 「사진」 「토비가 블레이저를 벗었어.」 「오…넥타이 끌어내리는거 진짜 야하다」 「손목이 굉장히 얇아.」 「시계는 제일 안쪽 줄에 차려나?」 「팔이 하얗네. 체모가 가는가봐.」 「사진」 「목소리 듣기 좋다.」 「웃음소리가 예뻐.」 「녹음파일」 「내 이름을 물어봤어!」 「내가 방금 질문을 하나 했는데―…」 … …
앤드류의 끊어지지 않는 실시간 중계 덕분에 톰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코프 채용 설명회의 강연 내용을 전부 알게 되었을 정도다. 뿐만아니라 담당자가 무슨 디자인, 무슨 컬러의 옷을 입고 어떤 머리 모양을 하고서 어떤 몸짓과 손짓으로 강연을 했는지, 심지어는 강연 중 어느 타이밍에 숨을 돌리거나 발걸음을 옮겼으며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는지까지도! 그날 이후로도 톰은 이틀은 더 핸드폰 액정에 ‘토비’ 라는 이름이 적힌 채팅 알림이 뜨는 환각을 봐야 했다.(물론 그중에 몇 개는 환각이 아니었다.)
설명회 내내 몰래 채팅 메시지를 보내놓고서 용케 들키지도 않았는지―그것도 스파이더맨의 능력인 걸까? 톰은 조금 부러워졌다.―앤드류는 순조롭게 인턴으로 채용되었다. 톰에게는 앤드류의 첫 출근날 역시도 설명회만큼이나 악몽 같았는데, 그가 배치된 연구 프로젝트의 담당 사수가 다름 아닌 토비였기 때문이다.(설명회에 토비가 온 이유이기도 했다.) 첫 출근에서 돌아온 앤드류는 톰을 붙잡고서 새벽 내내 떠들어댔고, 톰은 또다시 이틀 동안 앤드류의 목소리로 토비의 이름을 듣는 환청에 시달렸다.(그리고 이것 역시, 몇 번은 환청이 아니었다.)
앤드류가 늘 표현하듯 톰은 이상적이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이쯤이면 슬슬 형의 호들갑 섞인 짝사랑에 학을 뗄 법도 한데, 톰은 앤드류가 갑작스레 현관에 널부러진 이유를 짐작하면서도―요 근래 앤드류를 웃게 하는 것도, 울게 하는 것도 오직 토비뿐이었다.―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훌쩍이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린 앤드류가 한쪽 뺨을 바닥에 짓뭉개며 말했다.
“토비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
쭈그린 무릎 위에 턱받침을 만들어 고개를 올려놓고 안쓰럽기 짝이없는 눈빛으로 앤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톰은 한숨을 내쉬었다. 턱을 괴고 있는 탓에 다소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쯤은 각오했던 거잖아.”
“……”
세상 무너질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축 늘어트린 앤드류가 다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의 답답한 속내를 표현하듯 양팔과 다리로 바닥을 퍽 퍽 두드리며 허우적대는 앤드류를 향해 톰은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든 ‘앤드류 파커’로서 토비의 관심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계획과 소망이 고작 일주일 만에 무너져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호감을 깔고 시작할 수 있는 스파이더맨에 비해, 앤드류 파커는 아예 제로부터 쌓아 올려야 하니 말이다. 다만 막상 닥치고 나니 상상 이상으로 벽이 높았을 뿐이지.
그저 같은 건물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건만 무려 같은 연구팀원이라는 사실에 날아갈 것 같았던 며칠간의 행복 후, 앤드류는 곧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첫 번째로, 처음 경험해보는 인턴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바빴다. 앤드류는 토비의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의 구성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그의 영리함이 부족한 경력과 인턴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메꿔주지는 못했다. 실험 진행 외에도 연구실 내의 잡무는 전부 앤드류의 차지였다. 실험 일지 작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약품이 묻은 실험 가운을 모아 코인 세탁소에 가는 일까지도. 실험의 경과 보고와 업무 지시를 제외하면―그리 수다스럽지 않은 토비의 성향 때문에―토비와 단둘이 말을 섞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토비가 앤드류를 설명회 날 성실하게 내용을 청취하며 질문을 던지던 열성적인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였다.(톰이 듣는다면 통탄할 일이다.)
두 번째로, 토비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 이 사실은 앤드류의 기분을 퍽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토비의 애인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적어도 성지향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일뿐더러 최근 애인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해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 사람의 외모였다. 토비의 애인이 퇴근 시간에 맞추어 토비를 마중하러 온 날 앤드류는 그 사람을 꼼꼼히 살펴볼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 적지 않은 절망감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토비의 애인은 토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는데, 짙은 눈썹과 야성적인 수염이 잘 어울리는 근육질의 남자였다. 깊은 아이홀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고, 떡 벌어진 어깨와 옷 위로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 근육은 더할 나위 없이 남자다웠다. 분명 학창시절에는 미식축구부의 주장으로 뛰면서 치어리더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을 인상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앤드류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전형적인 알파메일이었다.(덧붙이자면 앤드류가 절대 만나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다. 포지션이란 상대적이기 마련이고 그는 바텀이 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문제.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는데 있어서 취향이란 분명 중요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니까. 다만 앤드류가 토비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보다 더 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앤드류의 나이였다. 토비가 그를 성적 대상으로 느끼기에는 앤드류는 조금―사실 지나치게―어렸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토비에게 앤드류는 조카뻘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러 프로젝트의 치프 자리를 도맡은 경험이 있는 완숙한 사회인의 시선에서 대학도 채 졸업하지 못한 20대 초반의 신입 인턴은 갓난아기나 다름없으리라. 종종 토비는 앤드류에게 탕비실의 간식을 챙겨주었고 어깨를 두드리며 친근하게 격려를 해주거나 점심을 사주기도 했지만 그것이 앤드류가 바라는 호감의 형태와는 1억 광년 정도 거리가 있다는 사실쯤은 잘 알았다. 토비에게 앤드류는 잘 키워야 할 부사수였다. 앤드류는 토비가 그를 다마고치로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내가 남자로 보이기는 할까?”
앤드류가 바닥에 짓눌린 탄식을 중얼거리자 톰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애’로는 보이겠지.”
앤드류는 또 한 번 팔다리를 휘적대며 발버둥을 치더니 휙 돌아누웠다. 가방을 메고 있는 탓에 마치 뒤집어진 거북이 같은 꼴을 하고서 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아아아아아― 비련하기 짝이 없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하지만 톰의 말은 실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토비가 ‘남자’를 바라볼 때는 어떤 눈빛과 표정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기에 더 그렇다. 그래, 스파이더맨을 볼 때의 토비 말이다. 앤드류 파커로서 토비를 만나고 나서야 앤드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토비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깨달았다.
“차라리 몰라야 했어…”
톰은 자신의 형이 아주 조금 불쌍해졌다. 그러게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왜 올라가서는. 톰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앤드류가 그를 붙잡고서 구구절절 늘어놓은 찬사와 사랑의 말들을 기억했다. 붉게 상기된 토비의 뺨이 얼마나 귀여웠으며, 그의 미소가 얼마나 달콤했고, 노을빛을 담은 작은 보조개가 얼마나 예뻤는지. 온화하게 웃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따사로움은 물론, 그 모든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던 마법 같은 감각이 얼마나 앤드류를 두근거리게 했는지. 주변의 모든 공기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물드는 경험은 너무나 강렬해서, 이제 앤드류는 도저히 토비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덜렁거리는 팔다리를 푹 늘어트리고서 풀이 죽어버린 앤드류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있던 톰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확 말해버려.”
톰의 손을 멈추었다. 앤드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톰은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도 퍽 당황했지만, 형의 작태가 안쓰러웠기에 멈추지 않고 말했다. 사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서 답답한 마음에 내뱉은 한탄이나 다름없었다.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며. 그걸 빌미로 만나서, 마스크를 벗고 ‘짠! 사실 스파이더맨은 앤드류 파커입니다!’ 라고 말하는 거지.”
“토미…”
그러나 반쯤은 농담조를 섞어 가볍게 던진 톰에 비해 앤드류의 표정은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앤드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톰의 옆에 앉았다. 같은 눈높이를 하고 얼굴을 마주하자 톰은 부루퉁하니 뺨을 부풀리면서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피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냈다. “알고 있어.” 톰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앤드류가 정체를 밝히는 일 만큼은 피하고 싶어 하는지 톰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스파이더맨이 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앤드류가 정한 첫 번째 규칙이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를 소중히 여겨주는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숨기는 편이 낫다고 말이다. 스파이더맨의 일이란 것이 그저 좀도둑을 잡고 사고 현장에서 구해주는 정도에 그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스파이더맨이 경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첫 사건에 휘말렸던 날, 톰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앤드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형이 죽는 줄 알았어. 앤드류가 일반인이었다면 톰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멍들고, 찢어지고, 다리를 절고. 아마 뼈도 몇 군데 부러졌을 것이다. 금방 나을 거라는 앤드류의 서툰 위로에도 톰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뉴스 속보를 통해 스파이더맨의 싸움을 보는 동안 톰이 느꼈을 감정을 앤드류는 감히 예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결국 엉망으로 다친 사람은 앤드류였으나 정작 쓰러진 쪽은 톰이 되었다. 탈진과 스트레스 탓이었다.
그 날이었다. 자신의 힘에 따르는 책임을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도 톰에게 모든 비밀을 말해준 일을 후회한 것도,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톰은 아직도 앤드류가 패트롤을 나가면 아무리 시간이 늦어져도 먼저 잠들지 못했다. 그 대신 톰은 행여 속보가 뜨는건 없는지 온라인 언론사를 뒤적이면서 앤드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앤드류가 스파이더맨이 되고 3년이 지났어도 톰의 이런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이 안 오는걸. 톰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억지로 잠든다 한들, 앤드류가 부재중인 밤에는 쉽게 악몽을 꾼다는 것을 앤드류 역시 알고 있다.
앤드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톰이 정수리에 손을 얹고서 살짝 힘을 주어 쓰다듬어 주었다. 형제 아니랄까봐 앤드류를 닮아 곱슬기 있는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입술을 삐죽이며 머리칼을 매만진 톰이 물었다.
“그럼 어떡할 거야?”
앤드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계속 노력해 봐야지.”
―라고는 말했지만, 솔직히 자신 없다.
표정만 두고 본다면 손에 들고 있는 시험관의 약품 농도를 조절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앤드류였지만 사실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들로 가득했다. 앤드류는 아주 신중하고도 진지하게 스포이드로 덜어낸 약품을 시험관에 한 방울씩 떨어트리면서 슬쩍 곁눈짓을 했다. 옆에서는 토비가 어제의 실험 일지를 토대로 변형된 새로운 공식을 계산하는 중이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인상과는 달리 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이 섹시해 보여서,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설명회 날 보았던 정장 차림의 토비도 그야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얇은 니트 위에 하얀 연구 가운을 걸친 토비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고민들 조차 전부 잊어버리고 토비의 짙은 눈꺼플과 날렵한 콧대, 하얀 목덜미며, 가운의 넓은 소매 밖으로 나온 가는 손목과 만년필을 까닥이는 손가락 따위를 감상하는데 푹 빠져있던 앤드류는 스포이드 끝에서 약품이 뚝 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손에 들린 시험관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좀 전에 여기에 몇 그람을 넣었더라? 앤드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약간의 오차만으로도 결과 값이 바뀌어버리는 만큼 조합 배율을 모르는 시약으로 실험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폐기 통 안에 약품을 쏟아 넣고 있는 앤드류를 본 토비가 집중하느라 찡그리고있던 표정을 풀면서 물었다.
“파커? 무슨 일 있어?”
“이런. 죄송해요, 선배. 비싼 약품인데…”
앤드류가 당황하자 작게 웃은 토비가 좀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잔소리 하려는게 아니라 네가 실수를 하다니 걱정돼서 그래.”
토비는 앤드류를 제법 좋아했다. 애초에 남에게 까다롭게 구는 성격이 아닌 만큼 곧잘 앤드류의 일 처리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토비가 앤드류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일 잘해서 마음에 드는 후배’ 이상의 기류를 느낄 수가 없었기에 앤드류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앤드류는 출근 첫날 연구실에서 토비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설명회 날 눈도장을 찍어놨다지만 어쨌든 인턴으로서 첫 대면인 만큼 신중하게 호칭을 고른 앤드류에게 토비는 어색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는 학생도 아니고 팀원인데, 편하게 불러.’ 그 한 마디가 너무 기뻐서 대뜸 튀어 나간 호칭은 토비를 제법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잘 부탁드려요, 토비!’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토비는 미소짓던 그대로 입매를 굳히면서 데구르르,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그건 좀 어색하네. 선배 정도로 하자.’ 그것은 앤드류가 토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적정선을 의미하는 호칭이기도 했다. 동시에―그와 오랫동안 일해온 다른 연구원들이 그렇듯―‘토비’라는 호칭을 허락받지 못하는 이상 앤드류가 먼저 그 선을 넘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생각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토비는 ‘뭐길래 그래?’라고 재차 묻는 대신 ‘너무 무리하지 마.’라고 말하며 앤드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서 자신의 일로 되돌아갔다. 이런 것들이 바로 앤드류가 극복하지 못한 선배와 후배 사이의 간극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거리를 침범해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앤드류가 파악한 토비의 성격상, 원하지 않는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컸다. 그저 토비가 뒷걸음질을 치지 않도록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앤드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러니 퇴근 후 단둘만의 오붓한 저녁 식사나 술 한잔 같은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수밖에.
스파이더맨이라면 차라리 쉬웠겠지. 마음속으로 체념의 한탄을 읊조리고서 시약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려던 앤드류는 토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가 전혀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토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간 앤드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연구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대형 텔레비전이었다. 토비는 한창 스파이더맨에 대해 보도 중인 뉴스를 보고 있었다.
CBS는 근래 3년간의 뉴욕 범죄율 변화 양상에 대해 보도하는 내내 자료 화면으로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내보내고 있었는데, 건물 사이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스파이더맨의 뒷모습을 용케도 생생히 담아내고 있었다. 보도 내용은 스파이더맨의 존재에 대해 퍽 호의적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웹스윙을 좀 더 천천히 할 걸 그랬나? 앤드류는 어제 오후 자신의 뒤를 끈덕지게 쫓아오던 CBS 뉴스 데스크의 방송용 헬기를 떠올리며 조금 미안해했다.
“스파이더맨은 정말 굉장(Amazing)해.”
영상 속의 스파이더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토비가 툭 내뱉었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으나, 그의 어투 속에는 경이와 감탄이 서려 있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지만 앤드류는 가슴 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질투심을 느꼈다. 혹은 본인을 앞에 두고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토비를 향한 투정이기도 했다. 앤드류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스파이더맨을 알아요?”
“어?”
토비가 화들짝 놀라면서 뉴스에서 눈을 떼었다. 그제야 자신이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뉴욕시민이라면 누구나 알잖아.”
태연한 척, 대수롭지않게 대답하는 토비의 목소리에는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앤드류는 그 안에 숨겨진 아쉬움을 곧바로 감지해 내었다. 역시 그는 스파이더맨을 다시 만나고 싶은 걸까?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던 앤드류가 말했다.
“…저는 잘 알거든요.”
다시 공식의 계산식을 끄적여 놓은 노트에 집중하려던 토비는 앤드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휙 고개를 돌렸다. 앤드류가 말하는 ‘알다’는 토비의 ‘알다’와는 다른 의미임이 분명했다. 마치 어떠한 친근함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해서 토비는 따지듯 물을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더맨을 알아?”
앤드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입생 때 입학금이 필요해서 스파이더맨의 사진을 찍어 팔았었어요.”
앤드류의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그때는 앤드류가 막 스파이더맨 활동을 시작하던 시점으로,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식적 보도가 없이 뉴욕 시민이 포착한 사진이나 촬영 영상만이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던 때였다. 일반인이 평범한 장비로 빠르게 움직이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잡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대부분의 사진과 영상은 형편없이 번진 빨갛고 파란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신문사 중에서는 데일리 뷰글만이 최초로 스파이더맨 제보 사진을 모집했다.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사진으로, 상당수의 보상금을 제시해서.
“처음으로 스파이더맨의 사진이 실렸던 뷰글의 1면 기억하세요? 제가 찍은 사진이에요.”
앤드류의 고백이 꽤 놀라웠는지 토비는 동그래진 눈을 하고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진이 가져온 반향은 엄청났다. 그건 단순히 ‘스파이더맨이 진짜라는걸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사진에서 끝나지 않고, 크라이슬러 빌딩 끄트머리에 걸쳐진 일몰을 등지고 도시 아래로 떨어지는 스파이더맨의 활강을 감탄스러울 만큼 멋지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 사진은 스파이더맨의 최초 공식 보도 사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뛰어난 사진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그토록 역동적이며 생생하게 담아낸 사진은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앤드류는 그 사진을 찍기 위해 거미줄을 이용해서 타이머 설정이 된 카메라를 허공에 매달았었다. 덕분에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시도도 해볼 수 없는 위치와 각도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애용했다가는 의심을 사기 쉬웠기에, 다음부터는 톰에게 카메라를 맡겼고 결국 다른 사진들은 퍽 평범한 사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찍은 거야?”
“그게…”
앤드류가 말꼬리를 흐리며 곤란하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라는걸 밝힐 수는 있어도 그 이외에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였다. 어쩔 수 없이 앤드류는 약간의 거짓말을 가미하기로 했다.
“스파이더맨의 도움을 받았어요. 정확히는, 스파이더맨이 절 구해준 일이 있었고, 그에게 다른 사람들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걸 알아야 한다고 설득했죠. 그래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협조해준 거예요.”
“그럼 혹시 다른 사진들도…”
“네. 첫 사진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은 제가 찍을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앤드류가 직접 스파이더맨의 사진을 팔아 학비에 보탠 것은 1년 남짓이었다. 여러 사건을 해결하고 스파이더맨이 유명세를 타면서 신문사나 방송사들이 헬기를 동원해 앤드류를 찍어대기 시작했기에, 굳이 스스로 사진을 찍지 않아도 꽤 좋은 구도의 사진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록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가장 정면에 가까운 사진은 여전히 앤드류만이 가능했지만 시장 원리에 의해 점점 떨어지는 사진값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스파이더맨 프리미엄’마저 사라져버리고, 질이 조금 떨어져도 언론사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하자 앤드류는 사진을 판매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덕분에 1년 동안은 자주 마주쳤죠.”
토비가 눈을 깜박였다. 앤드류는 한순간 토비의 파란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이채가 도는 것을 보았다. 성큼 다가온 토비가 앤드류의 옷 소매를 붙잡았다. 다급한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넌 스파이더맨과 연락할 수 있는 거야?”
앤드류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을 치자 토비는 재차 한 걸음 다가와 앤드류의 소매를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앤드류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번의 갈등이 오갔다. 스파이더맨을 주제로 한 토비와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고, 설령 앤드류에게 스파이더맨과의 커넥션이 없다 한들 그는 스파이더맨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어쩌면 일이 끝난 후 함께 펍에 들러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 마시며 스파이더맨을 안주 삼아 대화하는 것으로 토비와 더욱 가까워질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파이더맨을 시작으로 연결된 대화 속에서 앤드류는 토비에 대해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고 느리더라도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가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타이밍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토비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저 영리한 후배를 보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토비의 시선을 다시 한번 마주 하고 싶었다. 호감을 담아 미소짓는 입매가 보고 싶었고 약간 긴장한 듯 수줍게 움직이던 몸짓을 보고 싶었다. 아무런 경계도 거리감도 없이 다가온 그을 품에 안고서, 금방이라도 닿을 듯 귓가에서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날숨을 느끼고 싶었다. 스파이더맨에게는 너무나 쉬운 그것들은, 앤드류 파커로는 아무리 긴 시간을 들여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이었다.
“뭐… 어쩌면, 요.”
결국 앤드류는 이도 저도 아닌 비겁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원하던 대답과는 달랐는지 토비는 아쉬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손을 놓고서 앤드류에게서 물러났다.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지며 고작 두 어 걸음을 제 자리에서 오가던 토비가 슬쩍 앤드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에, 네가 스파이더맨에게 내 말을 전해줄 수 있다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토비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가 어떤 요구를 내놓든 앤드류는 자신이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내일 7시에 ‘그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해줘.”
“…그럴게요.”
사랑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라고들 하던가. 토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앤드류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어주는 것 뿐이었다. 제법 긍정적인 반응에 안심이 되었는지 토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마워, 앤디.” 이 와중에도 처음으로 애칭을 불렸다고 방정맞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반응이 한심하기만 하다.
자기 자신을 질투한다는건 정말인지 낯선 감각이었다. 앤드류는 이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작은 콧노래마저 흥얼거리고 있는 토비를 보며 솟구치는 애정을 느꼈고 토비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인 스파이더맨이 조금 얄밉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도.
앤드류는 푹 한숨을 내쉬고서 애꿎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몰래 중얼거렸다. 망할 스파이더맨.
토비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건물 뒤편에서 외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소매를 살짝 걷어 시계를 확인했다. 째깍이며 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정각을 향해갔다. 잠시 뒤, 초침이 분침과 완전히 겹쳐지며 숫자 12를 가리키는 동시에 토비의 머리 위로 부자연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토비는 고개를 들고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대신 빙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노래하는 것 마냥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스파이더맨.”
“안녕하세요, 토비.”
거미처럼 달라붙어 있던 건물 벽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앤드류가 토비의 인사에 답했다. 가까이 다가온 인기척을 느꼈는지 토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옅은 빛깔의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앤드류는 토비 몰래 숨을 삼켰다. 역시, 토비는 앤드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스파이더맨을 보았다. 살짝 끌어올린 입가에 작은 보조개를 만들며 웃는 얼굴은 더없이 사랑스러웠지만 앤드류는 마스크 안에서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알았네요?”
“네?”
언뜻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토비가 말했다.
“저는 ‘그 장소’라고만 했는데, 여기라는걸 바로 알았어요.”
“그야…”
당연하잖아요, 라고 대답할 뻔 했던 앤드류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토비와 만난 유일한 장소가 아니었다. 토비가 사고를 당할 뻔했던 로즈힐의 도로변도 있었고, 사고로부터 구해낸 후 내려놓았던 유니온 스퀘어도 있었으며 예고도 없이 그를 낚아채 놀라게 만들었던 오스코프 건물 앞의 광장 역시 토비가 스파이더맨과 관련되었던 장소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그 장소’라는 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단 한 곳,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곳은,
“당신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은 특별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토비와 함께 했던 순간 중에 가장 특별한 시간을 보낸 곳이었으니까. 앤드류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앤드류의 설익은 사랑을 보다 농익게 만들었던 그 날의 토비는 노을빛에 물들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기에, 몇 번을 떠올려도 매번 앤드류를 설레게 했다. 앤드류는 새삼스럽게 스파이더맨 마스크가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토비에게 뜨거워진 뒷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꼴을 들켰을 것이다. 앤드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음, 제가 좀 감이 좋은 편이죠!”
“그런가요?”
앤드류가 어깨를 으쓱이자 토비 역시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는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담담한 표정이면서도 내심 긴장한 듯 토비는 어깨에 멘 가방끈을 힘껏 움켜쥐었다.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요. 당신은 괜찮다고 했지만, 역시 감사 인사 정도는 하고 싶고.”
행여 거절할까, 토비가 빠르게 덧붙였다.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식당은 너무 눈에 띄잖아요? 마스크를 벗으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말아요. 초대라고 해봤자 메뉴도 그냥 라자냐에요.”
“오…”
앤드류가 고민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토비가 굳이 스파이더맨을 다시 만나려 한 이상 단순히 안부 인사만 주고받지는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집’에 초대를 받을 줄은 몰랐다. 물론 앤드류에게도 싫을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오히려 싫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기쁨에 차서 세 바퀴쯤 공중제비를 돌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앤드류는 자신의 그런 내적 환호성을 조금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과연 이걸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스파이더맨으로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된다는 결심이 무색하게도, 기대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토비를 보고 있노라면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앤드류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결국 “좋아요.” 뿐이었다. 내가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토비를 실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순식간에 토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거절당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꼬리가 휘어지며 웃음 짓자 진한 눈꺼플이 더욱 도드라졌다.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이러니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 이건 불가항력이다. 후회마저 이렇게 사르르 녹여버리니 말이다.
“그럼…”
앤드류는 토비의 곁에 서서 살짝 한쪽 팔을 벌렸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품 안으로 쏙 들어와 안기자 꼭 달라붙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은은하면서도 달큰한 코오롱의 향기가 후각에 스며들고, 맞닿은 몸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앤드류는 솔직하게 그 역시 이 순간을 원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토비의 집은 이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세련된 오피스텔이었다. 그는 정말로 연구실 인턴을 하지 않는 이상, 앤드류 파커와는 실수로라도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인 셈이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망할 스파이더맨이라며 욕설을 퍼부었으나 지금 만큼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앤드류가 주차요원과 도어맨이 있는 오피스텔의 정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면 팍 기가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토비는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겠지. 그러나 다행히 앤드류에게는 고층 오피스텔의 창문을 출입구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덕분에 집에 들어간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만으로 토비를 감탄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발코니 난간에 올라앉아 토비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토비가 통유리로 된 발코니 문을 활짝 열었다.
“이쪽으로 누굴 초대하기는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네요.”
앤드류가 들어갈 수 있도록 살짝 몸을 비켜주며 말했다.
“우리 집에 어서 와요.”
“으음, 실례하겠습니다?”
앤드류 역시 현관이 아닌 발코니에서 초대에 응한다는 것이 퍽 어색했다. 앤드류의 그런 기류를 느꼈는지 토비가 쿡쿡 웃었다. 과장된 동작으로 레일을 훌쩍 뛰어넘자 뒤따라 들어온 토비가 문을 닫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앤드류는 제법 흥분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면서 집안 이곳저곳을 누비고 싶었으나 매너있는 방문객이 되기 위해 얌전히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커피? 아니면 맥주?” 주방 안쪽에서 토비가 물었고 “커피요!” 앤드류가 대답했다. 토비가 웃음 섞인 농담을 던졌다. “하긴, 음주운전은 곤란하죠.” 잠시 뒤 원두가 분쇄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기가 응접실까지 넘쳐 흘렀다.
앤드류는 너무 경박해보이지 않도록 애쓰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사는 집은 눈에 닿는 모든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벽돌 패턴의 아트월 디자인이라던가 원목 탁자, 그 위에 일렬로 늘어선 빈티지 오픈카 모형, 벽을 장식한 흑백 액자나 매번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시계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그는 온갖 종류의 첨단 장비에 익숙한 수석 연구원답지 않게, 꽤나 클래식한 취향을 가진데다가 의외로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요즘 같은 때에 프린팅된 연구 자료를 가지고 있던 모습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비록 논문과 전기 회로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콘솔박스에 널려있고, 빛바랜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의 존재는 응접실의 분위기를 다소 어수선하게 만들었으나 결코 난잡하지 않게 공간에 녹아들어 있었다. 처음 와보는 장소지만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이곳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토비의 흔적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라자냐를 미리 담아주었던 건지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토비는 금방 진한 블랙커피 두 잔과 크래커를 가지고 돌아왔다. 주방에서는 오븐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아주 미약하게 치즈가 녹아가는 냄새가 났다. 토비가 쟁반을 내려놓으며 맞은 편에 앉자 앤드류는 마스크를 콧망울 바로 위까지만 끌어올렸다.
“항상 당신이 직접 만들어요?”
“가끔씩은요. 혼자 산지 꽤 오래됐거든요.”
“굉장하네요. 우리는 거의 배달이에요.”
토비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스파이더맨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전, 그를 구해주었을때에도 잠깐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앤드류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가 크래커 한 조각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재잘재잘 떠들어대었다. 인턴을 하는 동안에는 수다를 떨 만한 여유도, 그만큼의 친분도 없었기에 늘 아쉬웠던 참이었다.
“막 나와 살기 시작했을 때는 동생한테 정크푸드를 먹이기 싫어서, 숙모에게 받은 레시피로 직접 만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요리에는 소질이 없다는 것만 알게 됐지만요.”
앤드류는 메이에게 받았던 라자냐 레시피를 떠올렸다. 그녀는 앤드류와 톰을 위해서 작은 노트에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레시피를 적어 건네 주었다. 메이의 레시피 노트에는 라자냐 면의 반죽 비율은 물론 토마토를 직접 끓여 만드는 라구와 베샤멜 소스의 조리법까지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앤드류가 원대한 포부를 안고 그 모든 재료를 구매하여 라자냐 만들기를 시도했던 날, 톰은 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음식을―그것을 음식이라고 평할 수 있다면―먹었노라고 평했다.
그 후로는 얌전히 마트에서 구매한 면과 소스를 사용했으나 그런 것들로 메이의 요리에 길들여진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을 턱이 없다. 톰은 이러느니 그냥 배달을 시키는 편이 낫겠다며 투덜거렸다. 싸구려 인스턴트 소스를 입안 가득 퍼넣으면서 앤드류 역시 내심 그 말에 동의했다. 가끔씩 메이가 찬거리를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형제의 식사 메뉴는 대개 포장 샌드위치나 타이 푸드, 시리얼, 혹은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를 얹은 토스트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통학이 편해서 동생까지 나와 살고는 있는데, 가끔 미안하다니까요. 형으로서 잘 챙겨주지 못하는 것도 같고…”
“스파이더맨.”
저도 모르게 쉬지 않고 조잘거리느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입을 빤히 바라보던 토비가 갑자기 운을 떼었다. “네?”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고 커피잔을 기울이며 토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앤드류에게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혹시 맥주를 안 마시는게 아니라 못 마셔요?”
“쿠헬럭!”
요란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막 목구멍을 넘어가려던 커피가 코로 튀어나올 뻔했던 앤드류는 화끈거리는 목을 부여잡고서 몇 번이나 더 기침을 토했다. 질문을 하고도 더 당황해버린 토비가 허겁지겁 건네준 티슈로 입 주변을 닦아냈다. 목뿐만 아니라 코속까지 따끔거려 찔금, 눈물이 났다. 목을 채 가다듬지 못해 켁켁거리는 목소리로 앤드류가 물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야, 목소리도 꽤 어리고.”
토비가 자신의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깔끔하게 면도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희미한 수염 자국이 남은, 적어도 ‘면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턱이었다. 앤드류는 황급히 매끈하기 짝이 없는 턱을 문질렀다. 물론 그 역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수염이 나고, 꼬박꼬박 면도를 해야 하는 성인이었지만 하관만으로도 느껴지는 앳된 인상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앤드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스파이더맨 만큼은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건만, 이런 식으로 덜미를 잡힐 줄이야. 머릿속으로 적당히 납득시킬 수 있는 거짓말의 상한 연령을 가늠해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높게 잡아봤자 연하라는 사실을 숨기기는 어려워 보였다.
“서른 정도에요. 당연히 술도 마실 수 있지만… 체질상 알코올이 안 받거든요.”
“꽤 동안인가봐요.”
토비가 감탄했다. 자주 듣는 말이라며 둘러대자 다행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난 절반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뒤늦게서야 말을 좀 아껴야 했노라고 내심 후회를 했다. 벌써 부터 이렇게 제 개인사를 죄다 늘어놓아서야, 앤드류 파커일때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정도 나이 차이라면 동생에게 각별할 만도 하네요.”
“그으렇죠.”
뒷목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식은땀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뒤늦게 입단속을 해봤자 이미 톰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까지 죄다 까발려진 후였다. 앤드류의 당황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는 토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맥주를 홀짝이면서 귓가를 간질거리게 만드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제가 없어 부럽다는 말로 시작해 앤드류가 일부나마 찾아주었던 연구 자료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재차 감사를 표했다. 마음같아서는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 떠들어대고 싶었지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마치 이과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 오븐이 울렸다. 어느새 라자냐의 고소한 치즈 냄새와 기름지면서도 새콤한 라구 소스 향기가 응접실까지 가득 차 있었다.
저녁 식사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맛있었고 또한 즐거웠다. 라자냐 그릇을 전부 비운 후 토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맥주에서 그치지 않고 치즈와 위스키를 한 병 꺼냈다. 물론 앤드류는 음주에 어울릴 수 없었지만 술이 들어갈수록 얼굴이 풀어지며 웃음이 헤퍼지는 토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취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토비는 열이 오른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앤드류로서도, 스파이더맨으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로 웃었다.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을 늘어트리며 움푹 파인 보조개를 방긋거리는 얼굴이 마치 소년처럼 어려 보였다. 그 역시 알코올에 썩 강하지는 않는지 치즈가 거의 사라졌을 때쯤에는 양 뺨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붉어지고 말았다.
앤드류 본인이 술을 마시지 않는 만큼 방탕한 음주 가무에 어울려본 경험도 없는지라 적당히 제어해야 할 선을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토비가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거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간 앤드류가 걱정을 담아 어깨를 살짝 흔들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베시시 웃었다. “스파이더맨.” 한층 가늘어진 목소리로 연신 앤드류를 불렀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그는 더 이상 거리를 지키려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몸을 기대왔다. 가슴팍에 툭, 동그란 머리가 닿자 지나치게 빨라진 심장 소리를 듣는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괜찮아요, 토비? 침실로 옮겨줄게요. 어느 쪽이에요?”
토비를 부축하기 위해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은 앤드류는 잠깐의 고민 끝에 아예 등과 무릎 뒤를 받쳐 번쩍 안아 올렸다. 졸지에 동성의 품에 안겨지고도 토비는 거부하기는커녕 앤드류의 목을 와락 끌어안아 고개를 파묻었다. “저기…저쪽…” 어깨에 짓눌려 자그맣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취기가 올라 뜨거워진 몸을 안고 있어서 그런지 앤드류마저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앤드류는 토비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고 느릿하면서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앤드류는 그만 침대 곁에 주저앉고 말았다. 옅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연거푸 얼굴을 문질렀다. 하얗기만 하던 뺨에 핑크빛 홍조가 떠오른 모습이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제아무리 스파이더맨을 믿는다지만 어째서 이토록 무방비하게 구는지 모를 수가 없다.
이번 딱 한 번만이야. 스스로도 얼마나 가게 될지 자신할 수 없는 다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까워진 얼굴에 훅, 짙은 알코올 냄새가 끼치자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어질거렸다. 앤드류는 유난히 더 뜨거운 뺨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쌌다. 짧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을 간질이자 그만큼 가슴 속도 간질간질해졌다. 예쁘게 내리감은 속눈썹과 도톰한 눈커플을 빠짐없이 시야에 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는 동시에 약간의 씁쓰름한 알코올을 머금은 입술이 앤드류에게 닿았다. 말캉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가 살짝 내밀은 혀끝이 입술 사이의 틈새를 가볍게 흩으면서 떨어졌다. 수줍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지만 앤드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농염한 키스했다. 문득 아쉬움이 몰려왔다. 앤드류는 이번에야말로 더 이상은 스파이더맨의 모습으로 토비에게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언제쯤이면 다시 이런 입맞춤을 할 수 있을까. 스파이더맨에게는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지만 앤드류 파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일이 될 것이다. 어쩌면, 결국에는,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욕심을 낼 수도 있었지만 앤드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는 토비에게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잘 있어요, 토비.”
이번에는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침실에서 나가 도무지 떨어지려 하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발코니 난간에 앉아서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팔을 뻗고 웹슈터를 누르면 스파이더맨은 다시 앤드류 파커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날 연구실에서 만난 토비는 지금처럼 사랑에 빠진 얼굴로 앤드류를 보지도 않을 테고, 연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을 걸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선뜻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수차례를 망설이기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요란스러운 벨소리가 울렸다. 두 어 번 현관 벨을 누르던 정체불명의 방문객은 집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예 쾅쾅대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토비! 당장 문 열어!” 절대 호의적이라고는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문소리가 마침내 토비의 잠을 깨웠는지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은 그가 비틀비틀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커튼이 쳐진 거실에서는 아직 발코니를 떠나지 못한 앤드류를 볼 수 없었다. 인터폰을 확인한 토비가 집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아, 제기랄.” 방문객은 문이 열릴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토비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왜 연락을 안 받아?”
성큼, 안으로 걸어들어온 남자가 토비의 팔을 잡아채며 다그쳤다. 발코니에서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니 앤드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오스코프 앞으로 토비를 마중 나온 적이 있는 사람이다. 미간을 찡그리며 붙잡힌 팔을 빼내려던 토비는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젠장, 톰슨… 너랑은 끝낸다고 했잖아.”
“난 알았다고 한 적 없어!”
“내가 그만하겠다는데 네 동의가 필요해?”
톰슨의 뺨이 굳으면서 눈썹이 매섭게 치솟아 올랐다. 막 입을 열려던 톰슨은 토비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알아차리고는 뿌득, 이를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안에는 아직 두 사람 몫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두 개의 라자냐 그릇, 두 개의 컵.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누구야? 어떤 새끼랑 술 마셨어?”
“네가 신경 쓸 일 아냐.”
“누구냐고!”
톰슨이 윽박지르자 토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팔을 붙잡은 톰슨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발코니를 튀어 나갈 뻔했던 앤드류는 황급히 화를 가라앉히며 거친 심호흡을 했다. 스파이더맨이 나선다고 해서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곳은 뉴욕의 거리나 골목이 아닌 토비의 자택이었고 그건 스피이더맨과의 개인적인 친분만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다.
앤드류는 곧장 발코니 난간으로부터 뛰어내렸다. 다급하기 짝이 없는 웹스윙을 하면서, 부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별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토비에게서 명확한 대답이 없자 톰슨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양되었다. 덕분에 취기만큼은 확실하게 사라졌지만 대신 머릿속에 대형 스피커를 켜놓은 듯 웅웅 울려대서 두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토비는 연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스파이더맨이 돌아가서 다행이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취해버린 것도 부끄러운데, 이런 꼴을 보였다가는 수치심으로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좀 아는 사람이었어! 이제 좀 꺼져, 톰슨.”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아냐. 갑자기 문자 하나만 툭 보내놓으면 내가 납득할 것 같아?”
그야 이제 너한테 좆도 관심이 없으니까! 욕짓거리가 목구멍 아래까지 치솟았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화가 난 상태의 톰슨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상황만 더욱 악화시키고 말 것이다. 애당초 몇 주 전부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오던 관계였다. 오래 사귄 만큼 지루해진 관계였고 톰슨도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대로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더라도 점차 멀어지다가 자연스럽게 끝나버릴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기도 전에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갑작스럽더라도 깔끔하게 정리해버릴 생각이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변명할 말도 없었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해 차라리 입을 다물어버리자 오히려 그 행동이 화를 부추긴 것 같았다. 톰슨은 토비의 어깨를 움켜잡아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역시 성인 남성이었고, 충분히 관리되는 몸은 연약하기만 하지 않았으나 그래봤자 톰슨의 체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취기로 가누기 힘든 몸이 벽에 처박혔다. 등 뒤가 강하게 부딪히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뒷골이 울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톰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토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거 안 좋은데. 긴장으로 인해 마른침이 넘어갔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불안한 분위기를 뚫고,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선―배― 문 열어주세요!”
팽팽하게 당겨진 집안의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였다. 토비는 순간적으로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다가, 선배라는 호칭을 상기하고서야 앤드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톰슨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현관을 향해 턱짓을 했다. 누구냐는 물음이었다. 토비가 멱살을 쥔 손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연구실 인턴이야.”
“지금까지 같이 있던게 저 새끼야? 네 새 애인?”
톰슨은 여전히 날이 선 모습이었지만 토비는 그 말을 듣고 그만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 애는 대학생이라고!”
어이없는 기분을 가득 담아 대답하자 톰슨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가 토비의 말을 따라하듯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대학생이라고?” 이번에는 톰슨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고작 어린애를 상대로 그런 오해를 했다면 민망해질 법도 하다. 인터폰이 비추는 화면에는 토비의 말대로 아직 앳된 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청년이 서 있었다. 톰슨이 한발 물러서자 토비는 아무런 방해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앤드류는 손에 든 봉투를 번쩍 들어보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짠! 아이스크림 사 왔어요! 조금 취하신 것 같길래… 오, 그새 손님이 오신 건가요? 안녕하세요!”
토비의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톰슨을 발견한 앤드류가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인지 어린 학생다운 모습이었다. 토비는 앤드류가 자신이 직면하고 있던 상황을 전부 알고 왔음을 깨달았다. 왜 그가 지금껏 토비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토비는 얼른 아이스크림 봉투를 받아 들면서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고마워, 앤드류. 음, 그러니까 이쪽은, 내 연구실 인턴인데.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의논할게 있어서 불렀어. 겸사겸사 저녁도 먹고. 그리고, 여기는 톰슨이라고…”
“됐어.”
토비의 말을 툭 잘라먹은 톰슨이 그의 곁을 지나쳐 현관을 나섰다. 기분파에 쉽게 화를 내고, 막무가내로 제 기분을 휘두르곤 하는 톰슨이었지만 한참 어린 녀석을 앞에 두고 꼴사나운 드잡이를 하지 않을 정도의 체면 머리는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어라? 가시는 건가요? 어, 혹시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순진하기 그지없는 눈망울을 굴리며 앤드류가 말했다. 그런 앤드류를 퍽 고까운 시선으로 노려보면서도, 무해한 얼굴에 대고 차마 내색은 하지 못해 쯧, 불만스럽게 혀를 찰 뿐이었다. 결국 톰슨은 별다른 소동 없이 물러났다. 그가 나가고 나니 집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뻔뻔할 정도로 능숙한 연기를 펼쳤던 앤드류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토비의 눈치를 살폈다. “괜한 참견이었어요?” 토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알았어?”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뜸을 들이던 앤드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스파이더맨이 알려줬어요. 선배가… 자기 때문에 곤란해졌으니 대신 가봐달라고…”
“이런…”
토비는 민망해진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결국 그 소란을 다 들었으리라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몰려와 귓가가 뜨거워졌다. 비단 스파이더맨뿐만 아니라 그리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기 힘든 후배에게도 보일만 한 모습은 아니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너도 난처했을 텐데.”
“아니에요.”
앤드류가 냉큼 대답했다. 조용한 공기가 어색했다. 스파이더맨일 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불과 조금 전까지 토비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먹하기 짝이 없었다.
“저기, 그 사람이 밖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괜찮은데.”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으나 굳이 앤드류를 내보내려 하지는 않았다. 토비는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었다. 완전히 술이 깨버린 모양인지, 아직 얼굴에 붉은 기가 남아있긴 했지만 조금 피곤할지언정 정신만은 멀쩡해 보였다. 술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컵 가득 냉수를 담아 응접실로 돌아온 토비가 창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아 앤드류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만 것은, 어린 아이 같은 유치한 투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스파이더맨은 안 와요.”
“그, 그런거 아냐.”
정곡을 찔렸는지 토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시선이 이번에는 앤드류를 향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얼굴에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껏 잘 참아왔던 울분이 비죽 솟아올랐다. 토비에 비하면 한참 어린 것도 사실이고, 내세울 만한 것 없는 애송이란 것도 사실이라지만 그에게는 연애 대상으로조차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앤드류가 바로 스파이더맨이라는 점이다. ‘스파이더맨은 되면서 나는 왜 안 되는데?’ 오기가 치솟았다. 이러나 저러나 토비의 눈에 들 수 없다면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도록 제 존재를 뇌리에 각인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선배 부탁도 전해주지 않을 거예요.”
토비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앤드류가 먼저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토비는 퍽 당황한 눈치였다. 토비를 대할 때면 커다란 대형견 마냥 방실방실 웃을 줄만 알던 입매가 일자로 다물어졌다. 조금은 긴장한 것도 같으면서, 동시에 진지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가 실수한 거라도 있어?”
“그야,”
토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앤드류가 말했다.
“제가 선배를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