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내쉬(라스트홈::앤드류 가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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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
사람이든 물건이든 음식이든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다.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어떤 부분에서 만큼은 닷코비치의 그 낡은 아파트보다 좋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불편했다. 중심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로워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은 교통도 나쁘고 치안도 좋지 않았다. 늦은 새벽까지도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피터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 대신 얻게 된 개인 욕실에 비하면 때때로 숙면을 방해받는건 사소한 문제였다. 여전히 방은 작은 원룸이었지만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때 집주인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필요가 없다는 점 역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이제 피터는 아침 일찍 일어나놓고도 욕실을 점령한 닷코비치를 기다리며 샤워 용품을 든 채 문 앞을 서성이다가 지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닷코비치의 아파트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궁색하기 그지없는 그 다세대 아파트는 층계마다 복도가 연결되어 있었고 한 층에는 대여섯 가구가 살았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제대로 켜지지 않아 깜박이는 전등을 세 개 쯤 발견할 수 있었고 제때 교체되지 않아 완전히 꺼져버린 전등이 늘 두 개 이상은 있었다. 각 세대가 복도의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탓에 가구의 절반은 건물 뒤편으로 창이 나 있었는데, 덕분에 그런 방은 해가 잘 들지 않아 가격이 특히 저렴했다. 꼭대기 바로 아래층의 복도 맨 끄트머리에서 한 칸 안쪽에 위치한 피터의 거주지는 당연하면 당연하게도 볕이 들지 않는 방향이였다. 창을 열고 발코니를 나가면 차이나타운의 번잡한 거리가 아닌 바로 옆 건물의 시커먼 벽돌과 그 사이사이에 자라난 이끼가 보였다. 햇빛은 커녕 가로등의 불빛마저 닿지 않는 탓에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집 안은 늘 어두웠다.
대개는 최악의 거주 환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말했듯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존재했다. 그 골목에는 하수구에서 기어 올라온 지저분한 쥐와 바퀴벌레라면 모를까 사람이 오갈 일은 없었기에 피터는 아무런 걱정 없이 스파이더맨 수트를 입고서 창문을 통해 집 밖을 드나들 수 있었다. 은밀한 장소를 찾아 옷을 갈아입고, 그렇게 벗어둔 옷을 거미줄로 묶어놓았다가 새까맣게 잊어버려 방치되는 일이 사라지게 된 셈이다. 비록 새 옷을 살 필요가 없어 아끼게 된 돈을 코인 세탁소에 고스란히 가져다 바쳐야 했지만 말이다. 이 집에서 피터는 옷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섬유유연제보다 쨍쨍한 햇빛이 훨씬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웠고, 덕분에 이제는 빨래를 할 때마다 건조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비록 윗집 남자의 쿵쿵거리는 발소리나 아랫집 여자의 찢어질 듯한 일렉기타 소리가 여과없이 흘러 들어오고는 했지만 닷코비치의 아파트도 방음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만큼 소음에는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어차피 피터는 그리 집에 붙어있는 편이 아니었다. 맨해튼의 살인적인 집값을 생각하면 꽤나 합리적인 등가교환인 셈이다. 피터는 이사를 후회하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단점만큼의 장점이 존재하는 이 집에도 대체할 수 없는 문제는 있었다.
차이나타운에는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성별도, 인종도, 나이도 모두 다른 이들이 모여들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사람들이 수십 가구씩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이웃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기에 피터는 이웃 사람들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지만 맨 끝 방 남자에 대해 품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는 있었다. 그를 대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방음이 좋지 않은 이 집에서는 이웃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랫집 여자의 기타소리를 바탕으로 그녀가 밴드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알게 되듯이 말이다. 옆집 남자의 경우, 피터가 가진 이미지는 두 가지로하여금 형성되었다. 소리. 그리고 냄새.
이따금 늦은 밤 시간대에 옆집에서 건너오는 소리가 있다. 그 주기는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어서 어떤 날은 하루걸러 하루이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몇 주를 건너뛰기도 했다. 그 소리가 나는 다음날이면 피터는 아침 일찍부터 문 너머를 통해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가는 하이힐 소리를 들었다. 텅 빈 복도를 커다랗게 울리는 규칙적인 또각거림을 듣고 있노라면 새벽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소리가 떠올랐다. 톤 높은 여성의 교성 사이사이에는 낮게 울리는 남자의 나른한 신음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비록 그는 섹스를 할 때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간간이 내뱉는 감탄사나 짧은 속삭임만으로도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피터는 그가 상당한 골초라는 것도 알았다. 옆집에서 발코니 창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피터의 방 안으로 바람에 희석된 담배 냄새가 넘어왔다. 가끔은 그 자리에서 두 개비 이상을 연달아 피우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보통 누구인지 모를 상대와 전화를 할 때였다. 전화를 끝내면, 담배 연기를 뱉어내고 있을 날숨에는 유난히 더 길고 무거운 한숨이 섞였다.
종종 방문해 섹스를 하고 가는 애인을 제외하면 그에게는 다른 가족은 없었고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 부지런한 성격이기라도 한지 일과는 언제나 규칙적이었지만 휴일에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고칠 것은 많지만 여간해서는 수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잦은 공구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손재주가 굉장히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래. 술.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문 앞에 내놓은 봉투에는 늘 찌그러진 맥주캔으로 가득했다. 가끔은 맥주가 그의 주식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피터의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그리 주의깊게 관찰하는 성미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섬세하지 못할 뿐이지 피터는 언제나 저를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들을 대상으로 쉽게 공상에 빠졌다. 섹스와 담배연기, 습관적인 알코올을 바탕으로 상상해본 옆집 사람은 왠지 조금 무서울 것 같았다. 키가 크고, 근육질에, 어쩌면 수염이 덥수룩할지도 모르겠다. 피터의 상상 속에서 맹수같은 눈을 한 미지의 남자는 거칠고 위협적인 전형적인 불량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터가 매일같이 마주해야 하는 크고 작은 갱단의 우두머리처럼 말이다.
이사를 오고도 피터는 꽤 오랫동안 그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피터가 애용하는 출입문이 옆집과는 고작 3미터 남짓 떨어진 현관이 아니라 창문이라는 점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 증거로, 옆집 남자와 피터의 첫 만남은 모처럼 평범하게 아파트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가려 했던 날 이루어지게 되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는 피터가 현관 앞에 서서 열쇠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고 있을 때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열쇠를 찾는 일에 정신이 팔린 탓에 같은 층의 복도를 지나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현관을 이용하는 일이 오히려 드물어서 열쇠는 가방 속의 다른 잡동사니들과 뒤섞여 밑바닥을 뒹구느라 쉬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두꺼운 전공서의 사이사이를 더듬고, 지갑이며 휴대폰 같은 것들을 치워가며 가방 안을 헤집은 끝에 마침내 열쇠를 손에 쥐었을 때 피터의 등 뒤를 지나친 발소리가 바로 옆집에서 멈춘 것을 알았다. 인기척을 느낀 피터가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그저 머릿속에서 막연한 느낌으로만 존재했던 이웃이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서 있었다. 언젠가 피터가 그려봤던 이미지대로 제법 체격이 있는 다부진 남자였으나 상상만큼 거대하지도, 수염이 덥수룩하지도 않았다. 볼캡을 살짝 앞쪽으로 눌러 쓴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인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자로 꾹 다문 입매는 무표정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을린 피부와 문신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불량배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가방을 고쳐맨 피터는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 대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굳이 옆집에 찾아가 현관문을 두드릴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못했으나 이왕 얼굴을 마주치게 된 이상 이야기는 달라진다.
“저기,”
막 현관을 열던 남자는 애매하게 열린 문을 붙잡고 피터를 돌아보았다. 살짝 고개를 추켜드는 턱짓과 그늘진 시선 너머로 보이는 눈빛에서 재촉을 담은 의아함이 느껴져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실내 흡연은 금지에요. 발코니도 그렇구요. 연기가 넘어오거든요.”
피터는 가방끈을 더욱 꽉 움켜쥐면서 그가 보일법한 반응을 예상해보았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불친절하고 비논리적인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학창 시절부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실수를 지적당하는 일을 싫어했다.
금지라고는 해도 사실 거의 지켜지지 않는 규칙임을 피터도 모르지는 않았다. 마치 ‘공용 욕실 사용시간 10분 이내’ 라는 닷코비치의 규칙처럼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닷코비치의 규칙을 어겨도 되는 사람은 닷코비치 본인을 포함한 그의 가족들 뿐이었으나 이 다세대 공용 주택의 실내 금연 규칙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다. 그렇다 한들 규칙은 규칙이었으며 피터는 그의 흡연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입장이었으니 정당한 항의였다.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아.”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턱 아래를 긁적였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는 행동에는 잘못을 지적당한 사람이 보일 법한 머쓱함이 있었다. 내 집에서 담배를 피우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윽박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피터는 조금 놀랐다. 그는 피터에게 끼친 피해가 고의는 아니었다는 듯이―마치 연기가 다른 집으로 넘어갈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말했다.
“조심할게.”
남자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충분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피터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피터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대화를 해볼 법한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은 발코니 흡연에 비해 훨씬 더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저 존재 사실만을 알고 있는 미지의 누군가라면 모를까 이제는 얼굴까지 마주한 이웃 사람의 섹스 소리를 듣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 소리에 명확한 비전까지 따라붙는다면 지나치게 곤란해질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는데요.”
그렇다 한들 민망한 화제라는건 변하지 않아 일부러 고개를 숙인 채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피터는 열쇠를 돌리면서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딱히 신경에 거슬린 것은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그, 소리가… 그건 제가 참견할게 아니긴 한데, 여기 벽이 얇아서 그 소리가 넘어와요.”
“소리?”
덜컥. 손끝으로 열쇠가 문고리 안에서 걸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열쇠가 끝까지 돌아가지 않아 내심 당황했지만 피터는 내색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내뱉은 화제를 끝맺기 위해 노력했다.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해요. 공용 주택이니까 그냥 조금만 조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린… 건데…”
피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아아, 깨달음이 섞인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 역시 민망한지 별다른 대답은 없었지만 힐끔 눈동자를 굴려 바라본 남자는 조금 열이 오른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상식이 있고 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음부터는 주의를 기울여 줄 터이니 이제 그만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지금 문이 열리지 않았다. 피터는 매번 문을 여는데 필요 이상의 수고를 들여야 했던 닷코비치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문과 관련된 불운이 피터의 꽁무니를 쫒아다니기라도 하는지 낡은 현관문은 새로운 집에서도 예외 없이 피터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작 문 하나로 골머리를 썩여야 하는 제 처지에 억울함마저 느끼며 덜걱이는 문고리를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신의 섹스 소리를 들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던져놓고 그 상대의 시야 안에 머물러있고 싶지는 않았다. 고작 문 하나를 열지 못해서 낑낑거리는 꼴을 보이는 기분도 그리 유쾌하지 않고 말이다.
옆에서는 피터와는 달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추어 선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피터는 문고리를 좌우로 움직이고, 문짝이 덜컹거리도록 앞뒤로 흔들어보기도 하면서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움츠러든 어깨가 퍽 안쓰러워 보였는지 결국 남자가 물었다.
“문제라도 있어?”
결국 피터는 문을 열기를 포기하고 굳게 닫힌 문에 이마를 기댄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는 발코니 쪽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이 고장 난 것 같아요.”
피터는 그가 곧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피터와는 달리 수월하게 열린 제집의 현관 안쪽으로 휙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도시에서, 그것도 차이나타운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럴 터였다. 남자의 태도가 피터의 상상과는 달랐다지만 여전히 그는 과묵했으며 살가운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작은 원룸에서 과감하게 섹스를 하고,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소음이나 간접 흡연은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일 것 같았다. 남자의 질문은 걱정이라기 보다는 그저 작은 호기심으로 들렸다. 혹은, 최소한의 형식적인 예의이거나.
그러나 그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현관을 닫고 피터에게 다가왔다. 남자가 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철제 케이스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피터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이 공구 가방임을 깨달았다. 남자가 피터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비켜봐.” 툭 던져진 목소리가 단호해서 얼떨결에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열쇠를 몇 번 돌려보고서 익숙하다는 듯 곧장 공구함을 열었다.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문고리만 당기던 피터와는 달리 전문적인 태도였으며 그만큼 거침이 없었다. 간단하게 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열쇠가 걸리는 감각만으로 일찌감치 문제를 파악했는지 수리를 하기 위해 공구함 안의 작은 부품들을 뒤적이기까지 했다.
“잠금장치가 휘면서 아귀가 어긋났어.”
드라이버를 들고 잠금쇠 부분을 툭, 툭 두드리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특별히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무심함에도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나긋함이 있었다.
피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휘어진 잠금장치의 나사를 풀고 있는 남자의 옆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자꾸만 문가와 부딪히는 볼캡의 챙이 거슬리는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리자 가려졌던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그저 웃고 있지 않을 뿐 그리 인상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무표정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부드러움은 살짝 늘어진 눈꼬리와 머리카락만큼 옅은 빛깔의 속눈썹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냄새와 소리로 불편을 끼치던 무례한 이웃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분명했다. 마음이 허물어지자 호의는 쉽게 생겨났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완전히 희석되어 버렸다. 피터는 문제가 없다면 굳이 이웃과의 교류를 마다할 사람은 아니었으며 긍정적인 기분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는 편이었다. 피터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생겼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 그…”
피터가 적당한 호칭을 찾아 눈을 굴리자 그 얼굴을 곁눈짓으로 슬쩍 올려다 본 데니스가 말했다.
“…내쉬. 데니스 내쉬.”
“내쉬씨.”
피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통성명을 한다는 것은 보다 친근한 이웃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피터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는 피터 파커에요.”
데니스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서 새것으로 교체한 잠금장치를 조였다. 두툼한 팔뚝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주고서도 마지막까지 한 번 더 드라이버를 돌리며 단단히 고정이 되었는지 확인했다. 입주하고 수개월이 지나도록 인사 한번 건넨 적 없는 낯선 이웃의 현관문을 난데없이 고쳐주게 된 것 치고, 정성스러울 만치 꼼꼼한 손속이다.
“수리비 드릴게요”
“됐어.”
마침내 공구통이 닫히자 감사를 담아 말했지만 데니스는 단번에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민폐 끼친 대신이라고 쳐.”
대충 바닥에 던져놓았던 모자를 들고 몸을 일으킨 데니스가 말했다. 먼지를 털어내고서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자 헤이즐넛 눈동자에는 볼캡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피터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의 시선이 처음에 비해 한결 온화해졌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볼일은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데니스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버렸지만 든든한 이웃이 생긴 것만 같은 마음에 기분이 좋았다.
뉴욕은 데니스가 나고 자란 고향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밤낮으로 빛나는 도시의 화려함은 마치 반짝이는 보석으로 가득 채운 상자 같았다. 그러나 눈이 부시는 향락의 도시에도―오히려 그렇기에―쓰레기장은 존재했다. 따듯한 햇볕과 바람이 조금은 짭짜름한 바다 내음을 옮겨다 주는 플로리다의 주택에서 평생을 살아온 데니스가 새로이 자리를 잡은 곳은 그런 쓰레기장 같은 곳이었다. 모텔방보다야 넓지만 그래봤자 작은 발코니 하나가 달린 것 외에는 더 나은 구석 하나 없는 한 칸짜리 방에서, 데니스는 그곳이 모텔처럼 잠깐 머무르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작은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 닭장을 연상시키는 공용 주택에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베이컨을 굽는 동시에 계란후라이를 할 수 있는 아일랜드식 주방이라던가 화분을 장식할 수 있는 거실, 어린 자녀와 캐치볼을 할 수 있는 앞마당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쌓아온 추억도, 앞으로 쌓게 될 추억도 없는 공간은 잠을 잘 침대와 맥주를 마실 테이블 하나면 충분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린에게 뉴욕에 온 것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의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서 데니스는 부지런히도 움직여야했다. 이른 아침과 한낮을 공사 현장에서 보내고 나면 남은 시간에는 일반 가정집의 의뢰를 받았다. 작게는 벽에 선반을 달아주는 일부터 크게는 에어컨 실외기와 배관 설치까지 종류도 다양했지만 다행히 데니스는 재주가 많은 편이었다.
연줄도 기반도 없이 뚝 떨어진 뉴욕에서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중개소를 거칠 수밖에 없기에 수수료를 떼이고 나면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데니스의 생활을 걱정하는 린의 우려는 꽤나 예리한 셈이다. 덕분에 데니스는 매달 린에게 생활비를 보내고나면, 전화 통화를 하며 매달 똑같은 말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전 정말 괜찮아요, 엄마.”
깊이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거짓말을 했다. 린과 전화를 하는 동안에는 도무지 입에서 담배를 떨어트릴 수가 없었다. 뉴욕의 집값은 플로리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아서 집세를 내고 생활비까지 보내고 나면 남은 돈으로는 혼자서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 공사가 하나 끝나면 다른 곳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 일용직의 벌이는 불안정하다. 운이 없어 바로 옮겨갈 곳을 찾지 못하면 그달의 수입도 반 토막 나기 마련이지만 그럴 때조차도 데니스가 부치는 돈은 늘 일정한 금액을 유지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기도 했고, 동시에 지금도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책임감이기도 했다.
“코너는 이번에도 제 전화는 안 받겠대요?”
바닥에 떨군 담배를 발끝으로 비벼 꺼버리며 물었다. 약간의 침묵 끝에 대답을 들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듯, 현관 층계에 얹었던 발을 다시 내려버리고 대신 한 개비를 더 꺼냈다. 데니스는 층계의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불을 붙였다. 저도 모르게 필터를 짓씹자 혀끝이 아릴 만큼 쓴맛이 났다.
“…아뇨. 억지로 바꿔주지 마세요. 잘 지내는 것만 알면 돼요.”
그가 마침내 선고받은 형량을 전부 채웠을 때, 코너는 어느덧 9학년이 되어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면회를 오지 않게 된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출소일까지도 데니스를 맞이해준 사람은 린 뿐이었다는 점이 데니스를 기죽게 만들었다. 템파에는 들르지도 못한 채 뉴욕행을 선택한 것은 도피와도 같았다. 지금쯤이면 변성기도 지났을 나이니 데니스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았다. 데니스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아이를 받아들일 만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전화는 코너가 가고 싶어 하는 고등학교의 학비와 성적에 대한 짧은 대화가 오간 후에야 끊어졌다. 충분히 짧아진 담배를 꺼버렸지만 데니스는 결국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 집 안에서는 피우지 못하니 담배보다 더 새까맣게 탄 속이 풀릴 때까지 현관에서 태우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다보면 종종 윗층에서 담뱃재가 떨어질 때가 있다. 사실 슬쩍 고개를 숙여 골목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발코니 흡연이 공공연하다는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피터의 부탁을 무시하지 못한 것은 그 아이의 나잇대가 지금쯤 훌쩍 자라버렸을 코너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 탓이었다. 뉴욕은 고등학생도 자취를 하나 보지. 첫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자마자 한숨을 섞은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라이터를 집어넣기가 무섭게,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
오, 이런.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였지만 데니스는 무심코 그것을 난간에 비비고 말았다. 피터였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도덕과 원칙을 당연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이 아이는 담배 냄새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한 블록 건너 한 블록마다 약쟁이나 창녀를 마주칠 수 있는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서, 피터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수의 주민 중 하나였다.
“혹시 현관도 금연구역이야?”
피터는 고개를 가로젓고 계단 위로 떨어진 길쭉한 담배를 주워들어 길가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별다른 타박이나 지적을 동반하지 않은 조용한 행동이었으나 그렇기에 괜히 더 머쓱해져서 뒷목을 문질렀다. 처음 만났을때에도 생각했었지만 소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하나 못할 것처럼 생긴 아이는 보기보다 강경한 성격인 것 같았다. 언뜻 유순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꾹 다물린 입매에서는 묘한 고집이 엿보이는 것도 같았다.
조금 전 피우지도 못하고 꺼버린 담배가 돗대였는지 담뱃갑 안이 텅 비어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피터를 따라 아파트 층계를 올랐다. 관리가 잘 되지 않는 복도에는 여전히 벌레가 지나다녔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방치 중인 복도의 깨진 창문을 보고서 가볍게 혀를 찼다. 문득 피터의 망가진 현관이 떠올라 요즘은 별일이 없는지 묻자 그는 괜찮다는 대답과 다른 문제는 없다는 말을 했다. 과연 이 아파트에서 거주인의 속을 썩이는 것이 문 하나뿐이랴 싶었지만 굳이 자세하게 알려고 들 필요까지는 없었다. 딱히 현관의 잠금장치 이상의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피터의 현관 아래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수돗물이 모든 대답을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안 좋은데. 중얼거린 데니스는 제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잊고서 피터가 황급히 열어젖힌 현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수도관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무섭게, 평소에는 모든 일에 심드렁하게 굴며 늦장을 부리던 관리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현관을 열었을 때 방안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세면대의 수도관에서부터 흘러넘친 물이 카펫을 푹 적셨고 바닥에 널브러트려놓은 신발이나 옷, 가방까지 축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벽지에 흡수된 물기가 종아리 높이까지 올라오고, 가구 아래와 뒤편에 쌓여있던 먼지 따위가 물에 둥둥 떠서 바닥과 닿은 모든 것에 들러붙었다. 방 안이 지독한 물비린내로 가득했다.
데니스가 덕트테이프로 임시 처치를 하는 동안 피터는 바닥의 물을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건물 관리인은 그저 얼토당토않은 불평을 늘어놓기만 했다. 그는 울적하기 그지없는 표정의 피터에게 짐짓 권위적인 태도와 목소리로 성화를 내었다. 분명 수도관이 완전히 터지기 전에 조금씩 누수가 있었을 텐데 그것을 미리 알지 못한 피터에게 이 사태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데니스는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서 화를 내는 관리인과 그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묵묵히 듣고 있는 피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 말은 하는 녀석인 줄 알았건만, 수도관의 수리 비용은 물론 아랫집에 끼쳤을 침수 피해 보상까지 들먹이기 시작한 관리인의 말에도 피터는 얇은 눈썹을 힘없이 늘어트릴 뿐 항변 한마디 없었다.
“잠깐, 잠깐만.”
결국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쉰 데니스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으나 눈앞에서 빤히 벌어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외면할 만큼 무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게 하필 ‘집’에 대한 문제라면 특히 더 그랬다.
“그걸 세입자한테 요구하면 안 되지. 의도적인 훼손이 아닌 이상 하자 보수는 당신 책임이잖아. 계약서에도 가장 기본적으로 명시돼 있을 텐데요?”
완전히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그러잖아도 큼지막한 눈이 동그래지도록 놀란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어쩐지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있더라니, 아직 어린 학생 아니랄까봐 부동산법이나 임대차 계약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교활한 인간은 그런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법이다. 피터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데니스의 모습에 난처한 낯빛을 띠기 시작하는 관리자의 반응을 모르는 척, 피터에게 턱짓을 했다.
“아니 그리고, 얘가 입주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수도관이 터져? 그건 그냥 건물 관리를 안 한 거지. 입주 전 하자 점검도 관리 의무인거 몰라요? 피터, 계약서 가지고 있지?”
“크흠!”
당당하기 그지없던 관리인이 갑자기 커다랗게 헛기침을 했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피터는 안중에도 없이 데니스의 눈치를 살피는데 바빴다. 그 시선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을지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데니스는 팔짱을 끼면서 살짝 고개를 추켜들었다. 논쟁거리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니 기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상대가 갓 성인이나 되었을까 싶은 순진한 청년이라면 모를까, 묘하게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것으로 보이는 데니스를 속여 먹지는 못하겠다고 판단했는지 마침내 한풀 꺾이고야 말았다. 마뜩잖은 말투일지언정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선 것이다.
“아니, 그냥 앞으로는 조심해달라는 뜻에서 한 말이지, 뭐.”
결국 문제는 관리인이 책임지고 보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물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수리 비용 역시 임대인의 몫이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망가진 가재도구며 가구 등 피터가 입은 손해 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부분까지 순순히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 하나를 덜어낸 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안심해버릴 만큼 마음 약한 녀석이 그 이상을 요구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를 내는 방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아직 직면한 문제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터는 기쁜 얼굴로 웃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침수된 방이 정리되는 대로 보수 공사를 진행해 주겠다는 구두 계약을 끝낸 관리인이 돌아가고, 마찬가지로 볼일을 끝내고 나가려는 데니스를 놓칠세라 다급한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Thank you.’라는 말은 꽤 오래전에 저와는 연이 없어진 단어인 줄로만 알았거늘 어느새 두 번이나 들어버렸다. 데니스는 걸음을 멈추고 피터를 돌아보았다. 정말인지 금방 경계를 허무는데다 호감를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애였다. 입술을 꾹 맞물리면서도 양쪽 끝을 끌어올린 순진한 미소는 도무지 뉴욕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플로리다에 있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담배 하나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는 이런 빽빽한 공용 주택이 아니라, 그의 진짜 집에서 이웃과 교류하고 코너와 놀아주며 마음껏 웃을 수 있었던 그때 말이다. 과거의 데니스 내쉬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에는 여유가 있었고, 태도에는 선의가 있었다.
“이웃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래서 데니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비록 낯설기 짝이 없는 미소는 빠르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시 무심해 보이는 얼굴만이 남았지만, 짧은 순간일지언정 뉴욕에 온 이래 처음으로 지어본 표정이었다.
‘좋은 집’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 마트와 버스 정류장이 있는지, 치안은 좋은지, 주변 거리가 깨끗한지와 같은 외적인 부분 역시 중요하지만 좁은 건물 안에 최대한 많은 가구를 쑤셔 넣은 공용 주택이라면 가장 기본적인 내부 구조에도 하자는 넘쳐난다. 차이나타운에는 그런 집들이 많았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무언가 하나씩 문제가 있는 집들. 데니스가 생활하는 아파트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공용 욕실을 써야 하는 집에 비하면, 세탁실이 없는 건 차라리 양반이었다.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까. 아파트에서 두 블록 너머에 위치한 코인 세탁소는 언제나 반 이상의 세탁기가 작동 중이었다. 남은 자리가 하나도 없으면 기껏 들고 온 세탁 바구니를 옆에 두고 남의 세탁물이 전부 돌아갈 때까지 멍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용 횟수가 많을수록 운이 나쁜 날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현장 일을 하면서 매일같이 세탁물이 쌓이는 데니스로서는 자주 겪는 일이었기에, 빈자리가 남아있는 건 운이 좋은 날이었다.
타이밍 좋게 딱 한 대 비어있던 세탁기에 세탁물을 쏟아 넣고 있을 때 피터가 들어왔다. 딸랑이는 출입문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데니스와 눈이 마주쳐 꾸벅, 인사를 한 그는 세탁소를 한 바퀴 빙 돌며 남은 자리를 찾았다. 데니스는 피터가 적어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창 돌아가고 있는 세탁물만 잔뜩 구경한 피터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세탁 바구니를 끌어안고 의자에 앉았다. 데니스는 지금 막 드럼 세탁기의 문을 닫은 참이었다. 피터의 세탁 바구니를 곁눈질하며 데니스가 물었다.
“누수 때문에 젖은 거야?”
“네. 전부 다시 빨아야 해요.”
바구니 안을 들여다본 피터가 다소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데니스는 피터의 방문을 열었을 때 얕게 찰박이는 바닥에서 표류한 배처럼 흐느적거리던 양말이며 속옷 따위를 기억해내고 작게 혀를 찼다. 건조를 끝낸 옷가지를 서랍에 넣는 대신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고 방치했다가 재난을 당한 모양이었다.
“옷은 바로바로 정리하는게 좋아.”
“네…”
피터가 고개를 숙였다. 꼭 선생님에게 혼난 후 풀이 죽은 학생 같은 모습에 데니스의 마음이 약해졌다. 괜히 들으란 듯이 큼, 헛기침을 한 데니스가 아직 시작 버튼을 누르지 않은 세탁기를 두드렸다. 피터의 시선이 데니스를 향하자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넣어. 같이 돌리지 뭐.”
멍하니 깜박이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도 돼요?”
고작 자잘한 옷가지 몇 개 정도로 양이 늘면 얼마나 들겠다고, 대단한 친절이라도 베푼 것마냥 놀란 얼굴에 유쾌한 기분 마저 들었다. 피터의 표정에는 화색이 돌았지만 여전히 빨래 바구니를 끌어안고 선뜻 일어나지를 못하자 데니스는 다시 한번 세탁기 안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신세를 지는 것만큼이나 기다리게 만드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제서야 쭈뼛쭈뼛 다가와 빨랫거리를 집어넣었다. 세탁 시간에도, 세제 투입비에도 별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이었거늘 동전을 넣고 있는 데니스의 옆에 서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건조기는 제가 계산할게요.”
다 해진 바지에서 낡은 지갑을 꺼내는 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고등학생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앳된 얼굴로 지갑 안에 들어있는 돈을 가늠해보고 있다. 이런 동네에서 자취하는 마당에 용돈이 넉넉할 것 같지도 않고, 제아무리 뉴욕이 팍팍한 도시라 한들 코 묻은 학생 돈을 받아먹을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건조비를 내겠다는 목소리는 퍽 단호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데니스는 결국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피터를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격을 가늠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데니스는 양처럼 순하기만 할 것 같은 아이가 얼마나 명확한 주관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알았다. 입맛이 썼지만 받아들 것은 받아두는 것이 이 어린 이웃과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차오른 세탁기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별다른 할 일이 없는지 나란히 대기 의자에 앉았다. 고요한 가운데 십수대의 세탁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 어색한 침묵이 민망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한참 남은 시간이 지루했는지 피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지 매번 신세만 지네요.”
피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조금 허탈하게 들리기도 했다. 어쩌다 보호자도 없이 홀로 지내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다는 건 자립심이 꽤 강하다는 뜻일 텐데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걸까. 데니스는 별 것 아니었다는 의미로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피터의 생각은 다른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쉬씨가 아니었으면 정말 곤란했을 거예요. 문고리도, 침수 비용도…”
그 말에서 데니스는 피터에게 대신 나서서 해결해줄 수 있는 보호자가 없다는 가정에 확신을 더했다.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려 코너에게 하던 버릇대로 머리칼을 헝클일 뻔했던 데니스는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마음이 쓰였지만 사연을 묻기에는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대부분의 입주민은 이웃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모를 정도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대도시에서 드물게 친분이 생긴 관계라지만, 그런 도시이니만큼 딱 지금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길 바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순해 빠진 얼굴에 비해서 영 맹탕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인상만 놓고 보면 누가 눈만 부릅떠도 움츠러들어 입을 딱 닫아버리게 생긴 주제에 의외로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았다. 데니스는 피터와의 첫 만남에서, 괜한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듯 소심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요청사항을 전달하던 올곧은 목소리를 기억했다. 데니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 드는 그런 몸짓을 잘 알았다. 릭 카버 아래에서 일하며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에게서 종종 보였던 반응이다. 그러나 피터에게는 그 사람들과 같은 두려움이나 혐오감이 없었다. 만약 그때 데니스가 양아치마냥 피터에게 불쾌감을 드러내며 위협을 가했더라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으리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오히려 숫기 없는 얼굴로―그러나 시선만큼은 당당하게―데니스를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한번 말했을 것이다. ‘실내에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머릿속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그려지는 그 모습을 상상하려니 웃음이 나와서 데니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데니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한테는 따박따박 따지지 않았어? 좀 전에 관리인한테도 그랬어야지.”
“따지다뇨.”
피터의 말꼬리가 휙 높아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꼭 놀리는 것만 같은 데니스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더니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웅얼거렸다. 아직도 젖살이 빠지지 않은 건지 동글동글한 뺨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꼭 토라지기라도 한 것 같다.
“그때 저는 당연한 규칙을 얘기한 거라구요. 하지만 침수는 제 부주의도 있었고…”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피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뜸 끼어든 데니스가 단호하게 그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직 학생인 아이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절로 한숨이 나왔다. 데니스는 피터를 보며 주관이 뚜렷한 것과 착한 것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영어 발음은 분명 뉴욕 토박이의 그것인데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정말 뉴욕 출신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험한 도시에서 저런 선한 성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피터의 강단 있는 성격과 곧은 심지를 알게 했다.
“말했잖아. 관리 부실은 전적으로 주인 책임이야.”
데니스는 흠, 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최대한 자신의 말이 아이를 향한 훈계나 어른의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어투를 조절했다.
“학교 공부로도 바쁘겠지만 혼자 살려면 세입자 권리 정도는 알아둬. 세상에는 어린 학생이라고 도와주려는 사람보다 등쳐먹으려는 놈들이 더 많아.”
“……”
가만히 데니스를 바라보던 피터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당황한 것도 같고, 말문이 막힌 것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참견이 과했나? 뒤늦게야 아차 싶어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지만 역시 누군가는 경각심을 줘야 하는 내용이다. 그래도 한창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할 나이대의 학생에게는 충분히 기분 상할 법도 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황급히 신경을 돌릴 만한 다른 화젯거리를 생각해내려는 찰나,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던 피터가 눈썹을 확 추켜 올리며 소리쳤다.
“어린 학생이라뇨?”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는 피터의 다급함을 대변하듯 한 옥타브는 족히 올라가 갈라졌다. 피터는 여전히 새된 목소리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서 데니스에게 따지듯 말했다.
“저는 이미 졸업했어요. 인턴이지만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도 하고 있다구요!”
그러자 이번에는 데니스마저도 놀라고 말았다. 졸업을 했다는 외침을 들으면서 미성년이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얼굴이 퍽 어린 편이라고만 생각하던 데니스는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졸업했다는 게 대학이라고?”
피터는 이제는 아예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는지 화도 내지 못하고 허탈하게 되물었다.
“…지금까지 절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동시에 데니스가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그는 피터의 나이를 다섯 살은 족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어쩐지, 제아무리 사연이 있다 한들 고작 고등학생이 이런 치안도 보안도 좋지 않은 낡은 아파트에서 홀로 자취를 하는 것보다는 겉모습이 어려 보일 뿐 엄연한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그럴듯하다. 왜 당연히 아이라고만 생각했지? 무안해진 얼굴을 한 손으로 덮고서 손가락 사이로 슬쩍, 심통이 난 피터를 바라보았다. 살짝 붉은 기가 도는 하얀 뺨은 말랑거릴 것 같았고 불퉁하니 힘이 들어간 아래턱은 면도 자국조차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그나마 성인이었다는 사실까지는 그럭저럭 납득하더라도, 이미 한참 전에 성인의 문턱을 넘다 못해 저 멀리 달려가 있는 20대의 나이라는 걸 여전히 믿기 힘든 얼굴이었다. 종종 피터를 보면서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는 코너의 성장을 그려보곤 했기에 더욱 그랬다. 데니스가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간결하지만 진심이 깃든 사과였다. 동글동글하니 순하게 늘어진 인상의 눈매를 한껏 추켜올리고서 항의하듯 데니스를 바라보던 피터가 바로 앉은 몸을 의자에 툭 기댔다. 피터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데니스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의 원형 뚜껑을 가만히 응시하는 피터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했다가 덩달아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세탁기에 표시된 타이머는 0에 가까워져 있었으나 세탁물을 건조하는데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문득 담배가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피터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학생으로 생각해서 도와주신 건가요?”
뜻밖의 질문을 들은 데니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말에는 자신을 아이 취급 했을 뿐이었냐는 의미가 섞여있었다. 피터를 보며 코너를 떠올렸고, 그렇기에 좀 더 시선이 간 것도 사실이라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호의를 느낀 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데니스의 심경을 대변하듯 다소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그럴 리가.”
그러자 피터는 오히려 안심한 듯 웃었다. 추켜든 눈썹이 평소처럼 부드럽게 풀리면서 아래로 내려앉자 데니스는 내심 안도했다.
“그럼 됐어요.”
때마침 돌아가던 세탁기가 멈추었다. 세탁을 끝낸 기계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자 데니스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탈수된 빨랫감을 건조기로 옮겨 담는 동안 피터는 동전 교환기에서 지폐를 바꾸고 있었다. 데니스는 피터의 옷가지를 건조기에 던져 넣으면서 터져버린 수도관에 대해 생각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세면대 쪽이었지만 좁아터진 욕실 수도는 하나의 메인 파이프를 타고 흘렀다. 덕트테이프는 당장 새는 물을 막아줄 뿐 근본적인 처치는 아니었다. 샤워 부스를 사용하다 보면 압력으로 인해 또다시 세면대가 터질 위험이 있었고 관리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데니스가 건조기 문을 닫았다. 시간을 설정하자 화면에 뜨는 금액만큼 동전을 넣고 있는 피터에게 물었다.
“수리가 끝날 때까지 욕실은 아예 못 쓰지 않아?”
“네.”
역시 관리인의 언질이 있었는지 피터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알림음과 함께 건조기가 커다란 소리로 웅웅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큰 소음에 묻힐세라 피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대중탕을 쓰려고요. 혹시 근처에 아는 곳 있으세요?”
“대중탕?”
다시 피터와 나란히 의자에 앉은 데니스가 생각에 잠겼다. 데니스의 아파트가 세탁 시설이 마련되어있지 않아 매번 코인 세탁소를 이용해야 하듯이, 차이나타운에는 매번 대중탕을 이용해야 하는 수준의 거주 시설 역시 존재했다. 무엇보다 차이나타운의 거주민 중에는 샤워 부스가 딸린 집에 살면서도 정기적으로 탕에 몸을 담가야 하는 문화권이 많기도 하니 말이다. 데니스는 머릿속으로 다섯 블록 이내의 거리에 있는 한국식 사우나와 일본식 온천, 샤워실 이용이 가능한 수영장을 떠올렸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그냥 내 방에 와서 씻지 그래?”
“네?”
가벼운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건넨 제안이었건만 피터는 그것이 아주 큰 시혜라도 된다는 양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말한 사람이 더 민망할 정도로 당황하면서 손사래를 치자 데니스가 뒷목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딱히 폐라고 할 것까지는 아닌데.”
집을 고치는 일에는 이골이 난 데니스가 보기에 어차피 금방 끝날 문제였다. 당장 내일이라도 수리 기사를 부르면 충분히 해결되겠다만, 관리인이라는 작자가 그리 빠릿빠릿하지는 않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며칠이면 충분하다. 고작 며칠 동안 아침저녁으로 욕실을 빌려주는 일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침수로 인해 망가진 물건들을 생각하면 돈이 새어나갈 구석은 최대한 틀어 막는 편이 나을 터였다. 피터가 학생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한들 똑같이 싸구려 아파트에 입주한 처지이니만큼 뻔한 지갑 사정은 변함이 없으니까.
“괜히 돈 쓰지 말고 씻으러 와.”
데니스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다만 아무리 봐도―남에게는 누구보다도 먼저 선행을 베풀게 생긴 주제에―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일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피터가 쉽게 수락하진 않을 것 같았다. 데니스는 지금까지 보아 온 피터의 성격을 되새겨 보았고, 곧 그가 거절하기 힘든 이유를 덧붙였다.
“지금까지 어린애로 생각한 걸 사과하는 의미에서 말야.”
예상대로 피터는 조금 미안한 낯을 할지언정 결국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피터는 벽지에 물 자국이 남은 방의 채 마르지 않은 카페트 위를 맴돌며 십여 분을 고민하다 마침내 목욕 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닷코비치의 아파트에서 나와 개인 욕실이 딸린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더이상 쓸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바구니 안에 바디 워시와 샴푸 통을 차곡차곡 담았다. 그러고도 몇 분을 더 망설이던 피터가 방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얇은 벽 너머로 들린 부산스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방을 오가는 분주한 발소리와 서랍을 여닫는 소리, 잡동사니를 챙기는 바스락거림 등은 외출 준비가 분명했다.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쩌면 데니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 탓에 제시간에 출근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이어졌다. 딱 한 번 만이야. 피터는 목욕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그의 호실 옆에 나란히 선 문을 두드렸다.
“왔어?”
문을 열어준 데니스는 피터의 예상대로 멀끔한 모습이었다. 피터가 망설이고있던 시간 동안 외출 준비를 끝낸 것이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곧장 출근하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피터가 들어갈 수 있도록 살짝 몸을 비켜준 데니스는 곧바로 현관 앞의 행거에서 겉옷을 챙겨입고 공구 가방을 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장에 나가려는 모습이었다. “내쉬씨?” 아무리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다지만 집주인이 없는 방에 있어도 되는 건지 당황하는 피터에게 데니스는 욕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난 지금 나가야 하니까 욕실은 알아서 쓰고. 열쇠는 현관 매트 아래에 넣어놔.”
피터는 얼떨결에 데니스가 내미는 열쇠를 받았다. 마치 폭풍이 지나가듯, 빈방에 피터를 남겨놓고 데니스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의 부산스러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피터는 손바닥 위에 열쇠를 얹은 채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이내 문 너머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마저 사라지고 닫힌 문과 열쇠를 번갈아 보다가 멍하니 비어버린 집안을 둘러보았다. 난처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피터는 열쇠를 현관 고리에 걸었다. 주인 없는 집에 남은 기분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데니스가 저를 믿어주었다는 의미이니만큼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정말 욕실만 빌려 쓰고 나가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욕실에 들어가는 대신 목욕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일어난 직후 조금도 손대지 않은 침대와 책상 의자에 걸쳐진 실내복 하며, 빈 공간을 찾아볼 수 없는 테이블까지.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만 없을 뿐, 빨래를 끝낸 옷가지를 널려놓았다가 재난을 맞아 재세탁을 해야 했던 피터에게 쓴소리를 한 것 치고 데니스의 방도 멀끔하지만은 않았다. 하긴, 혼자 살면서 하루종일 바깥일을 하는 이상 최소한의 청결을 유지하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피터가 후줄근하게 늘어진 소매를 야무지게 접어올렸다. 옆 건물의 벽을 향해 나 있는 창은 그리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환기를 시키기 위해 테라스를 활짝 열었다. 피터는 흐트러진 이부자리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했다. 피터의 방이 그렇듯 그리 넓지는 않은 방이었기에 손이 갈 만한 곳은 별로 없었지만, 좁은 공간이니만큼 조금만 흐트러져도 너저분해 보이기 마련이다. 피터는 싱크대에 들어있는 더러운 접시와 컵을 씻었고 테이블에 펼쳐진 신문을 접어 잡지와 함께 가지런히 모아놓았으며, 빨래 바구니 주변에 던져놓은 옷들을 바구니 안에 넣었다.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우고 봉투 안에 빈 맥주캔을 담아 현관에 내놓은 후, 책상 위에 놓여있는 공구를 벽면의 타공판에 걸고 굴러다니는 나사나 못 따위를 모아 공구함의 통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비질까지 하고 나니 잠깐 사이에 집안은 혼자 사는 남자의 집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치 말끔해졌다. 한번 더 집안을 둘러본 피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테라스 창을 닫았다.
제 방도 이 정도로 신경써서 정리해 본 적은 없는 것같다. 그제야 피터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목욕 바구니를 집어 들고 욕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