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3(어메이징 스파이더맨::피터) & 해리 오스본(샘레이미 스파이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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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2(샘레이미 스파이더맨::파커)
해리가 마지막 박스를 들어올렸다. 크기는 제일 컸지만 내용물은 고작해야 옷가지나 이부자리 같은 것들인지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집 안에 더 이상 운반할 박스가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파커가 대신 들겠다며 재빨리 박스의 아랫부분을 잡았다. 괜찮다는 말에도 고집스럽게 박스를 끌어 당기는 힘이 느껴져서 해리는 괜히 과장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어, 잠깐! 잠깐만!" 중심을 잃고 금방이라도 박스를 떨어트릴 것처럼 한쪽 팔을 덜컥 늘어트리자 깜짝 놀란 파커가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났다. 해리는 곧장 박스를 고쳐들고는 씩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제야 뻔한 속임수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파커의 눈썹이 조금 추켜올라갔지만 이내 덩달아 웃어버리고말았다. 해리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고서 몸을 돌렸다. 얼른 그의 뒤를 따라붙은 파커가 픽업트럭에 박스를 올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짐은 이걸로 끝이야."
"생각보다 별로 없네."
작은 픽업트럭의 뒷 공간을 절반도 채 채우지 못한 박스들을 보면서 해리가 말했다. 롤스로이스의 납작한 트렁크는 아무래도 짐을 싣기에 용이하지 않아 굳이 픽업트럭을 랜트했지만 몇 개 되지않는 박스를 보아하니 대충 뒷좌석에 쑤셔 넣었어도 되었을 성 싶었다. 해리는 잠시동안 평균보다도 낮은 소득 수준을 가지고 있는 이 외곽 동네에 고급 롤스로이스를 끌고오는 생각을 해보았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망상을 털어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낯부끄러울 만큼 유치한 짓이었다. 무엇보다, 해리가 정말로 롤스로이스를 끌고 온다면 그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은 녀석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녀석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해리는 2층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파커의 방 창문에 나란히 붙은 또 다른 창문이 있었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훌쩍 넘겨 해가 중천에 떴건만, 아직까지도 꼭꼭 커튼을 쳐놓은 방 주인은 방 밖으로 나오기는 커녕 창 밖을 내다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파커 역시 커튼으로 가려진 방 창문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둘을 배웅하기 위해 겉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온 메이에게 파커가 물었다. "피터는요?" 다소 곤란한 웃음을 지은 메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학에 합격한 파커가 그와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긴 했다지만─메이는 그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기에, 사실 피터의 일방적인 반발에 지나지 않았다.─설마하니 이사를 하는 당일에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더 이상 운반할 짐은 없었고 이제 픽업트럭에 올라 해리가 마련해 둔 대학 근처의 아파트로 이동하면 모두 끝날 일이었지만 파커는 자꾸만 2층 창문에 머무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현관에서 픽업트럭으로 가는 고작 다섯 걸음 사이에만 네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결국 한숨을 내쉰 해리가 느릿느릿 보조석에 오르려는 파커를 붙잡았다.
"내가 내려오라고 해볼게."
파커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마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큼 튀어나오는 대답이 얄미웠지만 피터를 보겠다며 직접 2층 계단을 뛰어올라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변함없는 눈매를 하고 입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은 해리가 파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해리의 입꼬리는 어느새 다시 내려가 있었다. 어쨌든 그는 파커에게 내려오도록 말해보겠다고만 했지, 잘 달래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 설득할지는 어디까지나 해리의 재량인 셈이다.
해리가 저 되바라진 녀석을 처음 본 것은 3년 전이었다. 그때만해도 피터는 파커보다도 키가 작은 덜 자란 꼬맹이였다. 형, 형, 노래를 부르면서 시종일관 파커의 꽁무니만을 졸졸 쫓아다니는 꼴이, 미들스쿨은 커녕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코흘리개나 할 법한 행동이라 우스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동으로 자라면서 형제 비슷한 관계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형제 간의 우애란 원래 저런 걸까, 막연한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해리는 그 나이가 되도록 형의 바짓가랑이를 놓지 못하는 피터에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랬던 피터를 올 초에 다시 보았다. 미들스쿨을 졸업한 피터가 그들이 다니는 하이스쿨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해리의 기억 속의 피터는 여전히 파커보다 조금 키가 작았으며, 왜소했고, 계집애 마냥 미성숙한 얼굴을 하고서 파커의 손을 붙잡고다녔다. 뭐 그 후로 2년이나 지난데다 하필 남자애들이 훌쩍 커버리는 시기의 2년이기도 하니 제법 변했겠지만 그런 외형적인 성장보다 과연 그 갓 태어난 새끼 새 같았던 녀석이 형에게서 졸업을 했을지가 제일 궁금했다. 어쩌면 언제 껌딱치처럼 굴었냐는 듯 이제는 아예 제 형을 모르는 척 하는건 아닐까 싶었더랬다. 우등생일지 언정 동급생들 사이에서는 너드 취급이나 받으며 겉도는 파커는 그 나잇대 아이들이 선망하고 동경할 법 한 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해리가 아는 대부분의 형제 관계는 사춘기가 지나면서 가족이라는게 무색할 만치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버리고는 했다.
입학식 날 다시 만난 피터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훌쩍 커버려서 파커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해리의 키마저 따라잡았고, 채 소년을 벗어나지 못해 앳된 인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애들은 참 빨리도 크는구나. 해리는 약간의 감탄을 느끼는 동시에 옛날에 그랬듯, 이번에도 파커를 발견하자마자 홀랑 달려오는 피터를 보고 저 애는 변한게 없다고 생각했다. 피터는 축하를 건네는 파커에게 활짝 웃는 얼굴로 대답하면서 자연스레 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길쭉해진 키 만큼 큼지막해진 손이 파커의 허리를 살짝 쓸어내려서 해리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피터는 한 손으로는 파커의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팔뚝을 잡고서 몸을 가까이했다. 단순히 친근한 대화를 주고받는다기에는 마치 밀회라도 즐기는 것만 같은 모양새로 파커의 귓가에 속살거리며 웃었다.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미소짓는 시선이 해리와 마주쳤다. 아, 정말인지 애들은 순식간에 커버리는구나. 마냥 어렸던 2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시선에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해리는 그런 시선을 받아본 경험이 적었다. 사실 아예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비록 사립 학교에서 퇴학당해 보잘것없는 공립 학교를 다니고 있는 신세라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부잣집 도련님인 해리를 감히 그런 표정로 보는 학생은 없었다. 그는 늘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승리자였다. 그렇기에 비웃음 또한 해리의 몫이여야 했다.
제 아무리 몸뚱이가 커져봤자 피터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고 제 형을 독차지할 수 있을 줄만 아는 어린 아이다운 사고방식은 자라지도 않는건지, 그저 가소로웠다. 해리는 보란듯이 열어놓은 피터의 방문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불룩 솟은 이불을 바라보았다. 지금 피터는 유치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파커가 자신의 모든 어리광을 받아주리라 철썩같이 믿고 있는게 틀림 없다. 해리는 문틀을 가볍게 두드려 노크 소리를 내었다. 예상대로였다. 피터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문앞에 선 사람이 파커가 아님을 확인하자마자 와락 얼굴을 구겼다. 불쾌하다는 표정은 무례하기까지 했다. 해리 역시 그런 피터를 상대로 애써 가식을 부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해리의 목소리는 파커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다.
"당분간은 오지 않을 텐데, 내려가 보는게 좋을걸?"
고양이마냥 해리로부터 경계를 거두지 않고서 다른 사람을 찾듯 눈을 굴리는 것을 보고 해리가 말했다. 피터는 그 말을 무시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해리의 등 뒤에서 기다리는 얼굴이 나타나지를 않자 이번에는 그를 잡아먹을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다 당신 때문이야." 악문 입술 사이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리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만약 파커가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제딴에는 위협적으로 말한 것일런지도 모르겠지만 해리는 보란듯이 콧웃음을 쳤다.
"이봐, 꼬맹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학년 초, 피터는 정말로 끈질기게도 굴었다. 그는 마침내 파커의 모든 하루 일과에 관여할 수 있게 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휘둘렀다. 점심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서클 활동때도 그랬다. 마치 지금껏 해리에게 빼앗겨왔던 파커의 교내 활동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처럼, 고작 클래스 메이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건방지기 짝이없는 눈빛을 하고서 해리와 파커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해리 오스본에게 있어서 그 꼴을 1년이나 봐준 것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였다. 그 피터 파커의 동생이 아니라 흔하게 주변을 굴러다니는 학생 중 하나였다면 어림도 없었으리라. 해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치 다시 재회한 그 날 피터가 저를 바라보던 그 눈으로 이번에는 해리가 피터를 바라보았다.
"대학에 갔어도 사랑하는 동생 곁에 딱 붙어서 네가 해달라는대로 다 해줘야하는데, 그러지 않는게 다 내가 꼬드겨서 그런 것 같아?"
해리는 짐짓 부드럽고도 애정어린 이름으로 피터를 불렀다.
"응? 앤디."
"그렇게 부르지 마."
마치 파커를 흉내내듯 차분하게 달래려는 목소리에 피터가 몸서리를 쳤다. 물론 해리 역시 상냥하게 굴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으므로, 잠시 동안 떠올랐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두 피터 파커는 오직 서로에게만 통용되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고 평생을 함께 자라온 형제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로의 완벽한 이해자였다. 해리가 함께 있을때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제시켜버리는 대화법은 피터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피터는 자신과 파커의 관계가 마치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인 양 굴었지만 안타깝게도, 해리는 그것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착각하나본데. 집을 나가고싶으니 도와달라고 한건 피터였어."
피터의 아랫입술이 잇사이로 짓눌리자 해리는 노골적인 냉소를 담아 웃었다. 한 해 동안 일방적인 시비나 다름없는 피터의 모든 행동을 묵인해준 이유였으며 오히려 그의 철없고도 순진한 사랑을 내심 불쌍하게 여긴 이유이기도 했다. 해리에게는 딱히 견제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피터의 생각과는 달리 해리는 유치한 질투나 소모적인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 해리가 한 일은 그저 단 한 가지, 파커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것 만으로도 해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에 충분했다. 파커의 독립은 자신의 동생이 품은 감정의 정체을 알게 된 파커가 스스로 내린 결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게 선을 지켰어야지. 넌 그냥 동생일 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