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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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해리가 이상하다. 메시지함을 가득 채운 대화들을 꽤 이전부터 최근까지 죽 흩어본 끝에 피터가 내린 결론이었다. 주고받는 말들은 여간해서는 다섯 마디를 넘어가지 못했고, 메시지를 전송한 후 답장이 오기까지 몇 시간씩 걸리는건 예삿일이었으며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쪽은 늘 피터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들 사이의 모든 대화는 피터가 제안하고 해리가 거절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심비오트에게 찔린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동안 회사일이 쌓였다는건 알았지만 설마 하니 퇴원 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할 줄은 몰랐다.

노먼의 죽음 이후 해리가 회장 자리를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오스코프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각자의 생활로 바빠진 와중에도 기꺼이 서로를 위한 시간을 내어주던 둘이었다. 가끔식 만나 서로의 근황을 물었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나마도 피터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해리는 학창 시절 때 마냥 매일같이 피터를 불러냈을지도 모른다. 정작 본인은 까맣게 잊어버린 피터의 생일까지도 챙겨주었던 해리가 아니던가. 해리와의 사이가 이토록 소원해진 것은 그가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알게 된 직후, 의도적으로 피터를 피할 때뿐이었다. 어쩌면 그대로 영영 끝나버릴 뻔했던 관계였다. 피터는 하나뿐인 절친과의 관계를 옛날처럼 되돌리고 싶었고, 서로를 도와 함께 싸우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메시지를 통해 보이는 해리의 태도는 그저 피터를 향했던 분노와 증오만이 사라졌을 뿐 도무지 '이전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만약 그 이유가 아직 해리에게 일말의 앙금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면 피터에게는 그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역시 제때 답장을 주지 않는 해리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오스코프에 찾아온 이유였다. ‘오늘은 시간 좀 돼?’ 아침 일찍 해리에게 보낸 메시지였으나 정작 그는 정오가 다 되도록 묵묵부답이다. 설령 답장이 온다 한들 피터는 해리가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미안, 너무 바빠.

해리를 만나기 위해 오스코프까지 찾아오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사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없다고 해도 좋았다. 피터가 처음으로 오스코프에 왔던 것도, 마지막으로 왔던 것도, 해리가 그를 노먼을 죽인 살인자라고 여기고 있을 때였다. 병원에서 피터를 향해 예전처럼 미소짓는 해리를 마주하고 이제 다시 오스코프에 올 일은 없으리라 여겼거늘, 그때의 화해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동안 매일같이 안내데스크 주변을 서성이며 해리를 기다렸던 전적 탓에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데스크 직원은 곧바로 피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피터 역시 저를 향한 데스크 담당자의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피터는 이번에도 데스크 담당자에게 부탁했다.

"해리에게 제가 왔다고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무시로만 일관하는 해리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되리라 생각했는지 인터폰을 누르는 그의 표정에는 벌써부터 동정심이 가득했다. 이번에는 다르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제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만나기도 어려운 사람이 되려는 걸까? 해리에게 그저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던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해리는 직접 찾아온 피터를 내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제야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물론 이전처럼 차가운 문전박대를 당하리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동안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보건대 점잖게 돌려보내질 가능성도 염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이번에는 축객령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것에 안도하며 피터에게 출입증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들고 임원 전용의 직통 엘리베이터로 가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피터에게는 생소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피터는 해리의 삶에 대해 크게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롤스로이스를 타고 등교하던 친우는 차에서 내려 교문 앞의 피터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나면 거대 기업의 후계자나 재벌집 도련님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어버리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으려니, 지금의 해리는 뉴욕 한복판에 자리 잡은 빌딩의 최상층에서 군림하는 기업 회장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피터는 비록 위축되지는 않았지만 낯설음을 느꼈다. 분명 데스크에서 허락을 받았음에도 바로 해리를 만나기는커녕 비서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 상황이 말이다. 그녀는 제일 먼저 선약을 했었는지 물었고 아니라고 대답하자 자신의 수첩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적어도 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서야 해요." 피터는 차마 자신이 와있다는 걸 아는 게 맞기나 한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치 해리가 까마득히 먼 사람같다. 상류층의 파티장에 초대객으로서 입장한 모습을 보았을 때도, 유명 과학자와의 연결고리를 손쉽게 만들어 주었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마치 와서는 안될 곳에 온 불청객이 된 것만 같아서 비서가 가져다준 차 한 모금, 쿠키 한 조각조차 먹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해리와 만나는 것뿐인데 이토록 불편해지기란 처음이었다.

해리가 간신히 피터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건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두 바퀴째에 접어들 때쯤이었다. 마치 시간에 쫓기는 것만 같은 빠른 발소리가 들리고 응접실 문이 박차듯 열렸다. 피터를 발견한 해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미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해리는 테이블 쪽으로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로 대기 중이던 비서가 재빨리 건넨 서류를 읽어봐야 했다. 피터를 향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서류를 읽는 해리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비록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또 다른 업무를 의미한다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비서를 물린 해리가 피터에게로 몸을 돌렸지만 짧은 한숨을 내쉴 뿐, 예상대로 소파에는 앉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미안. 보다시피 지금 좀 바빠. 무슨 일인데?"

최소한의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곧바로 용건을 묻는 태도는 지금껏 해리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저 오랜만에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해리가 몸을 돌려 나가 버리는 것을 막지 못하리라. 피터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해리는 맥이 풀린 듯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웬일로 손수 걸음까지 해줬길래,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결코 비아냥 따위가 아닌,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농담 혹은 감탄일 뿐이었다. 피터도 그걸 알았지만─그리고 해리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법한 생각이었지만그럼에도 왠지 못된 아쉬움이 고개를 쳐들어 삐죽 쏘아붙이고야 말았다.

"그야 네가 날 계속 무시하니까 그렇지."

유쾌하게 올라갔던 해리의 입꼬리가 도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어린아이의 심술같은 소리를 해놓고 스스로도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먼저 해리를 찾은 적이라고는 없는 주제에, 적반하장 같은 소리였다. 해리의 침묵이 어떤 의미일지 상상하니 목이 타는 것 같아 일찌감치 식어버린 찻잔을 들이켰다. 피터가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긴 침묵이라고 생각될 때쯤, 말이 없던 해리가 비서에게 손짓을 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피터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비서를 내보낸 해리가 당황과 난처함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터."

그는 피터의 맞은편에 앉아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한 진중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변하지 않는건 없어. 게다가 우리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변할 수밖에 없지."

"…그건 아직도 내가 밉다는 뜻이야?"
"그 반대야."

피터가 불안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묻자 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너를 완전히 용서했고, 그건 우리가 서로에게 소중하다는 걸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피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는 그들이 친구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 특별한 행동이나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설령 매번 함께 다이너를 가고, 영화를 보고, 별 의미도 없는 잡담 따위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일부러 널 피할리가 없잖아. 단지 너도, 나도 각자 생활이 있으니까 예전처럼 시간을 쓰기 어려웠을 뿐이지. 피터, 언제까지고 학생 때 같을 수는 없어."
"미안해. 네가 바쁘다는걸 알고 있는데…"

피터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더듬거렸다. 여전히 야속함은 남아있었지만─아무리 그래도 매번 약속을 취소해야 했을 정도야?해리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애써 투정을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생각해 보면 피터라고 해서 늘 해리가 우선순위에 있지는 않았다.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조차도 그랬다. 해리의 말마따나 친구와 어울리는 것 외에 피터에게는 무수히 많은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중에서 해리와의 관계가 항상 최상단에 있기는 힘들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늘 해리가 옆에 있어주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꺼내기에는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피터가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자 씩 웃은 해리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

해리는 힘없이 늘어진 피터의 어깨를 붙잡아 두드려 주었다. 이전부터 피터에게 어려운 일이 있거나 상심하고 있을 때면 그를 북돋아주던 행동이었지만 그조차도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지금 진행 중인 사업만 끝나면 바로 연락할 테니까."

어쩐지 형식적으로 느껴지는 약속을 끝으로 시간을 확인한 해리가 애써 조급한 기색을 숨기며 일어났다. 길어봤자 5분 남짓의 대화였으나 피터에게 할애한 고작 그 5분의 시간조차 아쉬운 듯, 여유가 없어 보여서 차마 벌써 가야 하냐는 질문은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해리를 기다리면서 점심 때도 훌쩍 지나버려 식사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려웠다. 

해리의 발소리에서 대화가 끝났음을 짐작했는지 채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비서가 먼저 문을 열었다. 해리는 곧장 스케줄을 읊으려는 비서의 말을 가로막고, 응접실을 나서기 직전 피터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모처럼 왔으니 좀 쉬다 가. 그 쿠키, 꽤 맛있거든."

피터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쿠키가 담긴 접시와 아무것도 마주 놓이지 않은 맞은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도저히 손댈 기분은 들지 않았다.


피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해리는 실제로도 바빴다. 어느 정도냐면,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피터와의 약속이 취소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했을 만큼 바빴다. 예전 같았으면 일부 일정에 펑크를 내서라도 피터와의 만남을 챙겼을 해리였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터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피터의 방문은 해리로서도 놀랄 만큼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뀌는건 없었다. 피터가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에도 해리의 스케줄은 분 단위로 짜여져 있었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만큼 계속해서 딜레이 되었다. 물론 몇 가지 문제들을 감수한다면─어쩌면피터와 간소하게나마 때늦은 식사를 할 시간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해리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 이전과 다를 뿐이다.

병원에서 눈을 뜬 해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집착으로 결핍을 채우려는 짓은 그만둬야겠다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깨달아야 했던 당연한 사실을 이제사 인정할 수 있었던건 죽음의 문턱을 밟은 자의 체념이었을까. 혹은 마지막 순간에 보인 피터의 눈물이 마침내 해리의 메마르기만 하던 갈증을 조금이나마 적셔준 덕분일까. 피터에게 투영했던 애정만큼나 큰 배신감과 증오를 거치고 나서야 해리는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질만한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늘 해리를 괴롭히던 노먼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피터를 향한 애착은 노먼에게 인정받지 못한 반작용이기도 했으니까.

해리는 지금과 같은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훨씬 편했다. 피터의 방문으로 놀라긴 했지만 특별히 의미를 둘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의외였다는건 사실이지만 그런 일을 겪은 사이니만큼 천하의 피터 파커도 해리의 변화가 신경이 쓰였을 법도 하다. 그래 봤자 잠시 뿐, 곧 무심하고 둔하고 눈치 없는 원래의 피터로 돌아가겠지만 말이다. 해리는 더 이상 그 사실이 그리 유감스럽지 않은 스스로가 만족스러웠다.

협력사의 초대로 이루어진 저녁 만찬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해리는 오늘 하루 동안 처음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핸드폰은 늘 무음으로 처리되어 도착한 메시지를 제때 전달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어차피 오스코프와 관련된 모든 스케줄과 연락은 비서를 거치고 있으니 직접 핸드폰을 들여다볼 일은 거의 없었다. 해리의 개인 직통 연락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그중에서 정말로 직통 번호를 통해 연락을 취할만한 사람은 사실 피터 한 명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리가 핸드폰을 보는 때 역시 일과 중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피터는 명확한 용건이 있는게 아닌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편이었고 이미 낮에 한 번 얼굴을 보았으니 오늘은 더 연락할 일이 없으리라 여겼다. 그럼에도 마침 여유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열어본 핸드폰 액정에는 뜻밖에도 피터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약간의 헛웃음을 머금고, 오늘은 참 별난 날이라고 생각하며 메시지를 열어본 해리의 입매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고작 몇 분 전에 온 메시지였다. 그전에도, 그 후로도 어떠한 맥락도 없이 그저 그 한 마디가 도착해 있었다. 피터는 절대 이런 말을 쉽게, 아무런 의미 없이 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왜 이걸 이제야 본거지? 해리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기사에게 목적지를 바꿀 것을 지시했다. 피터의 집은 지금 향하고 있는 만찬회장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갑작스러운 해리의 행동에 기사는 퍽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비서의 차량을 힐끔거렸으나 해리가 재차 윽박지르자 결국 운전대를 돌렸다. 여전히 피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해리가 잇사이로 말려들어간 입술을 초조하게 매만졌다. 만약 집이 아니면 어쩌지? 어쩌면 샌드맨 때 그랬듯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날, 무력한 몰골로 철골에 묶여있던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순식간에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뉴스 좀 틀어봐요."

라디오 소리와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지만 발신자는 피터가 아니었다. 해리는 행여 스파이더맨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오지는 않는지 라디오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행선지를 바꾼 해리를 다그치는 비서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피터에게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빨리 끓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해리의 머릿속에는 회사의 일이나, 그것일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릴 경우 짊어질게 될 리스크 따위를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급한 일이에요, 펠리시아. 어쨌든 난 못 가니까 만찬 건은 당신이 잘 처리해봐요."

대체 왜 다시 이러는 건데요! 비명과도 같은 그녀의 외침을 뒤로하고 통화를 끝냈다. 심장박동은 여전히 걱정과 불안감으로 요동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든 피터와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리저리 일정을 바꿔대던 때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영문 모를 문자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과민하게 구는 걸까? 정작 뉴스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이 조용하기만 한데도 말이다. 그러나 해리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리가 원한 것은 그저 기울어진 관계의 수평이었다. 피터를 잃을지도 모르는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전화를 받지 않는 피터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도 그의 아파트 앞에 도착하는 동안 세 번을 더 전화했지만 여전히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해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단숨에 맨 꼭대기 층의 방까지 뛰어 올라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뉴욕에서 사건이 벌어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있어야 할 텐데. 해리는 잠가지지도 않는 망가진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다행히 피터는 그곳에 있었다. 양쪽 무릎을 모으고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에 등을 기댄 채로. 해리는 이곳에 오는 내내 상상했던 두려움과는 달리 피터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인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문을 닫고 그 좁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 고작 두 걸음만에 텅 빈 맥주캔이 발에 치여 굴러갔다.

"…해리?"

멍하니 고개를 든 피터는 해리를 발견하고 속도 없이 웃었다.

"이번에는 왔구나."
"지금 날 부르려고 그런 문자를 보낸 거야?"

해리는 제대로 된 음주 한 번 해본 적이 없을 피터가 도대체 몇 캔의 맥주를 마신 건지 굴러다니는 캔의 개수를 세보았다. 해리가 즐겨 마시고는 하는 값비싼 와인이나 위스키에 비하면 보잘것없다지만 샴페인 한 잔 마실 줄 모르는 피터다. 고작 술주정 하나에 놀라 중요한 일정까지 펑크내고 헐레벌떡 뛰어온 꼴을 생각하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피터는 조금 의기소침한듯 무릎을 더욱 바짝 당겨 안으며 평소보다도 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네가 날 보러 와주지 않으니까…"
"…그 얘기는 끝난 거 아니었어?"

힐끔, 눈을 추켜들고 해리를 바라본 피터가 샐쭉하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네가 나한테 관심 가져주고 신경 써 주는게 좋았는데. 이제는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잖아."

해리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시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힘없이 웅크린 어깨가 꼭 상처라도 받은 것만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피터 파커가 말이다. 해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피터의 곁에 주저앉았다.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자 순순히 몸을 기대 오는 피터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다시 예전처럼 굴었으면 좋겠어?"
"……응."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피터가 대답했다. 해리의 입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다시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메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피터에게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이건 그저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은 피터의 단순한 변덕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해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겪어야 했던 일련의 사건이 해리로 하여금 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면, 그 모든 것을 함께한 피터도 전과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피터에게로 몸을 돌린 해리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잘 들어, 피터."

멍하니 흐려진 눈을 깜박이면서도 애써 시선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피터의 양 뺨을 잡고 행여 잊을세라, 한 글자 한 글자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업가야. 대가 없는 관계에 헌신할 수는 없어."
"그럼 난 너한테 뭘 주면 돼?"

여전히 피터의 뺨은 뜨거웠고 반쯤 내리감은 눈에는 눈꺼풀이 도톰하게 도드라졌지만 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 해리가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그런건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해리가 피터에게 바랐단 단 하나를 제외하면 그는 모든 면에서 피터보다 부유했으므로. 그렇기에 피터에게 답할 수 있는 말도 하나뿐이었다.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러나 해리는 대답 대신 발갛게 열이 오른 피터의 뺨을 매만졌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보들거리는 귓불을 주물렀다.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턱을 붙잡은 손이 피터의 고개를 살짝 추켜 올리고, 엄지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당황한듯 멍하니 벌어진 입술을 옴질거리면서도 피터는 해리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온 갈색의 눈동자가 탁해진 청색의 유리구슬 안에 담겼다.

입술은 채 닿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버리고, 그 대신 피터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게 정말로 피터의 주정이나 찰나의 변덕이 아니라고 한다면 해리는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취했어, 너. 일단 좀 자."

"아… 안 졸린, 데에……"

 

정신을 차려보려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면서도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들어 올리자 마지못해 끌려 올려왔다. 다정한 손길이 등을 토닥이며 재촉하자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결국 꼼질꼼질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내일이 되었을 때 피터는 일련의 대화들을 전부 기억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혹은 기억하더라도 자신이 실수를 했다며 무마하려 들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아쉬울건 없었다. 해리 역시 오늘 일을 잊으면 그만이다. 미련을 털어낸 여유로움은 해리로 하여금 관계의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피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 해리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전 일정을 통으로 비운다고 통보하니 아니나 다를까, 적잖은 성화로 귀가 아플 지경이다.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비서에게 있어 상사의 일방적인 일탈은 청천벽력과도 같겠지만 해리는 그녀의 하소연을 외면했다. 애당초 펠리시아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해리가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그를 도우면서, 마음대로 일정을 주물러도 충분히 감당해 내었다. 회사 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피터를 만날 수 있었던건 전부 그녀의 수완 좋은 대처 능력 덕분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해리는 진작에 비서를 갈아 치웠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야말로 펠리시아의 가장 큰 업무였다고 할 수 있었다. 결국 해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인정했는지 그녀가 긴 한숨과 함께 물었다. 왜 갑자기 그 못된 버릇이 되돌아온 거예요? 통화를 하면서 방바닥에 널브러진 캔을 정리하던 해리가 문득 행동을 멈추고 잠든 피터를 돌아보았다. 과연 내일 아침에 어떤 변화가 생길런지, 웃음이 나왔다. 글쎄요. 해리가 대답했다. 

 

"한 번만 기회를 줘보려구요." 


오랜만에 어릴 적의 꿈을 꾸었다.

 

피터는 담장 너머에서 또래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만보고 있었다. 본래도 숫기가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라지만 부모님을 잃어 파커 부부에게 맡겨진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피터는 그들에게 다가가는 대신 집안으로 들어갔고, 제 방 침대에 앉아 만화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때부터 피터는 늘 혼자였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부모님이 있는 아이들의 틈바구니에 어울릴 용기가 없었고, 그렇게 자라고 나니 친구를 사귀는 법을 몰랐고, 그대로 시간이 지나자 그냥 그게 익숙해졌다. 습관이란 관성과도 같아서 혼자 식당에 가는 것도, 혼자 공부나 과제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재미있는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굳이 그것을 공유할 상대의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 동안 내심 외로워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관성 때문이 아닌 해리의 존재 덕분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세 알아차린다고들 하던가. 다시 제 옆자리가 비어버리고 나서야 피터는 해리를 만나기 전의 자신이 외로웠음을 깨달았다.

 

피터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처음 겪는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었다. 피터는 숙취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기호 식품에 지나지 않는 술을 굳이 사 마실 만한 여유는 없었을뿐더러 더욱이 유흥을 즐기지도 않았다.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알코올의 기능 탓인지 스파이더맨이 된 후로는 본능적인 거부감까지 더해져서 피터에게 숙취란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덕분에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숙취라는게 어떤 건지 알았다. 깨질 듯한 두통과 멀미 같은 메슥거림을 동반한 생소한 감각은 피터가 지금껏 느껴본 그 어떤 고통과도 달랐다. 이런게 바로 숙취구나. 피터는 어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무겁게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안을 보아하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 분명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이었으니, 어느새 제법 시간이 지난 셈이다.

 

처음 가져본 음주에 대한 충동으로 맥주를 잔뜩 사 와서 별다른 음식도 없이 위장에 쑤셔 넣은 일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흐릿하다. 피터는 두통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면서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금세 난잡해지고 마는 좁디좁은 바닥은 음주의 현장 치고는 지나치게 말끔했다. 여전히 기억은 희미했지만 의구심을 가질 것도 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해리가 왔었구나! 피터는 그로 하여금 술을 입에 대게 만들었던 우울감과는 정 반대의 기분을 느꼈다. 반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얼른 침대를 내려오려던 피터는 그러나, 금세 다시 울적해져서 이불을 끌어올리고 말았다. 해리가 왔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가 돌아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한 사람이 사라진 자리는 마냥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때보다도 더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피터는 해리가 덮어주었을 것이 분명한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가 협탁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열어보았건만 휴대전화 화면에는 별다른 메시지가 없었다. 피터는 순전히 충동으로만 숫자 패드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머릿속에는 반사적으로 떠오른 해리를 향한 투정과도 같은 말들이 한가득이었다. 왜 그냥 가버렸어? 내 옆에 있어줄 수는 없었어? 또 가버릴 거면 왜 온 거야? 그러나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비이성적인 울분은 「피터?」 전화 너머로도 생생하게 느껴질만치 피곤해 젖은 해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부끄러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제야 피터는 지금이 이른 새벽이라는 것, 일과 중의 해리는 제대로 쉬지도 못할 만치 바쁘다는 것을 상기했다. 맙소사, 머리통을 절여놓은 알코올이 덜 빠지기라도 한 걸까. 「피터, 무슨 일이야?」 졸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걱정과 의아스러움을 담은 목소리가 피터에게는 마치 질책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해리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끊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이기적이었던가. 피터는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다가 간신히 속삭이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전화 너머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피터는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기라도 한것마냥 화끈거리는 뺨을 감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연인도 아닌 단순한 친구를 상대로 내뱉기에는 부적절한 소리였다. 특히나 이런 시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침묵뿐이 느낄 수 없는 전화선만으로는 해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기 어려웠다. 다행히 귀찮거나 짜증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지만 해도 뜨기 전에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에서 들려오는 술주정 같은 소리가 달가울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해리는 피터에게 핀잔이나 타박을 내뱉는 대신 물었다.

 

「어제 일은 기억나?」

"어?"

 

피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이제서야 아주 새삼스러운 의문이 떠올랐다. 해리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던 거지? 피터에게는 홀로 청승맞은 음주를 시작한 기억이 전부였다. 해리에게 따로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해리와 미리 약속이 되어있던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근래에는 연락을 한들 잘 받지도 않던 해리였거늘, 낮에 짧게나마 얼굴을 본 이상 해리가 피터를 찾아올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동시에 피터는 잠에서 깨었을 때 보였던 해리의 흔적을 왜 아무런 의문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지 역시 깨달았다. 그건 피터에게 있어서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설령 약속이 없어도, 피터가 그를 굳이 불러내려 하지 않아도 해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나 피터의 곁에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할 리가 없는데도.

 

「갑자기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서 네가 위험한 줄 알았다고.」

 

해리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피터는 한심하게도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은 어제에 은밀한 기쁨을 느꼈다가, 해리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실망했고, 그런 스스로에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해리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와 도움을 받아왔는지 알게 된 주제에 마음속 한편으로는 여전히 옛날처럼 먼저 저를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미안해. 나는 그냥…"

 

게다가 해리를 불러낸답시고 보낸 메시지라는 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고 나니 부끄러움은 더욱 커졌다. 낮에도 그런 식으로 무작정 찾아가서 곤란하게 만들고, 이제 더는 앙금이 남아있지 않다는 확언까지 들어놓고도 왜 해리로 하여금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찾아오도록 만들었는지 이유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피터는 그만 말꼬리를 흘리고 말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피터는 생소한 기분에 휩싸였다. 생각해 보면 피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리를 상대로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유는 언제든 있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아도 해리가 늘 곁에 있어줘서. 그 말을 하기에는 차마 해리에게 면목이 없어서. 그 말을 하고도 해리가 외면할까 겁이 나서. 그렇게 언어로 흘러나오지 못한 한 마디를 감추기만 하다 보니 감정마저 숨어버렸던 것이리라.

 

그러나 해리를 만나지 못했던 기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은 피터 자신도 미처 보지 못했던 감정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피터는 어제 저녁 자신이 해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건 도와줘 따위가 아니라, 술김에도 미처 내뱉지 못한 본심이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

 

피터는 애써 긴장을 감추려는 듯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령이라는 단어가 있듯 말에는 힘이 있어서, 한 번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감정은 더욱 선명해졌다. 피터는 해리를 만나고 싶었다. 잠든 사이 찾아와 술에 취한 저를 챙겨주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피터는 단순히 챙김 받는 것이 아니라 해리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며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눈을 떴는데, 네가 있었던게 분명한데 안 보이잖아. 그래서 전화했어. 네가 없으니까 보고 싶어서…"

 

또다시 해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피터를 달래듯 부드러웠고 또 약간은 그를 놀리듯 짓궂기도 했다. 피터는 문득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매일 해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마주했던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억 속의 해리는 꼭 지금과 같은 목소리로 웃었다. 분명 전화 너머의 표정마저도 저를 바라보던 그때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전화 너머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이따가 같이 점심 먹을래?"

 

머리를 거치지 않고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은 그만큼 조급했고, 꼭 잘못 연주한 악기 마냥 새된 소리를 내며 끝을 맺었다. 한 옥타브 정도를 치솟아 갈라진 목소리가 피터의 긴장감을 적나라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글쎄. 피터는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마저 흐르는 손으로 전화기를 힘껏 붙잡은 채 해리의 대답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글쎄, 오늘도 하루종일 바쁠 거야.

 

한껏 고조되려던 기분이 심장과 함께 뚝 떨어졌다. 해리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늘 들었던 거절의 말이었지만 텍스트가 아닌 목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 피터의 실망감 역시, 문자와는 달리 전화로는 도저히 숨기기가 어려웠다. 피터는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까스로 꾹 깨문 입술을 열었다. "…괜찮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미 메어버린 목으로는 꼭 억지로 쥐어짜는 것만 같은 우스꽝스러운 소리밖에 낼 수가 없었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기류가 전화로도 숨겨지지 않았는지 갑자기 해리가 덧붙였다.

 

음. 지금 잠깐이라면 괜찮을지도.

 

피터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해리가 이어 말했다.

 

바로 올 수 있겠어?

 

피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가, 마치 해리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허둥거리는 대답은 행여 말을 번복하기라도 할 세라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가, 갈게!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게!"

 

어깨와 귀 사이에 전화기를 끼운 채 당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용건은 전부 끝났다는 듯,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지만 피터는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해리와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보내려면 빠르게 움직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깨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 전화를 허겁지겁 주워 들고서야 통화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피터는 전화를 흐트러진 침대 위에 대충 집어던졌다. 행여 몸에 술냄새가 남아있는 건 아닐까 양 팔뚝에 고개를 박고 킁킁거리더니 씻기 위해 방 문을 열어젖혔다. 닷코비치씨조차 아직 일어나지 않은 덕분인지 욕실이 비어있어 천만다행이다. 지금 피터에게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그 새 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숙취 때문에 피곤해 보이지는 않겠지? 옷은 뭘 입어야 하지? 어떤 대화를 해야 나와 있는 시간을 좋아해 줄까?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떠오른 고민은 하나같이 해리를 상대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걱정 뿐이었지만 피터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 자리에 해리가 있었다면 데이트를 앞둔 소녀 마냥 발갛게 상기된 피터의 양 뺨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