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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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답답한 넥타이를 끌어내리고 자켓을 벗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불꺼진 집안의 분위기는 새벽의 밤거리보다도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해리는 거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층계를 올랐다. 스파이더맨의 활동 시간은 대기업 회장인 해리보다도 들쭉날쭉할 뿐만 아니라 가끔은 오히려 더 바쁜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그런 피터라도 지금 시간이라면 집에 돌아와 있어야 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 위치한 피터의 방문 틈새로부터 불빛이 새어나왔다. 오늘도 현관을 거치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바로 방에 들어왔나보다. "피터?" 가볍게 방문을 두드린 해리는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은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새벽 공기로 인해 서늘했다. 집사에게도 피터의 방 만큼은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지시를 해놓은 탓에 늘 너저분한 방에는 오늘도 변함없이 스파이더맨 수트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있었다. 해리는 벗은 자켓을 그 옆에 대충 던져놓고 창문을 닫았다. 소음은 물론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살짝 열린 욕실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들여다본 욕실에서는 그 안을 가득 채운 더운 수증기에 둘러쌓인 피터가 욕조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직 물이 거의 식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몸을 담근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피터 역시 밤을 훌쩍 넘긴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는 뜻이니 그에게도 오늘은 유난히 더 피곤한 하루였을 것이 틀림 없다. 천장에 매달린 채 차가워진 물방울이 피터의 뺨 위로 떨어졌지만 그는 아주 약간 눈썹을 움찔거릴 뿐,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노곤노곤한 몸을 늘어트린 피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가 꾸벅거리더니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만 같아 얼른 뺨을 받쳐주었다.

제 아무리 피터의 방은 접근 불가 지역이라지만 사용인들도 오가는 집 안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 만치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그만큼 이 집을 편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의미인것 같아 제법 기분이 좋아졌으나 잠시 뿐, 금세 해리의 미간에 옅은 세로줄이 패였다. 미동도 없는 몸을 흩어보던 시선이 허리춤에 닿았다. 피터의 허리를 길게 가로지른 상처를 발견하기 무섭게 입꼬리가 내려갔다. 일찌감치 피가 멎어 아물기만을 기다리고있는 상처는 얼핏 보기에는 생긴지 며칠은 지났을 것처럼 보였으나 분명 오늘 아침만 해도 없던 상처였다. 피터의 빠른 회복력을 고려한다면 고작 몇시간 전의 상처였을 것이 뻔하다. 해리는 지금은 별 것 아니게 느껴지는 그 상처가 생겼을 순간을 상상했다. 긴 자상을 만들어낸 날카로운 날붙이는 어쩌면 더 깊게 파고들어 내장을 찢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심장을 노리고 더 위쪽을 베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더 운이 없었다면 몸의 정중앙을 찔러 들어와 완전히 관통했을 수도 있다. 

욕조의 가장자리를 움켜쥔 해리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습기에 취약할 터인 가죽 구두가 물속에 잠겼다. 빳빳하게 관리된 양복의 질 좋은 옷감이 물에 젖어 묵직하게 늘어졌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출렁거리던 수면이 욕조 밖으로 쏟아지면서 하얀 셔츠를 적혔다. 투명해진 셔츠가 맨 몸을 비치며 피부에 달라붙었지만 그런건 지금 신경쓸 것이 아니었다. 넘쳐버린 물만큼 수면이 낮아지면서 밖으로 드러난 몸이 한기를 느꼈는지 피터가 어깨를 움츠렸다. 해리는 작게 웅얼거릴지 언정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는 피터의 젖은 몸에 다가갔고, 착 가라앉은 뒷머리를 감싸며 마주 안았다. 입술을 겹치는 동시에 해리가 허리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입술은 어느때보다도 부드러웠다. 해리는 힘없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미끄러트리면서 허리를 매만지는 손에 천천히 힘을 실었다. 피터의 몸이 미약하게 움찔거리며 수면이 흔들렸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자각했는지 옅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반응하기 시작하더니 떨리는 손이 해리의 옷깃을 붙잡았다. 재차 입을 벌린 해리가 피터의 입술을 깨물더니 손으로는 지그시 상처를 짓눌렀다.

"흐윽…!"

마침내 정신을 차린 피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머리칼을 움켜쥔 손아귀는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상처를 짓누르는 아픔과 혀를 빨아당기는 질척임 중에 정확히 무엇이 피터를 잠에서 깨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피터는 살이 베인 상처로부터 전해지는 날카로운 고통과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 호흡으로 인해 버둥거리다가 결국 해리를 마주 안듯 매달렸다. 애처로운 몸뚱이의 떨림을 느꼈는지 해리는 상처에서 손을 거두는 대신 피터의 양 뺨을 붙잡았다.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피터가 숨을 들이쉬기 무섭게 다시 겹치면서 헐떡이는 입술에 인공호흡을 하는 양 숨을 불어넣었다. "해리." 달뜬 부름은 순식간에 입 안으로 먹혀들어가 사라졌다.

"흐으, 응하아"

버거운 목울림을 동반한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피터는 계속해서 몸을 바르작거리며 해리의 젖은 셔츠를 구기듯 움켜 쥐었다. 필사적인 것마냥 해리를 부둥켜 안은 키스는, 그러나, 오직 해리만이 안달을 내며 더욱 더 피터에게로 파고들었다. 피터의 등이 젖혀질 곳도 없이 욕조 벽에 가로막히자 해리와 완전히 밀착되었고 그는 피터가 제대로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재차 벌어진 입술을 겹쳤다. 피터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기라고는 오로지 해리의 열 오른 날숨 뿐이었다.

점차 호흡이 짧아지며 피터의 가슴팍이 빠르게 들썩거렸다. 주변을 감싼 더운 수증기는 조금도 식지 않고 피터가 급한 숨을 들이킬 때마다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뱃속으로 무겁게 내려앉는 열기에도 불구하고 머리통이 어질거렸으나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져서 피부에 흐르는 물방울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혀를 감아 올리며 입천장을 문지르는 키스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피터의 뺨을 붙잡고 귓가를 간질이는 손길은 한층 농밀해졌다.

해리는 피터의 붉어진 귓불을 주무르다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놀란 몸이 흠칫 튀어오르자 찰박이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움켜쥐듯, 목덜미를 감싸는 것같던 손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움츠린 등줄기에 선명히 튀어나온 척추 마디마디를 더듬듯 그 굴곡을 느릿하게 매만지며 미끄러져 내려간 손이 다시금 허리춤에 닿았다. 아물어가는 상처의 단면이 손가락에 닿는 감각은, 매끄럽기만 했던 피부와는 달리 거칠기 짝이 없다. 해리는 그제야 입술을 떼었고 피터에게서 몸을 물리며 허리를 길게 가로지른 상처를 시작점에서 끝점까지 따라 덧그렸다. 그러자 마치 그제야 제 몸에 난 상처를 자각하기라도 했는지, 피터가 "아." 난처함을 담은 짧은 탄성을 내었다.

"해리."

피터는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해리의 뺨을 붙잡아 고개를 들어올렸다. 욕실의 습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지 자신의 젖은 손으로 만졌기 때문인지 해리의 눈가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둔한 피터마저도 알아볼 수 있을 만치 우울한 원망을 담은 눈빛에 그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고요를 깨고 파동을 만들자 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약속했었잖아."

다치지 마. 해리는 언제든 피터가 위험하다면─에디 브록을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그의 앞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그렇기때문에 피터는 해리가 그린 고블린의 힘을 포기하기를 원했다. 그 어떤 낙관적인 가능성이나 가망도 없이 그저 기적만을 바라면서 해리가 무사히 깨어날 수 있기를 기다려야 했던 시간을 두 번 다시 겪고싶지 않다고 했다. 해리에게는 몇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그 부탁을 거절한다면 다시는 피터를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다치지 마. 어차피 지켜지 않을 약속임을 알았으나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제발, 다치지 마.

"미안해."

피터가 속삭였다. 애당초 불신 뿐이었던 약속과는 달리 해리는 그 말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피터는 언뜻 보잘것 없을지도 모르는 상처가 해리에게는 어떤 고통을 주는지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는 무관한 이들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다 상처입을 것이다. 해리로 하여금 피터를 지킬 수도 없도록 만들어버리고서 말이다. 그것이 피터가 생각하는 최선이었으며 그가 얼마나 해리를 사랑하든혹은 사랑하기 때문에결코 달라질 일은 없으리라. 피터의 사과는 그 모든 것들을 담은 사과였다.

 

넌 정말 나쁜놈이야. 해리는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자 피터는 재차 해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피터를 상심시킬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을 굳이 입에 담고싶지는 않았다. 대신 해리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물 속에서 피터의 허리를 품에 안고 그에게 키스했다. 정작 가장 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으면서 마치 이 행동이 해리를 달래줄 것을 안다는 듯 순순히 안겨오는 몸짓이 사랑스럽고도 미웠다. 그럼에도 해리는 고작 이 몸짓 하나라도 붙잡기 위해 보잘것 없는 투정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짧은 순간이여도 좋으니 지금은 나만의 피터 파커가 되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