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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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뉴욕 시민이라면 누구인들 사랑에 마지않는 히어로라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스파이더맨이었기에 테라스 창을 열고 방으로 들어와 마스크를 벗는 순간의 고요함은 그 환호와 열광의 시간마저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한다. 그럼에도 쉽게 외로움을 타는 성정은 아닌 피터였으나, 그에게 조차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 처럼. 열에 들뜬 몸뚱이를 하고, 아무도 없는 단칸방의 좁은 싱글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가 그랬다.
거미에 물린 후로 튼튼해진 몸은 여간해서는 잔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지만 그런 피터에게도 컨디션의 기복은 존재했고,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유난히 힘든 날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무딘 만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피곤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예고도 없이 터져버리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면 피터는 거미에 물리기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앓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뜨거운 열감과 추위는 피터의 머리통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가 차게 식히길 반복하면서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고 욱씬거리는 몸은 전신을 얻어맞은 것마냥 아팠다.
피터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고작 감기 몸살을 이유로 연로한 메이를 뉴욕까지 오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인기 가수로 화려하게 발돋움한 메리 제인은 순회 공연을 하느라 뉴욕에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기업을 이끌고있는 해리가 밤낮 할것 없이 업무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 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피터에게 남은 선택지는 홀로 아픔을 삭히며 몸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스파이더맨에게는 그토록 많은 애정과 찬사가 쏟아지건만, 정작 피터 파커의 곁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었다.
감기약 하나 삼키지 못하고 수트도 벗지 않은 채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잠들고서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피터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단정히 누워있었다. 커튼이 쳐진 테라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어스름한 불빛은 이미 땅거미가 진 도시의 가로등이 쏟아내는 주홍색이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눈꺼플을 파고드는 빛에 익숙해지는 동안 피터는 머리가 제법 맑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잔물결이 흐르듯 그의 곁을 침범하는 외부의 불빛이 비단 테라스 밖의 가로등 만은 아니라는 것도.
가로등보다는 조금 차가운 색의 그 빛은 침대 아래쪽에서 불을 지피듯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나른함이 채 가시지 않은 몸를 뒤척여 옆으로 돌아눕자 피터의 시선보다 조금 더 위쪽에 놓여진 익숙한 고동색 뒷통수가 보였다. 좁은 방에는 카펫도 깔리지 않은 침대 아래를 제외하면 마땅히 앉아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해리는 그곳에 앉아 불꺼진 방 안에서 밝기를 줄인 태블릿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느릿하게 흐려진 기억이 찾아들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저를 달래어 약을 먹이고, 옷 갈아입는걸 도와주던 목소리와 손길이 떠올랐다. 약간의 핀잔을 담은 목소리는 짐짓 불만이 가득하게 들렸지만 다정했고 식은땀을 훔치고 열을 재보던 손은 부드러웠다. 피터는 해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바싹 마른 입안을 축이지 못하고 기침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에 반응하듯 뒷통수에 움찔, 놀라는 기색이 어렸다. 해리는 곧장 태블릿 화면을 아래로 뒤집으면서 몸을 돌렸다.
"내가 깨운건 아니지?"
피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눈부심에도 익숙해졌거늘 오히려 해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들었다.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윤곽을 더듬어 피터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조금은 안심한 목소리로 "열은 내렸네." 라고 말했다. 몸이 조금 더 가벼웠다면 금방 떨어져버린 해리의 손을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기분 좋았는데. 피터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던 그 서늘한 감촉을 상기하며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올리고서 웅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뉴스가 하루종일 조용한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서 어둠 속에서도 해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해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피터는 마치 해리가 언제나 그를 지켜본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라고만 생각했던 오늘 조차도, 해리는 뉴스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스파이더맨의 보도를 기다리며 피터를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피터는 분명 열은 내렸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졌다.
"일어났으면 스프라도 좀 데워줄게."
"으응."
달칵. 협탁의 스탠드가 켜졌다. 피터는 그제서야 해리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몰라도 회사에서 곧장 이쪽으로 온 건지 정장 차림이다. 차려입은 옷 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돈했을 머리는 편하게 있는 동안 흐트러졌는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피터는 치킨스프의 포장을 뜯고있는 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불 속에서 숨죽여 웃었다. 벤 삼촌과 메이 숙모, 그리고 메리 제인과 해리. 단 네 사람이 전부였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피터의 주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있던 시기였다. 이제 그때를 상기시켜주는 사람은 오직 해리뿐이 남지 않았지만, 피터는 그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차오르는 안도감을 느꼈다.
좁은 방 안은 그만큼 적나라하게 소음을 전달했다. 그릇의 달그락거림, 가스불이 타오르는 소리, 스프를 휘젓는 찰박임과 아주아주 느릿하게 공기가 데워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피터의 뱃속에 온기를 채워 넣었다. 피터는 여전히 이불 속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해리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해리." 피터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아픈 몸 만큼이나 말랑말랑해진 정신은 그만큼 손쉽게 저 깊은 곳에 눌러담은 속내를 훤히 들여다 보게 만들었다.
내심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 메이의 건강과 메리 제인의 애정이 그렇듯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언제고 예전과 같을 수만은 없다는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만큼은 한결같기를 바라는 것 말이다.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못할 말, 하지 못할 생각이 느슨해진 정신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것이 해리에게는 어떤 의미인 줄도 모르고서.
"너는 계속 지금처럼 있어 줄 거지?"
피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침대로부터 주방까지의 거리는 고작 1미터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치킨스프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미세한 소리도 피터에게 전달되었듯이, 해리는 피터의 말을 들었다. 피터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해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느리게 눈을 깜박였을 때, 해리는 다시 몸을 움직이며 방안 가득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치킨 스프를 그릇에 담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해리는 협탁에 스프 그릇을 내려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얼핏, 끌려 올라간 입꼬리가 삐뚜룸하게 보인 것만 같았지만 피터의 머리칼을 헝크려놓는 짓궂은 손짓과 장난스러운 미소는 평소와 똑같아서 그만 덩달아 웃고 말았다. 그리고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해리에게는 그 머릿속의 순진함이 빤히 보이는 것만 같았으나 정작 정말로 하고싶은 말은 전부 입속을 맴돌기만 했다. 결국 해리는 평소에 비해 유난히 더 발그레한 뺨을 하고서 속도 모르고 웃는 피터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네 베스트 프렌드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