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3(어메이징 스파이더맨::피터)

x

피터2(샘레이미 스파이더맨::파커)


몸을 감싼 포근한 시트 위로 정오의 따듯한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시트 안으로 파고들던 파커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손길을 느꼈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올 한올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이 퍽 간지러워서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키득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그 감각 만큼이나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귓가에 녹아내렸다.

"일어나, 형."

그제야 파커는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갈색 눈동자를 향해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좋은 아침, 피터."

파커가 시트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눈은 떴지만 아직 완전히 일어나고싶지 않았다.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게으름을 부리자 피터가 장난스럽게 그의 뺨을 죽 잡아당겼다. "열 두시간을 잠만 잤어." 파커가 멍하니 반쯤 감긴 눈을 꿈뻑거렸다. 손을 뻗어 협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자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즉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가를 꾹 눌러 문지르면서 변명을 우물거렸다. "불가항력이야."

바로 어제 저녁까지 자그만치 이틀을 내리 일했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하고, 먹고 일하기만 반복하던 악몽같은 이틀이었다. 그나마 식사 조차 제대로 된 밥이 아닌 책상머리에서 샌드위치 따위를 적당히 씹어 넘기면서 연산 프로그램과 계산식의 숫자들, 화학 기호들과 전쟁을 벌였다. 파커는 지난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건 정말 '쓰러졌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으 아직도 눈앞에 알파벳이 떠다니는 것 같아."

앓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다 들지못해 꾸벅거렸다. 연구실에 갇혀있는 동안 면도를 할 틈도 없었는지 까슬까슬해진 파커의 턱을 살짝 잡아 올린 피터가 이번에는 뺨에 쪽. 짧은 버드키스를 했다. "수고했어." 그 한 마디 만으로도 피로감이 한결 가셨다. 더해서, 피터가 건네준 연하게 내린 커피까지 홀짝이자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즐거움이 몽실몽실 차올랐다. 피터가 버터를 발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토스트 조각을 내밀 때 마다 파커는 아기새라도 되는 것 처럼 입을 벌렸다. 입술에 묻은 시럽을 혀로 핥자 피터가 입가를 문질러 주었다.

"아, 살겠다."

이틀 밤을 샌 것 치고는 썩 괜찮은 보상이었다. 피식 웃은 피터가 한껏 거들먹거렸다.

"역시 나밖에 없지?"

머그잔과 접시를 완전히 비우고 나니 비로소 제대로 된 정신이 들었다. 마른 세수를 하듯 얼굴을 몇 번 문지른 파커는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자 문득 때 늦은 의문이 떠올라 파커의 미간이 좁아겼다. 해는 하늘 높이 떠있고 막냇동생은 일찌감치 등교했을 평일 낮 시간. 비록 피터의 강의 시간표를 꿰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올 초 강의 시간표를 짜면서 공강일이 하나도 없다며 울상을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잠깐만." 파커의 목소리가 사뭇 무거워졌다.

"너, 학교는?"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피터의 표정은 천연덕스럽기 그지 없다.

"교수님 개인 사정으로 휴강."

파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곧이 곧대로 믿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만, 피터에게는 이미 전적이 있었다. 그때도 꼬박 일주일 정도는 집에 통 발을 뭍붙이지 못하고, 설령 퇴근한다 한들 잠만 자고 나가야했던 대형 프로젝트를 끝낸 다음날이었다. 성과금을 겸해서 무려 3일간의 휴가를 받은 첫 날. 파커는 강의 날짜가 바뀌었다는 피터의 말에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고 결과는 B-라는 점수로 돌아왔다. 그나마 과제와 필기 시험에서 우수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C는 커녕 D를 받았을지도 모른다.(실제로, 교수는 출석을 제외하면 피터의 모든 성적이 완벽하다고 평했다. B-라는 점수에 교수가 더 슬퍼할 정도로.)

파커가 일을 나가지 않는 평일이면 피터는 꼭 강의를 빼먹어서라도 그의 곁에 붙어있고 싶어했다. 그러니 하필 오늘 때마침 교수가 휴강 했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리가. 파커가 영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자 피터는 억울한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재차 피터를 추궁하는 파커의 목소리는 진지하기만 했다.

"나 오후에 다시 출근해야 해. 어차피 데이트도 못하니까 솔직하게 말해."

이번에는 입꼬리뿐만 아니라 눈썹까지 아래로 축 쳐지고 말았다. 피터는 그 긴 속눈썹을 비관적으로 내리깔고서 힘 빠진 어깨를 늘어트렸다. 파커를 향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퍽 안쓰러웠다. "진짠데." 피터가 중얼거렸다. 파커가 양뺨을 감싸 피터와 눈을 맞추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막 취조에 돌입하려던 파커의 엄격한 표정이 마침내 녹아내리고 말았다. 꼭 사고친 강아지같은 꼴로 그 길쭉한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계속 따지고 들기도 어려웠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면서 파커가 피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좋아, 믿을게." 턱에 닿는 수염의 감촉이 간지러운지 키들거리면서도 피터는 위풍당당하게 허리를 쭉 폈다.

"그럼 출근은 언제야?"
"글쎄, 혹시 오류가 생기면 대응하려는거니까 느긋하게 준비해도 돼."

조금 전 피터를 웃게 만들었던 수염 난 턱을 매만지면서 파커가 중얼거렸다.

"일단 면도부터 해야겠다."
"난 이대로도 좋은데."

양팔을 활짝 벌린 피터가 파커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파커에게 들이민 작은 머리통을 부비적거리면서 품 안으로 파고들더니 휙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장난스레 턱 아래를 깨물었다. 다듬지를 못해 마냥 지저분하게 자라난 수염이 거슬릴 법도 하건만 피터는 어린 강아지가 입질을 하듯 파커의 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입술 근처를 핥았다. 제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너무나 잘 아는지 낑낑거리는 소리마저 내면서 애교를 부리자 정말로 대형견 한 마리를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파커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면서 침대 헤드에서 주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만, 핏! 그만!"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찔끔, 눈물마저 나왔다. 파커가 어깨를 들썩이며 자지러질듯 고개를 젖혔다. 턱이며 입 주변이 온통 침범벅이다. 피터의 어깨를 힘껏 밀어내자 그제야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간신히 진정된 숨을 고르면서 파커는 맥이 탁 풀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졸라도 출근은 할거야."

파커의 지적은 정확했는지 피터가 찔끔 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널부러졌던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는 파커에게 뾰로통하니 한쪽 뺨을 부풀렸다.

"어차피 대기라면서"
"그야 내가 팀장이니까."

지시만 하고 쏙 빠지면 다들 뭐라고 하겠어. 파커는 피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려 했지만 피터가 다시 한번 그의 필살기인 '강아지같은 얼굴'을 시전했다. 슬쩍 고개를 숙이고 울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 보면서 예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제발─" 약간의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렸지만 파커는 단호했다. 파커의 검지가 피터의 동글동글한 콧망울을 꾹 눌렀다. "귀여운 짓 금지." 피터가 잇사이로 입술을 꾹 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은게, 이번에야말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마무리 작업과 약간의 오류 수정 정도야 아래 팀원들에게 떠맡겨도 그만일 것을, 가끔 파커는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할 때가 있다. 물론 고집을 부리기에는 피터는 파커의 그런 면모까지도 사랑하고 있었다.

"알았어."

파커가 미심쩍은 얼굴로 눈을 흘겼지만 피터는 두 손을 들어보임으로서 깔끔한 패배를 선언했다.

"대신 부탁 하나 해도 돼?"
"뭔데?"

침대에서 빠져나오려는 파커의 어깨를 꾹 눌러 도로 앉히더니 말했다.

"면도하는거 내가 해줄게."

그 제안이 퍽 의외였는지 파커가 눈을 깜박였다. 손바닥으로 감싼 턱을 쓰다듬듯 문질거렸다. 짧게 돋아난 수염의 감촉이 까슬까슬했다. 여전히 영문을 알수 없는 부탁이었지만 어차피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이었으니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파커가 어깨를 으쓱이며 선뜻 대답했다. "뭐그러던지." 피터는 뭐가 그렇게 기쁜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서 환호성을 질렀다. "좋았어!"

피터는 파커를 침대에 그대로 앉혀놓고 아예 타올과 따듯한 물, 셰이빙 크림과 면도기를 챙겨 돌아왔다. 협탁에 수반을 올려놓고 물을 꾹 짜낸 축축한 타올로 파커의 얼굴을 닦아주며 익살스럽게 물었다.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 손님?" 얌전히 눈을 감고서 뜨끈뜨끈한 물수건의 감촉을 즐기고 있던 파커가 웃음기를 담아 대답했다. "깔끔하게 해주세요." 파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피터는 타올로 턱을 감싸고, 자그맣게 패인 보조개 위를 엄지로 마사지하듯 살살 문질렀다. 타올에 덮여 수염이 가려지자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앳된 얼굴이 되었다.

타올을 내려놓고 손바닥 가득 셰이빙 크림을 짜내면서 피터가 능청을 떨었다.

"너무 잘생겨지면 애인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가끔은 제 애인도 속이 타 봐야죠."

셰이빙 크림을 바르던 손이 갑자기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파커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뜨보더니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피터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밀어 올리며 귀엽기 그지없는 눈웃음을 쳤다. 아, 정말. 피터는 손등으로 이마를 꾹 누르면서 허공을 향해 탄식을 내뱉었다.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못당하겠다. 어디가서 지는 입담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파커는 간혹 이렇게 피터의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었다. 오직 파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형, 질투한 적 있어? 누구한테?"

피터가 다시 셰이빙 크림을 바르기 시작하자 파커가 눈을 감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네 과 동기들이나 문댄스에 캐롤린, 아니면 우리 연구실 인턴?"

"캐롤린은 내가 단골이라서 잘해주는 것 뿐잠깐, 인턴?"

피터가 의아스럽게 고개를 까닥였다. 턱과 입 주변까지 셰이빙 크림이 꼼꼼히 발린 것을 확인하고 손에 남은 거품을 닦아냈다. 면도칼을 집어들면서 한 손으로는 파커의 턱을 받쳐 살짝 추켜 올렸다. 피터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들면서 파커가 말했다.

"내가 놓고갔던 디스크를 가져다주러 왔을 때 봤었는지 꽤 관심을 보이더라고."
"아, 그 블론디?"

파커에게 디스크를 전해주고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말을 걸어온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이제는 인상조차 희미해진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피터는 그녀의 이름 조차도 몰랐다. 굉장히 영리하고 센스가 좋다면서 파커가 곧잘 칭찬을 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피터 쪽이 내심 질투를 하기도 했었다. 이거야말로 정말 억울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소한 것 조차 파커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설레도록 기분 좋았다. 파커가 재차 투덜거렸다.

"넌 인기가 너무 많아."
"형은 그 인기남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정말인지 셰이빙 크림만 아니라면 저 입술에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건 면도를 끝난 후에도 늦지 않을 것이다. 피터의 한쪽 손이 파커의 뒷통수를 받쳐 고정했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 나지막히 속삭이면서 조심조심, 턱에 발린 셰이빙 크림의 가장자리부터 면도날을 가져다 대었다. 파커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한껏 집중을 하고있는 탓에 조용한 숨소리 뿐이 들리지 않았다. 사악─ 하고, 면도칼의 예리한 칼날이 거품을 긁어내며 턱 위를 미끄러졌다. 피터가 재차 손을 움직이자 칼날의 서늘한 감각에 긴장되기라도 하는지 굳게 다문 입매가 씰룩였다. 피터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으면서 여유롭게 거품을 긁어냈다. 걷어낸 거품 아래로 보들거리는 하얀 피부가 드러나자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졌다.

파커의 머리를 받쳐주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은근슬쩍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으음, 낮은 목울림과 함께 나른하게 힘을 빼고있던 파커의 눈썹이 좁아지면서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움직이면 안돼. 피터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무언가 항변이라도 하고싶은 듯 파커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얇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면서 입을 오물거리자 동그란 턱에 힘이 들어갔다. 면도칼을 내려놓고 장난을 치듯 파커의 턱 아래를 톡, 톡 두드렸다. 이윽고 웃음소리를 내며 사르르 풀어져버린 턱 주변을 다시 젖은 타올이 덮었다. 피터는 거품 꺼진 크림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파커의 턱과 물거품이 흘러내린 목을 닦아내었다. 행여 자극이 가지 않도록 양 손으로 뺨을 부드럽게 감싸 문질거리다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아이처럼 보송보송해진 말간 얼굴을 보면서 피터가 중얼거렸다.

"진짜 예쁘다."

눈을 뜨려던 파커는 긴 속눈썹을 드리운 피터의 갈색 눈동자가 저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살포시 입술을 겹치자 파커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더듬거리며 피터의 팔을 붙잡으려는 손을 낚아 채 무릎 위로 꾹 내리누르고서 피터는 혀를 밀어넣었다. 타액이 섞이는 은근한 물소리와 함께 혀를 얽혔다. 그 붉은 살덩이와 바짝 밀착해 맞닿은 입술의 말랑거리는 감촉을 음미하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막힌 입을 비집고 나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면 아주 살짝 입술을 떼었다가 숨을 들이쉬기 무섭게 다시 혀를 내밀며 입 안 곳곳을 쓸었다. 말캉한 혀가 입천장을 쓸다가 안쪽에 숨겨진 작은 송곳니를 쓰다듬으면 옅은 비음을 흘리면서 피터에게 붙잡힌 손을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파커의 목젖이 몇 번이나 위 아래로 움직이며 안에 고인 타액을 삼켰다.

물기에 젖은 은밀한 질척거림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이어졌다. 마침내 입술은 떨어졌지만 피터는 몸을 물리지 않고 그대로 파커의 손을 꼭 잡은 채 이마를 맞댔다. 결코 격정적이지 않은, 느긋한 입맞춤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피터 만큼이나 빨라진 파커의 심장이 똑같은 속도로 두근, 두근, 박동하는 소리가 좋았다. 피터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헐떡이면서 눈을 떴고, 파란 유리구슬에 자신의 눈동자가 고스란히 비치자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분명 놔줄 생각이었건만 욕심 섞인 아쉬움과 아이같은 투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다시 한 번 파커를 졸랐다.

"정말로 꼭 가야해?"

피터는 애교스럽게 맞닿은 코끝을 문질거렸다.

"나, 형이랑 있고싶어서 강의도 쨌단 말야."

"피터─파─커──"

순식간에 파커의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눈을 흘겼다. 그제야 뜨끔해버린 피터가 후다닥 몸을 떨어트리며 재빨리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외쳤다. "미안, 미안해! 잘못했어요!" 결코 작지않은 몸뚱이를 한껏 움츠리는 한편으로는, 영악하게도 슬쩍 손가락을 벌려 파커의 표정을 살폈다. 손가락 사이로 빼꼼이 보이는 윤기가 흐르는 아몬드마냥 반짝이는 눈동자가 미약한 물기를 머금었다. 설설 파커의 눈치를 보면서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리자 파커는 애써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제 잘못을 아는지 피터는 기어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궁색한 변명을 꺼내놓았다.

"그치만계속 바빴잖아. 섹스도 못하고."

아예 얼굴조차 비추지 못하는 야근에 돌입한 날짜는 이틀 뿐이라지만 피터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독수공방 신세였다. 연구실에서도 유능한 실력을 인정받고있는 파커는 항상 대형 프로젝트의 치프를 도맡았고, 프로젝트의 진행율에 한창 물이 오르면 거진 한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눈 밑에 다크써클은 점점 더 진해졌다. 마감까지 2주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는 모든 휴일을 반납했고 거기서 1주일이 지나면 집에 오는 시간은 완벽하게 불규칙해졌다. 한 침대에서 잠드는 시간 조차도 아쉬운 마당에 섹스라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나 진짜 외로웠다구우─"

꾸물꾸물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피터가 파커의 허리를 안고 매달리면서 길게 늘어졌다. 뒷통수에 내리꽂히는 파커의 시선을 느끼면서 허벅지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화를 내려나?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좀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피터는 빙글 몸을 돌려 파커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파커가 피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응? 혀엉─" 헤실헤실 웃으면서 허벅지에 뺨을 부비자 드디어 파커가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순순히 항복하기에는 저 짓궂은 얼굴이 얄미워서, 피터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약간의 타박과 애정을 담아 마구 헝클였다. 피터가 킬킬거리며 팔을 휘저었지만 그렇잖아도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엉망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피터는 새둥지마냥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서 탁 뻗어버리고 말았다. 파커가 피터의 뺨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어."

피터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면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위에 키스를 떨어뜨리며, 아무래도 오늘은 출근할 수 없다는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