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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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오스코프의 회장직에 올라선 후 처음 맞는 생일은 아니나 다를까. 끔찍할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이미 어렸을 적부터 해리에게 생일이란 자기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었다. 파티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해리의 또래 아이들이 아닌 노먼의 지인과 오스코프의 협력사, 정계 인사들이었고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오스본가와 사적인 친분을 만드는데에 있었다. 생일이란 거대한 사업의 일부였다. 그날이면 해리는 형식적인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을 피해 파티장의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는 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의 관심사는 해리가 아닌 노먼이었기에 파티의 주인공의 부재를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오스코프 회장이 된 지금, 손님들과 일일히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던 노먼의 접객은 이제 해리의 몫이었다. 해리는 형식적인 축하를 건네는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진심이라고는 없는 감사를 표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끝나고 나면 생일이 가지는 의미와 특별함은 빠르게 사라지고 사업과 투자, 돈에 대한 이야기만이 자리에 남는다. 파티가 시작된 후로 무수히 많은 축하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축하 한 마디 듣지 못한 기분이었다.
해리가 오스코프를 책임 질 필요가 없을 때에는 잠시 얼굴만 비춘 후 몰래 파티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해리는 매년 그렇게 피터와 함께 생일을 보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신의 생일마저 까먹기 일쑤인 피터는 매 해 해리의 생일을 잊어버리고는 했기에 몇 주 전부터 신신당부하며 상기시켜 줘야 했지만, 조금 무심할지 언정 진심을 담은 생일이 적어도 이런 껍데기 뿐인 파티보다는 나았다.
생일에 보고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정작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아무런 소식도 없다. 파티가 시작되고 처음 한 시간은 피터가 파티장에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이 곳에 초대된 무수히 많은 신문사들 중 한 곳의 사진사로 고용되어, 그 신경질적이고 촉새같은 남자와 친근한 척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찍으면서 '내가 올 줄 몰랐지? 깜짝 놀랐어?' 라고 말해주지는 않을까.
그러나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해리는 파티장에 피터가 나타날 리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뷰글의 조나 제임슨의 곁에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진 기사가 쫓아다녔다. 설령 그 사진 기사가 피터라 한들, 그는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순간 카메라를 내던지고 뛰쳐 나갈 것이 뻔하다. 직업 조차도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 영웅에게 있어 친구의 생일은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실망하지 않으려 했지만 얼굴을 비추지 않는건 둘째 치고서라도 연락 한 통 없는건 다른 문제였다. 해리는 피터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행여 짧은 메시지 하나라도 보내지는 않을까 헛된 기대를 품은 채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물론 파티가 끝나도록 주머니 속에서 흔들리는 핸드폰이 단 한번도 울리지 않았음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해리가 약간의 취기와 적잖은 피곤함을 안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괘종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겹쳐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파티장에서는 마지못해 샴페인 잔을 부딪혀야 했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마시고 싶어서 위스키를 땄다. 하루 종일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년과는 달리 피터에게 일부러 생일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정말 새까맣게 잊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저 간단한 문자 한 줄이면 충분했는데, 이렇게 될 줄을 예상했던 한편으로는 내심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었나보다.
해리는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고 이제 와서 피터에게 연락해 생일이었음을 알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 섬세하지 못한 녀석이 '생일 축하해'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지금이라도 잠깐 볼래? 기대도 안 하지. 내일 만날까? 어차피 지나간 날을 늦게라도 챙겨줄 타입은 아니다. 그래, 축하 외에 피터가 덧붙일 말이라고는 면목 없다는 듯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는 '미안해' 뿐이리라. 사과와 함께 듣게될 축하라면 차라리 받지 않는 편이 나았다.
최악의 생일이었다. 어쩌면 정작 자신은 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어야 했던 어린 날의 생일보다 훨씬 더. 적어도 그때는 한 사람이라도 축하해 주리라는 기대조차 품지 않았으니 말이다.
잔을 기울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입안에 감도는 씁쓰름함과 목구멍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열기는 비단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리라. 하루 종일 가식적인 억지 웃음을 가장하며 쌓이고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위스키와 함께 억지로 밀어 넣었다. 아직까지도 파티장에서와 똑같이 목을 조이고있는 넥타이가 답답해 죽 잡아당기고는 두 번째 잔을 채웠다. 어차피 다 끝나버린 생일이거늘, 무슨 미련이 남는다고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문득, 여전히 무뎌지지 못한 이런 기분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이런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아주 사소한 약속에서조차 해리는 늘 피터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다.
데엥──…
한 번,
데엥──…
두 번,
데엥──…
세 번,
끝나려는 찰나 다시 시작되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길고 지겨운 종소리는 묵직하게 퍼져나가 넓은 서재를 가득 채웠다. 연이어 울리는 종소리는 요란하기만한데 횟수를 더할수록 머릿속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넷. 다섯. 여섯.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넘겨버리기에는 특별한 날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고, 실망이 큰 만큼 체념도 빨랐다. 일곱. 여덟. 해리는 귓가에서 울렸다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종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의 끄트머리 마다 털어내기로 마음먹은 미련을 흘려보냈다. 해묵은 감정이었지만 열 두번이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윽고 그것이 아홉 번째에 접어들자 퍽 마음이 편해져서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의미없는 기다림을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해리가 몸을 돌렸다. 종소리는 서재를 나가려는 해리의 등 뒤를 따라왔다. 데엥──… 공기를 진동시키는 소리 거대한 소리를 비집고 갑자기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서서히 작아지는 종소리의 끝에서 그 소리는 더욱 명확하게 들렸다. 해리는 창가로부터 그를 부르는 작고 가벼운 노크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스크를 벗은 피터가 유리 너머의 발코니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해리는 곧장 발코니 창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정의 종소리는 열 한번 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해리는 마치 그것이 자신을 재촉하기라도 하는 것마냥 허겁지겁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생일의 완전한 끝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의 시작과 동시에 피터가 말했다. 괘종시계에 비하면 연약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해리에게는 가장 선명하게 들렸다.
"생일 축하해, 해리."
부드러운 목소리가 여운처럼 귓가에 남았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종소리를 머금고 웅웅거리던 공기에 서늘하지만 결코 춥지 않은 새벽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날짜가 바뀐 방 안에는 고요함이 내려앉았으나 그것은 시린 침묵과는 달랐다. 해리는 추위로 인해 발갛게 열이 오른 피터의 뺨을 바라보며 술로도 데워지지 않았던 온기를 느꼈다. 붉어진 코끝을 훌쩍이면서도 밝은 모습이었던 피터는 해리로부터 아무런 말이 없자 눈썹을 힘없이 늘어트렸다. 해리의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는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군 피터가 웅얼거렸다. 힐끔 추켜뜬 시선이 눈치를 보려는듯 해리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또 늦은 거지?"
"…아니."
결국, 언제 그리도 섭섭했냐는듯 해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종소리에 떠밀려 떠내려 가는 줄로만 알았던 감정이 밀물처럼 다시 흘러들어와 해리의 가슴 속에 재차 말뚝을 박았다.
"딱 맞췄어."
피터는 늘 지각을 했고, 가끔은 아예 말도없이 사라지고는 했지만 때로는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 버린다. 체념하고 단념한 끝에 마침내 정리할 결심이 서게 되면 그 순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다시 기대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그래봤자 또 다시 그 자리에서 기다리게 될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해리는 이번에도 견고하게 못박힌 감정을 뽑아내지 못했다. 안도감과 민망함이 뒤섞여 수줍기 짝이 없는 미소 지으며 조심스럽게 포장이 다 구겨진 선물을 내미는 손을 어떻게 외면할까. 해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늘 그렇듯 피터가 주는 만큼의 애정만을 받는 일이었다.
"설마 그것만 주고 가려는건 아니지?"
그러나 잠깐 동안은 욕심을 부려도 괜찮으리라. 해리는 한껏 짓궂게 말하면서 선물을 쥔 피터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잡혀 들어오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금세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마는 피터의 존재야말로 가장 완벽한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