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글
해리피터 | 우울
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x
피터 파커
피터와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가벼운 점식 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겠다는 것을 굳이 집까지 데려다주고서 느지막이 회사로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책상에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제야 일을 시작한 해리는 서류뿐만 아니라 비서의 한숨 소리에도 파묻혀야 했으나 기분만큼은 평소보다도 좋았다. 막 상담을 끝낸 직후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처럼 피터가 '예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피터가 조나 제임슨의 팟캐스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을까 긴장한게 괜한 걱정이었는지 대화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피터는 스파이더맨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었고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거나 고양이 머프를 쓰다듬기도 했다. 이제는 노묘가 되어버린 만큼 게을러진 그 줄무늬 고양이는 피터의 무릎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서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해리가 죽 기다려왔던 풍경이었다. 주말이면 말리부 다이너에서 브런치를 먹고는 했던 그 시절 처럼, 두 사람 앞에는 간소하지만 근사한 식사거리가 있었고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은 피터의 얼굴을 따듯하게 비추었다. 해리는 머프의 턱을 긁어주면서 미소 짓는 피터를 보며 애완동물을 들이는 것도 꽤 괜찮은 생각임을 깨달았다. 고양이도 나쁘지 않지만 피터를 닮아 동그랗고 순한 강아지가 좋을 것 같다. 고양이보다도 손이 많이 갈 테고, 강아지를 돌봐주면서 매일 같이 산책도 하다 보면 피터도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눈으로는 서류를 흩어내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떤 견종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온 비서가 데스크 위에 파일철 하나를 놓고 돌아가자 해리의 시선이 그것으로 쏠렸다. 이미 쌓여있던 서류들이 아직 거의 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손에 쥔 서류 역시 채 다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해리는 굳이 새로 놓인 파일을 집어들었다. 데스크에 놓인 그 순간 제일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문서가 된 그것은 다름 아닌 오전에 있었던 피터의 상담 기록이었다.
해리가 상담료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 쯤은 피터도 알고 있다지만, 아예 그 상담사를 고용했다는 사실 까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피터의 상담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해리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가능성조차 의심해 본 적이 없으리라. 타인의 호의를 경계할 줄 모르고 지나치게 선의를 믿는 피터의 성격은 때때로 해리를 답답하게 만들었으나 지금 만큼은 이토록 도움 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행여라도 피터가 기억을 찾을 만한 기색을 보인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해리에게 의지하도록 생각을 주입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상담 내용을 꼼꼼히 읽어내리던 해리는 어느 대목에서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인터폰을 연결해 비서에게 지시했다.
"펠리시아, 내일 저녁으로 예약해 놓은 스카이 라운지 레스토랑은 취소해 줘요."
모처럼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었건만, 계획을 틀어지게 만든 상담 내용을 다시 한번 흩어본 해리가 옅은 한숨과 함께 찡그린 미간을 꾹 눌렀다. 기억에는 없어도 무의식 속에서는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일까.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없도록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리는 상담 일지에 기록된 피터의 고백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추락하는 피터를 떠올렸고, 동시에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을 연상하고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피터의 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안티 혈청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심리 상담이라는 방법으로 하여금 피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던가. 해리는 피터가 스파이더맨으로 돌아가는 일을 가장 경계했지만 동시에 그건 어디까지나 정체성을 찾은 피터가 자신의 의지로 능력을 되찾으려 할 때의 이야기다. 기억이 부재한 상태에서 단순한 충동만으로 히어로 흉내를 내어봤자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했다.
해리의 손가락이 데스크 위를 느릿하게 두드렸다. 스카이 라운지는 취소하고, 회사에 방문하게 되면 피터가 이용할 응접실을 따로 만들어야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창문이 없는 곳으로. 그리고 조만간 정기 검진을 핑계로 병원에 가서, 진료 결과를 위조해 투약 횟수를 늘리도록 할 생각이었다. 피터의 팔에 빼곡한 주사 자국은 늘 해리의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투약을 멈추었을 때 피터가 깨닫게 될 진실이 해리로 하여금 죄책감을 떨치게 만들었다. 해리는 여전히 자신의 행동이 피터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은 건가? 되돌리기에는 어차피 늦어버렸으니 말이다.
피터가 여느때보다도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날, 스파이더맨의 부상 소식은 빠르게 해리에게로 전달되었다. 전투에서 조금도 몸 사릴 줄 모르는 피터를 보면서 늘 마음을 졸여야 했던 해리가 의료 분야에 커넥션을 만들어 놓은 덕분이었다. 언젠가 한번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해리의 불행한 예견이 적중해 버린 셈이다.
상처 입은 피터는 코스튬을 입은 그대로 즉시 오스코프 산하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해리의 지시 아래에서 스파이더맨의 시크릿 아이덴티티는 철저하게 지켜졌으나 문제는 기절한 채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피터의 상태였다. 보험은 커녕 보호자라고 할 만한 가족조차 없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오스코프 회장의 관심을 받고 있는 청년을 진료한 의사는 해리에게 그가 뇌손상으로 인한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의사의 표정은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관적인 결론뿐이 없는 사람 특유의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해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억지로 부정하려 드는 사람의 반응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쨌든, 그 의사는 자신이 진찰한 청년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해리는 스파이더맨의 초인적인 회복 능력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피터를 깨우리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를 다친 여느 사람이 그렇듯 눈을 뜨고도 한동안은 기억에 혼란이 올 수도 있고, 혹은 단편적인 기억 상실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전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몇 번이고 이번과 같은 위험에 몸을 던지겠지. 스파이더맨 수트를 입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사건과 위험을 겪게 될 피터에게 이번 일은 그저 아주 작은 사고로만 치부될 것이다.
그럼에도 해리는 이것에 익숙해질 자신이 없었다.
깨어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의 피터를 보는 일은 해리를 불안하고, 힘겹게 만들었다. 해리는 병실을 떠나지 못하고 피터의 곁에 앉아서 그의 손목을 매만졌다.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증표와도 같은 손목의 흉터는 마치 화상 자국이나 자해의 흔적처럼도 보였다. 영웅의 훈장이여야 할 그 흉터는 해리에게는 그저 모든 불행의 원흉이자 증거처럼만 느껴질 뿐이었다.
해리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터에게 평범함을 돌려줄 수 있는 기회, 일상을 되찾아 줄 기회, 책임을 내려놓을 기회. 그리고 정말로 어쩌면,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였다.
이전부터 쭉 바래웠던 일이기 때문일까. 만약 피터가 알게 된다면 분명 화를 내리라 예상하면서도 내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말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있는 피터에게서 혈액을 채취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했다. 스파이더맨의 능력을 억제할 수 있는 안티 혈청의 연구 자체는 몰래 진행해 오고 있었기에 샘플을 손에 넣자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리는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릴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다. 안티 혈청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도 미지수였거니와, 어쨌든 피터의 회복 능력이 그를 가사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할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단지 해리는 눈을 뜬 피터가 현실과 다른 꿈을 꾸고 있다면 절대 그 꿈에서 깨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피터는 분명 해리의 행동을 옳지 않다고 말할지 언정, 결국은 이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현실로부터 눈을 가려버리는 짓은 피터가 해리에게 했던 행동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해리가 파일을 덮었다. 언젠가 피터는 불행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만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피터가 겪은 무수히 많은 불행은 그가 기억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누가 그 일들을 알고 싶어 할까. 형편없는 학점이나 변변찮은 직장은 차라리 사소하다. 피터와 사귀는 내내 인내심을 가져야 했던 메리제인이 결국 그의 곁을 떠난 날. 그리고 메이가 스파이더맨의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날. 지지대가 되어주던 사람을 잃을 때면 피터는 해리에게 보다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았고 불행이 늘 제 주변에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지금껏 감내해 온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네게 있어 불행일까, 아니면 행운일까?
해리는 피터를 생각했다. 그는 무기력했고 방황하고 있었지만 아주 가끔씩은 밝게 웃었고 가장 즐거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평온한 현재에 만족했다. 잊고 싶은 날들을 대신해서 바로 오늘 같은 날을 조금씩, 조금씩 피터의 일상으로 채워나가게 될 것이다. 스파이더맨에게는 불행일 터인 해리의 존재는 피터 파커에게 행운이 되리라. 적어도 해리는 그렇게 믿었다. 이제는 해리만이 피터의 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건 곧 그만이 피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