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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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 맥과이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현재 그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을 맞닥트리고 있었다. 설령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한들 누구나 인생의 굴곡 한 두 개쯤 있는 법이거늘, 코흘리개 시절부터 아역 생활을 시작하며 일찍이 두각을 드러내 유명 배우의 반열에 오른 레오라면 적잖은 굴곡과 고난을 거쳤으리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그가 거쳐온 인생의 뒤안길은 물론 한참 남아있는 앞으로의 삶에서도 지금 이 상황이 가장 어렵고 난처하며 심각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무려 10대 시절로 어려져 버린 절친에게 자신이 절대 위험한 사람이 아니며, 네가 알고 있는 그 레오나르도가 맞다는 사실을 설득시켜야 하다니. 설령 산전수전 다 겪은 연세 지긋한 노인일지라도 레오와 같은 상황을 겪어본 적은 없으리라.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은 토비에게서 온 한 통의 문자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레오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기에 발신 알림음이 토비가 아니었다면 핸드폰도 열지 않고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문자보다는 전화를, 전화보다는 차라리 방문을 선호하는 그가 늦은 시간에 연락을 한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다소 의아스러움을 느끼며 내용을 확인했다가 빨리 와 달라는 다급한 한 마디를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왔더니 이런 상황이다. 신발을 구겨 신으며 급하게 회신해 본 문자와 전화에는 묵묵부답에,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라고는 들리지 않아 결국 출입키를 눌러 들어갔더니 눈에 보인 모습은 소파 구석에 움츠리고 앉은 어린 소년이었다.

레오는 이제는 빛바랜 사진이나 노이즈가 잔뜩 낀 낡은 비디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현실은 사진과 비디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선명해서, 마치 과거로 끌려들어간 감각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레오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토비가 10대 소년이 되었다는 사실 보다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겁에 질려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레오를 보자마자 놀란 눈을 크게 뜨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닮은 얼굴이 의심스럽다는 듯 경계와 두려움을 담아 이름을 불렀다. "레오나르도?" 이제 막 변성기가 지나기라도 했는지 여린 얼굴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토비는 조심성이 지나치도록 많았다. 그들 사이에 놓인 시간의 차이 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레오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성인 남성을 보고서 안도하기는커녕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는 뜻이다. 어쩌면 레오의 낮아진 목소리가─세상에, 토비! 대체 어떻게 된 거야?─그를 더욱 겁먹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토비는 레오가 입을 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가장 가까이 있는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철컥, 잠금쇠를 거는 소리가 나더니 토비가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여긴 어디야? 넌 대체 누군데?" 레오는 비단 어려진 것이 토비의 겉모습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기란 힘들리라는 것도.
 
결국 방문을 사이에 두고 긴 실랑이가 이어졌다. 사실 지금이 1980년대가 아니라는 것, 본래대로라면 현재의 토비 또한 어른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거짓말이나 속임수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진 주변의 환경이 토비를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탓이다. 다만 도대체 왜 여기에 턱에 수염 한 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려진 토비가 있는지는 레오 역시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분명 레오를 호출한 문자의 발신인은 토비였지만 그는 자신이 메시지를 보냈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애당초, 그들이 십 대였을 적에는 휴대전화조차 보급되기 전이었다. 휴대전화는 고사하고 인터넷조차 없었던 시대의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는 개념이 있을 리가. 레오가 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일까, 혹은 레오라는 걸 듣고서도 나이를 먹은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지기 때문일까. 토비는 빼꼼히 연 문 틈으로 레오를 훔쳐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네가 정말로 레오라고?"
 
마치 탐색하는 것만 같은 새파란 시선이 레오를 흩더니 이번에는 데구르르 눈을 둘려 집 안을 살폈다. 십 대의 토비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창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토비의 단독 주택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타운하우스와는 감히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토비는 눈을 깜박이더니 레오를 볼 때보다 한층 더 미심쩍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내 집이고?"
 
나이답지 않게 신중한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설명은 현재와 과거의 토비 사이에 생긴 삶의 공백만큼이나 많았다. 적어도 방 문을 방패막이 삼은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늘어놓을 햇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토비가 피신한 방은 침실이라면 모를까, 농성을 부리기에 그리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레오는 자신감에 차있고 약간은 거만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문틈을 내다보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낮아진 눈높이만큼 몸을 숙이고 정면으로 마주하자 경계심 안에 감추어진 불안감이 엿보였다. 레오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짓더니 어른스럽게 달래는 대신, 어릴 적 늘 그래왔듯 짓궂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다. 
 
"이렇게 잘난 얼굴이 또 있을 것 같아? 날 못 알아보다니 정말 실망이다, 토바이어스."
 
토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옛날의 높은 미성과는 전혀 다른 저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토비는 그 허세 가득한 농담으로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레오의 흔적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문 틈이 조금 더 벌어졌고, 이번에는 그 동그란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날을 생생히 떠올리게 만드는 미소였다. "정말 레오나르도처럼 말하네." 그 목소리에는 이제 의심과 경계 대신 친근함이 담겼다. 레오는 토비가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살그머니 몸을 물려주었다.
 
"그럼 이제 밖으로 나올래? 네가 아무리 올빼미 같다지만 세탁실에서 밤을 새기는 어려울걸."
 
토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숨어든 공간이 세탁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밤이면 불 꺼진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몰래 만화책을 읽거나 영화 필름을 돌려보며 시간을 보냈었지만 고작 세탁실에 그런 것들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분명 레오 역시 토비와 함께 밤을 새우곤 했다지만─토비의 앳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불시에 쳐들어와 만화책을 빼앗고 그들을 도로 침대에 눕히던 맥과이어 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어린아이는 자야 할 시간이다. 만약 토비가 레오의 이런 머릿속을 알았다면 방 문을 굳게 닫고 다시 한번 심통을 부렸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완전히 경계를 허물었는지 토비가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레오는 사이를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나란히 마주 선 토비를 보고서 이때의 토비가 얼마나 작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기억 속에서 홀로 성숙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절의 토비가 저보다 작다는 건 퍽 이상한 기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토비는 또래 아이들 중 가장 키가 컸던 것이다.
 
"미안해."
 
토비는 레오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믿기지가 않아서 그랬어. 이런 멋진 곳이 내 집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뭣보다 네가…"

토비는 긴 소매 끝을 매만지더니 망설이듯 말을 흐렸다. 그가 레오임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외형에서 오는 괴리감을 지울 수는 없었는지 레오를 대하는 태도에는 아직 어색함이 남아있다. 토비와 같은 시절의 레오였다면 밝게 웃으면서 어깨동무를 하고─뭐가 문제야, 버디? 한 번 말해봐!─친근하게 대답을 유도했겠지만 아들 뻘에 가까운 소년에게 차마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고작 십 대 언저리, 침착하게 보이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레오는 토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를 소파에 앉히고서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레오는 자신이야말로 토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 너한테 가장 필요한게 뭔지 맞춰볼까?"

주방으로 돌아간 레오가 바테이블 아래를 열었다. 소파 위에 무릎을 대고 올라 선 토비는 몸을 기댄 등받이에 턱을 올리고서 레오가 하는 냥을 바라보았다. 코코아 파우더와 머그를 꺼내고, 전기포트를 올리는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열어주지도 않은 현관을 당당하게 통과해 들어왔듯이, 토비의 집을 마치 제 집 마냥 드나들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행동거지였다. 주인 없는 방 침대 위에 앉아서 만화책을 꺼내 읽으며 토비를 기다리던 뻔뻔한 소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주방을 오가는 레오의 모습 위에 덧그려졌다. 잠시 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자 달콤한 밀크 초콜릿 향기가 응접실에 가득 퍼지고 머그잔 위로는 아지랑이 같은 김이 올랐다. 물론 토비는 따듯한 코코아를 좋아했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 치고 늦은 밤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코코아 한 잔으로 달래는 건 너무 진부한 짓이었다. 그러나 토비가 미처 실망감을 표현하기 전에 레오가 꺼내든 또 다른 병은 순식간에 토비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사실 레오는 토비에게 줄 코코아를 타는 동안에도 정말 손님용 위스키를 꺼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토비는 초콜릿의 달콤함과 코코아의 온기 이상으로 알코올의 독한 열감이 순식간에 몸속을 데우고 정신을 나른하게 만드는 감각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레오는 아직은 사소하게 느낄 이 작은 일탈이 미래의 토비를 어떻게 괴롭히게 될지 잘 알았다.

히피와 펑키를 위시한 온갖 예술가들이 넘쳐나는 80년대 LA에서 소년들의 음주는 마약에 비하면 차라리 일상적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 대상에는 토비와 레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정작 토비는 스무 살에 들어서면서 금주를 선언했지만 십 대의 토비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쿨한 일처럼 여겨졌던 십 대 시절의 음주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되돌아오게 될지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결국 위스키를 섞은 이유는 토비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어른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지되어 온 토비의 베스트 프렌드라는 공고한 위치는 설령 나이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쉬이 포기할 수 없었다.

머그잔을 건네받은 토비가 그것을 한 모금 삼키자 하얀  뺨에는 금세 발갛게 열이 올랐다. 코코아의 달콤함 때문인지 혹은 알코올의 향취 때문인지 토비는 나른해진 얼굴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고 이제는 완전히 편안해진 모습에 비로소 안심이 되어 레오 역시 옆자리에 앉았다. 머그잔을 홀짝이면서 힐끔, 레오를 올려다본 토비가 꼼질꼼질 몸을 움직이더니 등받이에 모로 기대고 좀 더 찬찬히 그의 얼굴이며 몸을 뜯어보았다. 마치 탐색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으나 그래봤자 어린아이의 시선이었다.

과연 의젓하게만 보이는 저 얼굴 너머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작은 궁금증이 일었다. 레오를 바라보며 그만큼 어른이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까? 혹은 몰라보게 커져버린 레오와 자신이 아는 레오의 간극을 비교해보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멋있다며 감탄할까 아니면 너무 달라졌다며 아쉬워할까.

어느 쪽이든 토비를 마주하는 레오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토비가 레오의 모습을 관찰하듯이 레오 역시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토비는 새삼 다시 레오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짓궂은 미소는 그대로였으나 그것은 소년의 호기로움과는 달랐다. 나이만큼이나 짙어진 눈동자의 빛깔은 마냥 맑기만 했던 어린 레오에 비해 깊이 있게 보였다. 지금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탓에 선망할 수밖에 없는 어른의 얼굴이다.

레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홀짝이는 사이 어느덧 반 이상을 비워낸 머그잔을 꼭 쥐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한층 더 붉어진 뺨은 더 이상 따듯한 코코아가 아니라 오로지 취기로 인한 열감일 것이다. 토비는 마치 옛날처럼그에게는 현재겠지만─레오에게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한 살 어린 주제에 일찌감치 키가 커버린 토비에게서 느껴지던 묵직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터무니없이 자그마한 몸집으로는 레오의 어깨도 아닌 고작해야 팔뚝 언저리에 고개를 기대야 했다.

"너만 어른인 건 너무 치사해."
"왜, 내가 너보다 키가 커져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레오가 장난스레 들어 올렸던 양손을 툭 내려놓으며 묻자 토비는 술냄새가 풍기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니." 토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웃음을 머금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불만스럽게 끌어내린 입술을 삐죽였다. 살그머니 내리감은 눈매는 마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레오는 바보 같고 눈치도 없는데, 지금 넌 나를 다 알아차릴 것만 같아."

가볍게 받아치려던 레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토비의 목소리에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긴장감이 있었다. 어린 레오가 들었다면 자존심이 상해 울컥, 볼멘소리를 내뱉을 법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의 레오에게는 앞의 말보다는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더 중요했다. 레오는 어린 날의 자신을 떠올리면서 이제는 그가 어떤 소년이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저 무리의 중심에 서서 우쭐거릴 줄만 알았던 시절이다. 어떤 진지한 고민이나 상념이라고는 없이 저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였던 치기 어린 시절이었다. 토비가 그것을 바보같고 눈치도 없다고 표현했다면, 레오는 자만과 허세가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토비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오직 저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이어진 영혼의 형제처럼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하듯 전부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 믿음이 가장 견고했던 때의 토비가 앞에 있다는 것은 레오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토비를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있었어?"

나이에서 오는 괴리감에도 불구하고 토비에게 베스트 프렌드로 여겨지길 바랐지만 지금 만큼은 어른으로 보일 필요가 있음을 직감했다. 레오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팔뚝에 기댄 머리를 쓰다듬고는 토비에게로 몸을 돌렸다. "토비." 낮아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이제는 바닥을 보이는 머그컵을 슬그머니 빼앗아 탁자 위에 올려놓자 토비가 머뭇거리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토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레오를 올려다보는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티 없이 맑은 푸는 눈동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달리 투명한 창이라도 된 것마냥 속내를 감추는데 서툴렀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토비는 너무나도 어렸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었다. "이것 봐." 토비가 작게 속삭였다. "벌써 알아버렸잖아." 저보다도 작았던 레오의 모습을 아무리 상기해 봤자 성숙한 만큼 깊어진 짙푸른 눈동자 앞에서 본심은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알코올의 취기가 토비를 더욱 말랑해지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어른에게 모든 거짓말이 낱낱이 파헤쳐진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토비의 예상과는 달리 레오는 여유롭지도, 느긋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레오의 머릿속은 너무나 늦게 알아버린 사실로 인한 혼란과 당황으로 가득 차올랐다. 토비는 마치 대답을 기다리듯 그를 바라보았고 대답은 변명을 내뱉듯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너한테 들키기 싫었어."
"그거 거짓말이지?"

아주 잠깐 동그래졌던 눈을 가볍게 찌푸리며 반박하자 레오는 입을 다물었다. 토비의 섬세하면서도 예민한 기질은 어른인 레오를 상대하면서도 변함없이 빛을 발했다. 레오의 고백은 진심이었으나 동시에 토비의 불신 역시 사실이었다. 이미 여린 짝사랑을 마음에 품고 있던 토비에 비하면 자신의 감정에 명확한 이름을 붙이기에 당시의 레오는 너무나 풋자란 애송이였던 탓이다. 그리고 토비 역시─제 아무리 조숙하다 한들─레오의 그런 자각 없이 설익은 사랑을 눈치채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렇기에 홀로 삭히고 삭힌 끝에, 씨앗처럼 웅크린 레오의 감정이 꽃피었을 때에는 이미 무뎌져 버린 것이리라. 예나 지금이나 토비는 늘 레오보다 빨랐다. 키도 빨리 컸고, 변성기도, 사춘기도 빨랐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사랑과 포기마저도 레오보다 먼저였음을 알았다. 
 
토비의 말마따나 그때의 레오가 바보 같고 눈치 없는 어린애가 아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일찍 철들지 못한 어린 시절을 이제 와서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애에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사귀는 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벌써 변성기가 찾아온 토비에 비하면 턱에 거뭇한 수염자국 한 올조차 나지 않은 주제에 저도 사내자식이랍시고, 여자친구의 존재를 마치 훈장처럼 여기며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예쁘장한 얼굴 덕분인지 아니면 주변을 주도하는 유쾌한 성격 덕분인지 혹은 무리들 중 가장 빠르게 아역 경력을 만들어갔던 덕분인지, 소년들의 세계에서 레오는 마치 왕처럼 군림했다.

"너처럼 특별한 애가 나같이 평범하고 지루한 애를 좋아하는 건 이상해."

홀로 성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들 토비도 결국은 그 나잇대의 소년인 건 마찬가지였다. 다른 아이들이 그랬듯 토비에게도 레오는 특별하게 여겨졌겠지만 정작 레오의 기억 속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랐던 건 토비였다.

레오는 그때의 토비를 생각했다. 들뜨고 어리숙한 소년들 사이에서 훌쩍 큰 키를 가지고 있던 토비는 퍽 조용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쉽게 흥분하고 다투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또래 아이들과 한 걸음 떨어진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를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토비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레오는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낚아 채려는 충동처럼 토비의 눈길을 붙잡아두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 무디고 굴곡 없는 얼굴로 오직 저에게만 밝게 웃어주는 미소가 좋았다. 다른 아이들은 가지지 못하는 것을 얻어냈다는 작은 승리감에 마냥 도취되어 그 이상 나아가질 못했다. 내 것으로 두고 싶다. 유치함 이상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었다. 너무 단순해서, 그게 사랑인 줄도 몰랐다. 

"나는 그게 너였어."

레오가 토비의 손을 잡았다. 진작에 전했어야 했던 그 말은 늦어버린 시간만큼이나 오랫동안 레오의 입 안을 맴돌았기에 한 번 끄집어내고 나니 어떤 망설임도 거칠 것도 없이 흘러나왔다. 레오는 그의 커다란 손에 감싸인 토비의 작은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빛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