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가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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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 맥과이어
06
Tobey! Tobey!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관객들의 환호로 가득했다. 앤드류가 등장했을 때부터 흥분하기 시작한 극장 안의 분위기는 마침내 토비까지 나타나자 그야말로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로 탈바꿈했다. 폭발적인 기분에 휩쓸려 자리마저 박차고 일어선 관객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쏟아내었다. 저 외에도 토비를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앤드류 마저도 이 정도로 열성적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앤드류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첫 상영의 순간을 토비와 함께해서 다행이었다. 이것 봐요, 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캡모자와 마스크 아래로 간질거리는 입꼬리를 올리던 앤드류는 그의 손을 꽉 붙잡는 단단한 손길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팔걸이에 얹어진 앤드류의 손등을 살포시 덮은 토비의 손이 손가락을 얽혀왔다. 토비는 여전히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스크린과 환호하는 관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손가락 사이사이를 꼭 파고들어 깍지를 낀 손을 통해 그의 기분과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스크린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맨 뒷좌석까지 닿지않아 그들이 앉은 자리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앤드류는 토비의 눈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단 관객의 반응 때문만이 아니라 마치 과거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감각에 두근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앤드류가 사랑했던 스파이더맨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역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 그 긴 시간동안 무르익어 깊어진 감정을 새삼 다시 느꼈다.
앤드류는 마스크를 턱 아래에 걸쳤다. 이제 관객들의 분위기는 한결 가라앉은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영화가 상영 중이었고 두 명의 스파이더맨의 대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관객들은 모두 스크린 속에 정신을 빼앗겨서 구석진 뒷좌석을 신경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앤드류가 토비에게 몸을 기울이며 모자 아래로 고개를 숙이자 조금 당황한 몸짓이 느껴졌다. 토비의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리자 작은 목소리로 입을 벙긋거렸다. 들키겠어. 앤드류는 대답 대신 아예 모자를 벗어버렸다. 놀란 토비에게로 바짝 파고들자 동그래진 파란 눈이 시야에 가득 차고 입술은 스칠듯 가까워졌다. 앤드류의 얼굴이 토비의 모자 챙에 부딪히면서 살짝 젖혀진 모자가 금방이도 벗겨질듯 삐뚜룸하게 기울어졌다.
"괜찮아요."
앤드류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자신의 모자로 살그머니 옆을 가리고서 말했다.
"아무도 모를거예요. 아무도."
이윽고 입술이 겹쳐지자 토비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스크린에서는 스파이더맨의 대사가 흘러나왔고 주변은 채 진정되지 못한 관객의 흥분된 기류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가운데, 그 어느때보다 설레는 키스를 했다.
05
Hi, Tobey! 드디어 침대에 누웠는데, 달이 너무 예뻐서 당신이 생각났어요. LA에서 보는 하늘은 다르겠죠? 당신도 여기에 있으면 좋을텐데요. 아니, 그냥 당신이 보고싶어요.
침대에 누워서 톡 톡 핸드폰을 두드리던 앤드류는 메시지를 모두 적고난 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 보기만 했다. 오염된 도심의 공기에도 불구하고 이날 만큼은 유난히 달이 크고 밝았다. 조금 전 찍은 밤하늘의 사진을 첨부한 앤드류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메시지를 임시저장함에 보내 버렸다.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일은 쉬웠지만 진심을 말하는건 너무나 어려웠다. 토비와 주고받은 메시지 창에는 별 내용 없는 짧은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다. 대신 임시저장함을 들어가면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방적인 메시지들이 가득하다. 토비의 번호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차마 내뱉지는 못한 채 데이터로 탈바꿈된 말들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담스러울까봐. 그 다음에는 행여라도 알아차릴 까봐. 그리고 지금와서는 절대 들킬 수 없게 되어버린 감정들.
Hello, 앤드류 가필드에요! 에이전시에게 번호를 받았어요. 당신과 같이 연기할수 있다니 너무 흥분되네요. 빨리 만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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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을 읽어봤어요. 제 스파이더맨은 분명 당신을 무척 좋아하고 있을거에요. 왜냐면 제가 바로 그렇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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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굉장한 날이었어요! 당신은 제 상상보다 훨씬 멋졌고요. 마스크를 써서 참 다행이죠.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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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난 아직 당신이랑 같이 있고싶은데. 못한 말도 너무 많고요. 사실, 말할 자신도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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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당신이 생각나요. 함께 했던 촬영들이 전부 신기루 같아요. 나는 아직도 매일 당신 꿈을 꾸는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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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하면 당신이 믿어줄까요?
앤드류는 계속 화면을 내렸다. 촬영 중에는 물론 촬영이 끝나고서도 토비를 떠올릴 때마다 두서없이 적은 메시지들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작성된 메시지들은 그만큼 앤드류가 품고 있는 마음의 크기를 쉽게 알게 했다. 어차피 전해지지도 못할 말들에는 너무나 간단하게 본심이 녹아들어서 최근 메시지로 갈수록 직접적인 사랑 고백으로 가득했다. 보고싶어요. 그리워요. 사랑해요.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은 홀가분해질까 싶어 시작된 보내지 못한 메시지였지만 오히려 임시저장함의 리스트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마음을 접기는 커녕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핸드폰의 모서리로 이마를 꾹 꾹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춘기 소년의 키티 일기장도 아니고 한심하게 무슨 짓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핸드폰 액정에는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지만 차마 YES를 누르지 못했다. 메시지를 삭제한다고 해서 감정까지 함께 씻어낼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이라고는 허탈함과 후회 뿐임을 알았기에 이번에도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할 뿐이다.
액정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앤드류는 그만 임시저장함을 나갔다. 아니, 그러려했다. 화면에 뜬 글자만 아니었다면 그는 핸드폰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번이나 눈 위를 문질러보아도 화면의 글자는 바뀌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전송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었던 사고 회로가 움직이면서 멍청하게 깜박이던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커졌다. 서서히 앤드류의 표정에 경악이 차오르고 충격은 소리없는 비명이 되어 튀어나왔다.
"……!!! …!!!!!!!"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앤드류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거의 내던지는 기세로 핸드폰을 침대 위에 떨구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두 글자의 이름이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어 발신인에 표시되었다. 토비. 핏기가 사라진 얼굴이 하양게 질렸다. 핸드폰의 터치 인식이 이정도로 예민할 줄이야. 멍청한 앤드류 가필드! 앤드류는 대략 1분 전의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핸드폰을 걷어 차버리고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끊어지지않는 전화벨 소리가 영원히 울리면서 앤드류를 괴롭힐 것만 같았다.
잠시 뒤 벨소리는 멈췄지만 곧이어 알림음이 났다. 짧게 한 번, 문자 수신음이다. 살그머니 베개를 내려놓고 저 멀리 떨어진 핸드폰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자 액정에 수신된 메시지가 떠올라있었다. 전화 받아. 딸꾹질을 하기가 무섭게 또 다시 전화벨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이제 앤드류의 얼굴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손에 든 핸드폰의 무게감은 사형수가 받은 한 장의 사형 집행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쿵쾅대는 심장소리에 섞여 가느다란 이명이 머리골을 울려댔다. 앤드류는 기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다잡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과연 무슨 말을 듣게될지 상상하는 것조차 지금의 그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새하얗게 비어버린 머리통으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앤드류는 그저 사형집행의 순간이 1초라도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간신히 목막힌 목소리를 내었다. 차라리 토비가 동정심이라도 가져주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여보세요…?"
오로지 불안과 두려움만으로 가득한 앤드류의 목소리에 답한 것은 그가 사랑하는 토비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였다.
04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촬영도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시간은 상대적이었지만 앤드류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만 같은 촬영 기간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마지막 날, 앤드류는 아쉬움을 가득 안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클라이막스씬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은, 비단 앤드류의 촬영 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촬영 역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기에 마무리를 앞두고 심기일전한 촬영장의 분위기는 의욕과 열기로 충만했다.
앤드류는 평소보다 일찍 촬영장에 도착했고 그건 토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10여년만에 다시 스파이더맨으로 복귀했다는 점에서 모든 촬영이 특별하긴 했지만,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그 날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오늘이 지나면 토비와 만나는 것도 끝이라는 점이다.
물론 영화에서 그들의 역할은 중심을 단단히 받쳐주는 지지대였기에, 두 사람이 출연 사실이 더이상 스포일러가 아니게 되면 온갖 인터뷰에 불려다녀야 할 터였다. 영화 홍보와 방송 출현 등 앞으로도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건 함께 영화를 촬영하며 느끼는 친밀감과는 다를 것이다.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입고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앤드류에게 다른 형태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유대감을 부여했다. 단순히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로서가 아니라 영화 속 그들의 캐릭터들이 그렇듯, 운명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감각이었다. 앤드류는 토비 역시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꼈기를 바랐다.
어린 앤드류에게 용기를 주었던 그의 오래된 영웅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토비와 함께 있었던 매 순간 순간이 즐거웠다. 본성부터가 사람을 좋아하는 앤드류였기에 이미 좋아했던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일은 너무나 쉬웠다.
앤드류는 천성이 로맨티스트였고 소위 말하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는 부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랑이 결코 가볍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사랑에 빠지는데 있어 복잡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는 그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시작되는 사랑도 있다.
톰을 기다리면서 앤드류와 토비는 먼저 촬영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넌지시 물었을 때 토비는 촬영이 끝나면 일단은 LA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루비와 오티스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면서 행복에 가득 찬 아버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다른 영화의 촬영 일정으로 인해 앤드류가 뉴욕에 좀 더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토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당분간은 만나기 힘들겠네요."
짐짓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토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앤드류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그는 토비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의문을 가득 담은 표정을 마주하자 토비가 눈썹을 살짝 추켜 올렸다. 이상하네,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투명한 눈동자가 앤드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는거 아니었어?"
"네?"
멍청하게 되물었으나 토비의 한결같은 시선은 앤드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앤드류는 토비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 차렸다. 깨달음은 느렸지만 부끄러움은 순식간에 찾아와 앤드류의 목덜미를 시뻘겋게 달구었다. 앤드류는 황급히 양손을 내저으며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 부정문을 더듬더듬 쏟아내었다.
"아니, 아니! 아닌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잘…!"
사실상 긍정이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자신의 형편없는 임기웅변을 저주하는 한편 도대체 그가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아차린건지 팽팽 머리를 굴렸다. 애당초 외향적인 기질로 가득한 앤드류의 성격은 쉽게 자신의 벽을 허물고 타인과 친해지곤 했다. 자신이 토비에게 곧잘 치대며 관심을 보인건 사실이라지만 유난히 더 특별한 기류를 흘린 적은 없다고 믿었는데, 토비는 어림도 없다는듯 예의 그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앤드류! 어리숙한 변명을 이어가려던 앤드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앳된 인상이 남아있는 웃음은 새삼 다시 앤드류를 설레게 만들었고 토비는 그 순간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넌 정말 거짓말을 못해. 얼굴에 다 티가 나잖아."
03
호텔에 짐들을 내려놓고 몇 시간을 기다린 후, 앤드류는 은근슬쩍 방을 나왔다. 공항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파라치들을 일부러 내버려 두면서까지 실컷 사진을 찍혔으니 그 치들도 오늘은 만족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서 셀러브리티 전용 엘리베이터와 출입구를 이용했다. 밖을 나갈 때면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만 한다는 것이 불편했지만 이럴때 만큼은 오히려 감사하기도 했다. 거리를 나가면 일반인이고 연예인이고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다음날부터 시작될 일정을 생각하면 푹 쉬어야함이 옳겠지만, 시차 적응마저 미뤄놓고 앤드류가 향한 곳은 작은 술집의 프라이빗 룸이었다. 다행이 여기까지 따라오는 파파라치는 없었고 사생활 보장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운영되는 술집은 주인은 물론 직원들까지 이용객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리 예약한 방에 들어가서야 겨우 모자를 벗은 앤드류는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발견하고서 활짝 웃었다. 토비가 앤드류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마침내 마스크까지 벗고서 냉큼 토비의 옆에 와 앉았다. 얼마만이더라. LA에서 열린 프리미어 행사가 지난주 초였으니 거진 일주일 만의 만남이었다. 롱디 치고는 꽤 빠른 재회일지 모르겠으나, 사랑하는 사람과 24시간을 늘 함께 하고싶은 앤드류에게는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그 동안의 아쉬움을 보상받겠다는 양 앤드류는 곧바로 토비의 뺨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작게 새어나온 웃음소리는 혀를 밀어넣자 곧 멈추었고 은밀한 질척임과 목울림으로 변했다. 토비는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앤드류의 목에 팔을 둘렀다. 눈을 감으면서 키스에 집중하자 흘러 넘치는 애정이 느껴졌다. 앤드류는 계속 혀를 얽히면서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듯, 잠깐 숨을 들이쉬었다가도 재차 토비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당겼고 키스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토비의 뺨이며 머리칼, 목덜미, 등허리를 더듬었다.
마침내 긴 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품에 안은 몸은 가까이 밀착해 있었다. 앤드류는 토비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채 그의 체향을 느끼듯 깊이 숨을 들이쉬었고, 장난스럽게 턱을 깨물었다.
"면도했네요."
매끈해진 턱 주변을 연신 입술로 흩으며 지분거렸다. 말랑한 입술이 스치듯 닿는 감촉이 간지러운지 턱을 조금 추켜든 토비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음악처럼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는 기분좋은 음성을 들으면서 토비의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스타일링도 다시했고."
쪽. 토비의 얼굴을 끌어당겨 뺨 위에 오므린 입술을 문지른 앤드류가 그제야 조금이나마 몸을 물리고 토비와 시선을 마주했다. 술집의 어둑한 조명에서도 토비의 파란 눈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살짝 내리감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더욱 반짝이게 했다. 앤드류는 마치 잘 조각된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멍하니 토비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앤드류의 손끝이 눈덩이에 닿자 토비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속눈썹이 움직이며 손톱 아래를 스치는 감각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앤드류는 토비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며 막혔던 숨을 토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욕망이 담겼다.
"너무 예뻐요."
"그야 열 살은 어린 애인이랑 만나고 있는걸."
토비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는 앤드류의 손을 잡아 떼어내고는 손바닥에 열기를 담은 입술을 부볐다. 앤드류에게서 전해 받은 은밀한 열망이 그 안에 조금씩 불을 지폈다. 토비는 입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너도 면도했네." 손바닥에 닿은 채 입술을 움직이자 앤드류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미소를 머금고있던 눈매가 한층 더 가늘게 웃었다.
"정말 멋지다. 반할 것 같아."
앤드류는 손을 빼냈다. 대신 토비의 어깨를 붙잡았고 그대로 강하게 밀어 붙였다. 순식간에 휘청이며 기울어진 몸이 긴 소파 위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토비, 토비. 토비에게로 고개를 숙인 앤드류가 재차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고 신중했던 처음과는 달리 두 번째 키스는 다급하고 거칠며 여유가 없었다. 앤드류는 타액이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토비의 입안을 거침없이 헤집으며 셔츠 안에 손을 집어 넣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살결을 더듬으면서 허리를 흩자 오싹한 흥분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토비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가늘고 짧게 끊어지는 감미로운 숨소리를 듣는 앤드류의 심장박동 역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앤드류가 몸을 일으켰다. 단정했던 머리칼이며 셔츠가 흐트러진채 숨을 헐떡이는 토비를 내려다 보았다.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엿보이는 피부는 어두운 조명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웃옷을 다급하게 벗어 던졌고 그를 향해 뻗은 팔을 잡아채 몸을 겹쳤다. 아이같은 웃음소리가 한껏 열이 오른 앤드류를 달랬지만 일주일만에 그를 다시 안았다는 흥분과 즐거움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었다. 이제 어린 청년도 아닐지인데 이렇게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토비가 앞에 있으면 그는 다시 스무살 언저리로 돌아가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앤드류는 주체가 되지않는 마음을 듬뿍 담아 재차 말했다.
"보고싶었어요. 정말, 너무 보고싶었어요."
02
가장 깊은 잠에 빠져드는 새벽 3시 경, 머리맡에 놓아둔 앤드류의 핸드폰 액정에 반짝 불이 켜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액정의 불빛은 꼭 감은 눈꺼플을 뚫고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까지 했다. 끄응,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난 앤드류는 거슬리는 진동 소리를 무시하려 했지만, 전화는 끊어질 줄 모르고 끈질기게 울려댔다. 마침내 앤드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서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을 집어 얼굴 앞으로 가져오자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셨다. 옆에서 앤드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불만스러운 목울림이 들렸다. 앤드류는 얼른 바깥쪽으로 돌아 눕고서 질끈 감기는 눈꺼플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게슴츠레한 시선이 액정에 뜬 이름을 읽었다. 토미?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신인의 정체를 확인하자 절로 눈이 떠졌다. 앤드류는 차마 종료버튼을 누르지는 못하고서 전화를 받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누군데에……"
앤드류의 곁에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착 가라앉아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나른했다. 핸드폰 불빛과 진동, 앤드류의 뒤척임이 이 밤 잠 많은 남자를 기어코 수마로부터 끄집어낸 모양이었다. 이불 속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며 앤드류의 등에 달라붙더니 허리에 팔을 둘렀다. 맨 살결에 닿는 따끈따끈한 체온을 느끼자 억지로 깬 탓에 비죽 솟아올랐던 짜증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숨을 죽이며 작게 웃은 앤드류가 토비의 팔을 쓰다듬었다.
"미안, 깨웠어요?"
그사이 전화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지만 그것은 더이상 앤드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앤드류는 조용해진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서 돌아누워 토비를 마주 보았다. 완전히 잠에서 깨지는 못했는지 앤드류를 올려다보며 반쯤 감긴 눈을 느릿하게 꿈벅거렸다.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 당긴 앤드류가 동글동글한 정수리에 키스했다.
"토미 전화였어요."
"음… 톰은 지금… 런던이잖아…"
용케 대답을 하고 있다지만 토비의 목소리는 잠꼬대를 하듯 작고 불분명했다. 이불을 좀 더 끌어올리자 토비가 앤드류에게 더욱 가까이 파고들었다. 아마 아침이 되면 자신이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하리라. 앤드류는 대답을 하는 대신 토비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좀 더 자요."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여주니 "으응…" 대답이라기보다는 투정에 가까운 소리를 웅얼대며 밀착해있는 다리를 얽혔다. 느릿하게 등을 토닥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지 색색이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앤드류 역시 토비의 허리에 팔을 둘러 바짝 끌어 안았다.
품 안에 가득 들어찬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톰의 전화는 내일 아침에 확인해도 괜찮을 것이다. 앤드류는 토비의 작은 숨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지금은 토비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01
"고마워요."
스태프가 건넨 종이컵을 받아 양손으로 감싸쥐자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촬영 세트장은 실내였지만 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계절이니만큼, 다른 이들의 손에 들린 종이컵에서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앤드류는 커피가 조금 식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이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스태프 한 명이 던진 농담에 주변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앤드류 역시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시선은 발화자가 아닌 전혀 다른 곳을 향했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던 중 던져진 농담에 종이컵을 입에 문 그대로 미소를 머금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토비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그는 앤드류를 향해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웃었고 마치 인사를 건네듯 입에 문 종이컵을 까닥였다. 스태프의 이야기가 이어지자 잠시동안 겹쳐졌던 토비의 시선은 금세 다른 곳을 향했지만 앤드류는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피가 충분히 식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서 텅 비어있던 테이블 위에는 빈 종이컵이 쌓여갔다. 스태프 몇 명이 곧 시작될 촬영 준비를 위해 자리를 뜨고 나니 삼삼오오 모여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분주해진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휴식의 끝을 알렸다. 먼저 자리를 뜬 것은 스태프였지만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건 배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착장과 메이크업은 끝냈다지만 촬영 직전에 마지막 점검을 해야 했고, 배우에게도 연기를 시작하기 앞서 예열 시간은 필요했다.
앤드류의 종이컵에는 아직 커피가 절반 가량 남아있었기 때문에 먼저 일어난 쪽은 토비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빈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앤드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제스처일 뿐 재촉의 의미는 아니었으나 다들 제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못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그들은 대부분 한 스크린에 나오는 만큼, 한 명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가는 스케줄이 늦춰질 것이다. "금방 갈게요." 다급한 대답과 함께 딱 마시기 좋을 만큼 식어버린 커피를 크게 한 모금 삼켰다. 먼저 걸음을 옮기는 토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앤드류도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탁. 컵을 내려놓은 앤드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었고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마셨던 종이컵이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전부 똑같은 형태였으나 이제는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컵을 사용했던 사람을 얼추 짐작케 했다. 앤드류는 바로 움직이지 못한 채 그것들을 하나하나 흩었다. 아예 입을 대지 않은 것 부터 내용물을 조금 남긴 것, 깨끗하게 비운 것, 립스틱이 묻은 것, 형편없이 구겨진 것, 바깥으로 말린 끄트머리를 전부 펴놓은 것 등. 그 중에서도 종이컵의 가장자리 중 한 곳을 잇자국이 남도록 씹어놓은 것에 앤드류의 시선이 머물렀다.
앤드류는 그것이 누구의 종이컵인지 알고 있었다. 토비는 다 마신 컵을 내려놓는 대신 계속해서 손에 들고 있었고, 대화가 오가는 틈틈히 습관적으로 한 귀퉁이를 입에 물었다. 앤드류는 토비를 관찰하는 동안 몇 번이나, 그의 부리같은 입술 사이에 물린 종이컵이 장난을 치듯 까딱, 까딱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동그랗게 말린 가장자리는 금세 납작해졌고 머지않아 옅은 입술 자국과 함께 너덜너덜해졌다. 앤드류가 종이컵을 잡았다. 모서리의 눌린 자국은 생각보다 작고 좁아서, 앞니로 그 끄트머리를 지그시 물었다.
앤드류의 입술이 종이에 달라붙듯, 타액으로 찍힌 입술 자국 위를 덮었다. 앤드류는 마치 남은 커피를 마시는 시늉을 하듯 양손으로 감싸쥔 컵을 기울이고 살그머니 입을 움직여 납작한 모서리를 질겅였다. 아주 희미하게 그의 입술이 남긴 달콤한 믹스 커피의 맛이 느껴졌다. 귓가가 핫핫하니 달아올랐지만 입을 떼는 대신 혀를 내밀었고, 잇사이에 물린 종이컵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햝았다. 커피맛이 아주 조금 더 진해졌다.
"미스터 가필드!"
슬쩍 손을 놓고 토비가 그랬듯 종이컵을 까딱이려던 순간 앤드류를 부르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앤드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말라붙은 입술이 떨어지자 아랫입술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잇사이로 말려들어간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가 놓으면서 황급히 대답했다.
"지금 가요!"
열이 오른 귓바퀴를 문지르며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의 다른 것들과 뒤섞여버린 종이컵에는 처음보다 조금 넓어진 잇자국이 남았다. 그리고 앤드류의 혀 끝에는, 훨씬 짙어진 커피향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