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3(어메이징 스파이더맨::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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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2(샘레이미 스파이더맨::파커)


아직 어둠이 전부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피터는 눈을 떴고, 자신의 곁에 웅크리고 잠든 파커를 바라보았다. 지난 밤의 정사를 드러내듯 채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이 눈가며 뺨에 말라붙어있다. 비록 몸에는 이불이 덮여있었으나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목덜미에는 쾌락적이었던 관계 만큼이나 붉은 열락의 흔적이 얼룩덜룩하게 남아있었다.

피터는 흐트러진 머리칼에 손을 뻗었다가 미처 닿기도 전에 거두고 말았다. 그는 꼭 설탕으로 만들어진 섬세한 세공품 같았다. 너무나 달콤하고 꿈결같이 황홀했던 지난 밤은, 그러나, 어차피 해가 뜨면 녹아 사라지고 말 설탕 과자나 다름없었다. 피터는 파커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를 빠져나왔다. 파커의 몸에 남아있을 흔적들 만큼이나 피터의 몸 역시 온갖 흔적들로 가득했다. 잇자국과 손자국, 등이며 팔에 남은 손톱자국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만큼 쓰라렸다. 하지만 그것이 지난 밤의 증명이 되어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 고작이리라. 

바닥에 떨어진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주워 입었다. 코스튬 안에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했던 흔적을 밀어 넣어 감추고,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창문을 올리자 이슬을 머금은 새벽의 찬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워 남아있던 열기를 완전히 식혀주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 미약한 싸늘함은 뒷꿈치에 달라붙은 아쉬움을 완전히 밀어내었고 피터로 하여금 냉정함을 되찾게 해주었다.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 창틀 위에 발을 내딛는 순간, 피터의 등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려고?"

피터는 천천히 발을 내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이상 무시해버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몸을 돌리자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모를 파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피터를 바라보았다.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나신을 드러냈다. 퉁퉁 부어올라 짓물러진 유두 주변으로 몇 번이나 짓씹은 상처가 선명했다. 몸에 남은 얼룩은 키스 마크라기보다는 차라리 멍자국에 가까웠고, 이불 속에서 완전히 빼낸 몸을 머리맡에 기대어 앉으니 이제는 체액이 들러붙은 하반신마저 가려지지 않았다.

피터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것이 틀림없다. 짐승마냥 달려들어 서로를 온전히 느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격렬한 섹스였다. 아직도 파커를 바라보면 그 감각과 기억들이, 그 잔상이 눈앞에 남았다. 차마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린 피터에게 파커가 말했다. 

"난 네가 좀 더 있을 줄 알았어."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무릎을 끌어당겨 품에 안은 파커가 기울어진 고개를 기댔다. 어스름한 새벽녘이 어깨며 팔 위로 떨어져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파커는 피터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을 하고서 낯설기 짝이없을만큼 사랑스럽게 웃었다.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 안에 오로지 피터만을 가득 담고 마주하는 시선은 이번에도 역시 피터를 설레게 했다. 지난밤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엇보다도 원하던 것.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그 눈 안에 있었기에 도저히 파커를 거절하지 못했다.

"어제 별로였어?"

그럴리가. 피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틀에 걸터앉아 꽉 맞잡은 두 손 위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피터는 눈을 감고 지난 밤을 떠올렸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 떨리는 숨소리. 미소 짓던 얼굴. 오직 저만을 갈구하며 뻗은 손과, 저만을 위해 활짝 열린 몸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달콤한 체취까지. 그 순간 피터의 오감은 오직 파커를 느끼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 모든 감각을 기억하고자 몇 번이고 반복해서 파커를 탐했다.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지던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은 물론 맞닿은 입술의 부드러움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던 내벽의 뜨거움도 피터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피터는 진심으로 그 시간이 영원하기를 기도했다. 모든 거짓말로부터 눈을 돌리고 이 기만적이기 짝이 없는 쾌락에 안주하고 싶었다.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기를, 온 힘을 다해 바랐다.

하지만 욕망만을 좇아 그토록 갈구했던 몸을 취하는 와중에도 결국은 찰나의 꿈과 같은 환상으로 끝나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건 꼭 마약과도 같아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피터를 더한 갈증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전에 돌아가야 했다. 피터는 흐느낌을 억누르며 말했다. 마치 목소리를 쥐어짜듯이, 한 마디 한 마디가 힘겨워 보였다.

"좋았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는 줄 알았어.

그러나 그토록 열정적으로 서로를 원하고 몸을 섞으면서도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사랑을 속삭이지 않았다. 열락에 빠져 흐물흐물해진 미소에는 미처 걸러내지 못한 슬픔이 불순물처럼 섞여 있었다. 피터는 물론 파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상대를 탐하면 탐할수록, 일방적이었던 욕망을 똑같은 크기의 욕망으로 돌려받을수록 그들은 벅차오르는 행복과 목이 졸리는 고통을 느꼈다. 분명 사랑에 마지않던 그 사람일 터인데 동시에 결코 그 사람이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터는 저에게 매달려 신음하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눈을 맞춰오는 파커를 마주 안으며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겹쳐진 몸뚱이는 서로에게 이어져 있었지만 터질듯 부풀어 오른 애정은 여전히 가야 할 상대를 찾지 못해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미안해."

파커가 속삭였다.

"괴롭히려고 한 말은 아냐. 단지, 네가 원한다면 나도 괜찮다고 말해고 싶었어."
"하지만 우리 둘 다 진심은 아니지."

파커는 조금 주눅이 든 것마냥 몸을 움츠렸다. 그 역시 미련을 가질수록 독이 될 뿐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낼 수 없는 것 같았다. 피터가 자신의 형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파커 역시 제 동생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피터는 본래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을 파커를 떠올렸고, 눈앞의 파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품고 저를 대하는 그의 얼굴을 상기했다. 근본적으로는 같은 존재라지만 그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비록 피터를 향한 미소에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형제애만이 담겼으나 그렇기에 오직 그 미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스러움이 있었다. 분명 이 세계의 자신 역시 다를 바 없으리라. 같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 둘이 서로를 완전히 채워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래도, 형을 잊지 못할 거야."
"…나도."

피식 웃은 파커가 몸을 일으켰다. 그저 감추고 억누를 수밖에 없어 고이고 고여버린 응축된 감정과 욕망을 밤새 받아내었던 나신을 보자 새삼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관계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스러지겠지만, 그 기억 만큼은 머릿속에 남아 마음을 달래줄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피터는 파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그 모습을 시야 안에 차곡차곡 눌러 담았다. 피터에게 다가온 파커가 그의 앞에 서자 정사의 여운을 품은 살내음이 목 아래로 들어차 숨이 막혔다.

이미 그들의 거리는 충분히 가까웠지만 한 걸음 더 다가간 파커가 손을 뻗자 체취는 한층 더 강해졌다. 파커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피터의 흔적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손을 뻗어 뺨을 감쌌다. 이마를 맞대자 얇은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호흡이 느껴졌다. 파커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의 손은 재차 피터의 뺨을 쓰다듬었으나 결국 입술이 닿지는 못했다.

"작별 키스는 안 하는 편이 낫겠지?"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 안에서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어떤 표정이든 얼굴을 봤다가는 그를 놓아주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냥 안아줄게."

파커는 양손을 목에 둘러 피터를 끌어당겼다. 피터는 키스보다도 다정한 그 품에 안겨서 파커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망설이던 팔이 살며시 파커를 마주 안았다. 익숙하고도 따듯한 체온은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너무나 똑같았다. 그저, 이렇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 하나뿐인 바람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인지.

"잘가, 피터."

파커가 뒷걸음질을 치자 천천히 몸이 떨어졌다. 아쉬운듯 멀어지는 파커를 향해 뻗은 손은 얼마 가지 않아 힘없이 떨구어지고 말았다. 발아래에는 끈적이는 망설임이 녹은 타르처럼 달라붙었지만 피터는 그것을 털어내고 몸을 돌렸다. 어느덧 해가 떴다. 이제는 정말로 꿈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아래로 추락했던 피터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웹스윙을 할수록 파커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고, 남아있던 미련도 점차 흐려졌다. 피터는 파커를 뒤고 하고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파커가, 형이 보고 싶었다. 그저 잠깐 목을 축였을 뿐 사라졌을 리 없는 갈증이 다시금 차올라 목이 메었다. 아무런 연심도 없이 그저 소중한 동생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이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그만의 피터 파커가 너무나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