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ARNING ! !
여체화, 여성공, 리버시블
샘레이미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x
피터 파커
"우리가 처음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마침내 피터가 십여 년에 이른 자신의 긴 짝사랑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메리제인이 내놓은 대답은 예스나 노가 아니었다. 피터의 고백을 듣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메리제인은 이 순간과는 전혀 상관없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피터의 얼굴에는 잠깐동안 의아스러운 낯빛이 서렸으나 곧 메리제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고, 금세 그 순간을 떠올렸는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응."
피터는 그저 단순한 사실을 통보하듯 너를 좋아한다고 담백하게 말했을 때보다 조금 더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리가 날 괴롭히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메리제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피터가 그랬듯 메리제인 역시 그날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옆집에 살면서 얼굴은 익숙하지만 숫기는 없었던 소심한 소년과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주고받은 날이었다. 그만큼 그날은 피터에게도 특별하게 남은 기억이겠지만, 피터로서는 매우 뜻밖에도 메리제인에게 있어서도 인상적으로 남아있었다.
이 보잘것없는 공립학교에 전입해 온 첫날부터 해리 오스본은 유명인사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영화나 드라마로만 접해본 공상 속의 부자 아가씨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렇다고 여느 평범한 학생과 같지도 않았다. 소위 명품을 두르고 다니거나 양 옆구리에 경호원을 끼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다른 학생들을 낮잡아보는 태생적인 거만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랑곳않고 해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던 몇몇 아이들도 결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자존심밖에 없는만큼 열등감이 자극되기도 쉬웠다. 마치 핵폭탄마냥 공립 학교에 갑자기 뚝 떨어져 버린 재벌의 존재는 누구와도 섞일 수 없는 불순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돈보다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이 익숙한 공립학교 아이들에게 있어 해리는 곧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 안 사회밖에 경험해 본 적 없는 학생들에게도 학교 밖에서 작용할 오스코프라는 뒷배가 두려운 건 마찬가지인지 차마 직접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학생은 없었다. 단지 선을 그어놓듯 섞이지 못했고 그건 꼭 한 컵에 잘못 담긴 물과 기름 같았다. 해리 오스본. 그 오만하고, 건방지며, 고고하기 짝이 없는 어린 아가씨가 교내에서 겉돌게 된 지 수개월째.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제 옆에 그림자처럼 남학생 한 명을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해리 오스본과 피터 파커의 조합은 해리의 갑작스러운 전학 이슈가 가라앉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학교를 다시 한번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해리와 마찬가지로 교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였지만, 해리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기에 극과 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피터를 비웃으며 못되게 구는 무리는 많았으나 그런 이들조차도 피터가 무언가 계산적인 이득을 위해서 해리의 곁에 붙어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 두 사람의 조합은 대부분의 이들이 피터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욱 공고해지도록 만들었다. '한심한 피터 파커.'
메리제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터를 한심하게 여겼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교내에는 제멋대로 사람을 휘두르는데 익숙한 해리가 소심하고 멍청한 피터를 하인처럼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두 사람의 성격을 생각하면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구도였다. 해리에 대한 메리제인의 첫인상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자아이'였다면 긴 시간 동안 가까이에서 보아온 피터는 '착하고 조용한 남자아이'였다. 수년을 이웃으로 지내면서도 대화 한번 해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동급생과 말을 섞을 때라고는 별 것도 아닌 일을 트집 삼아 두들겨 맞을 때뿐이 없는 피터가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하거나 반항을 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해리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랬다. 메리제인은 교내에서 몇 번이나 해리의 뒤를 쫓는 피터를 보았다. 대부분 해리의 물건을 들어주거나, 해리의 볼멘 짜증을 묵묵히 듣고 있거나, 해리에게 수업 노트를 빼앗기는 모습이었다. 피터를 대하는 해리의 표정은 대개 신경질적이었고 그럴 때마다 피터는 늘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원래부터도 홀로 붕 떠있는 것마냥 맹한 얼굴이라지만 모처럼 가까운 동급생이 생긴 것치고 그리 즐거운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혹시 해리가 널 괴롭히는 건 아니니?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부자연스러운 친분 관계는 메리제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금껏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지만 이웃에 클래스 메이트인 만큼 지나가듯 묻기는 쉬웠다. 피터는 메리제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동그란 눈이 안경알을 가득 채울 만치 눈을 크게 떴다가, 곧 그녀의 질문을 상기하고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분란을 일으킬 줄 모르고 얌전한 성정이니만큼 다급한 부정을 의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살며시 미소 짓는 피터의 표정을 본 탓이었다. 메리제인은 피터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러고 며칠 뒤에, 도서관에서 너희를 봤어."
그 후로도 교내에서는 빈번하게 해리와 피터를 마주쳤고, 메리제인은 좀 더 길게 그들을 관찰했다. 여전히 해리는 짜증스러웠고 그것을 피터에게 풀기 일쑤였다. 그러나 메리제인은 해리를 달래려는 피터의 주눅 든 얼굴에서 걱정 어린 시선을 보았고 해리의 불만 어린 표정에서 피터의 기분을 살피는 샐쭉한 불안감을 발견했다.
"잠든 해리에게 겉옷을 덮어줬었지?"
그날은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앞둔 날이었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학생들이 대부분이라지만 개중에도 최소한의 성적을 유지하려는 이들은 있었다. 메리제인 역시 후자에 가까웠기에 학교 도서관을 찾은 날, 도서관 책상의 한 구석을 차지한 피터는 맞은편에 엎드려버린 해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 정말 특별한 기분이었다. 메리제인은 마치 그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이 주변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리제인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피터를 봐왔고 그만큼 피터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비록 피터와 친분을 다지지는 않았지만 의도치 않게 가까웠던 물리적 거리 덕분에, 파커 부부를 제외하면 어쩌면 자신이 피터를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옛날부터 친구라고는 사귀어본 적이 없는 피터였기에 과장이 아닌 진실에 가까웠다. 그리고 해리를 향한 피터의 시선과 표정은, 그런 메리제인조차도 처음 보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는 애정을 띄었고 살며시 미소 짓는 입술은 친애를 머금었다. 흘러내린 해리의 옆머리가 팔에 기댄 얼굴의 반대쪽 뺨을 간질이자 머리칼을 귀뒤로 넘겨주는 손길은 수줍기 짝이 없었다. 피터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손가락 끝이 해리의 얼굴을 스칠까 조심하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고 몸을 일으키더니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어깨 위에 자신의 겉옷을 얹었다. 그 모든 행동을 하는 내내 피터는 해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물게 학생들로 가득한 도서관에는 속삭이는 대화소리며 종이 넘기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등 크고 작은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메리제인은 그 둘의 공기에서 숨 막히는 고요를 느꼈다. 주변과 유리된 세계 속을 가득 채운 은밀한 그것이 감히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 해리는 추위를 잘 타는걸."
피터 역시 메리제인이 말하는 때가 언제인지 깨닫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백을 한 상대에게 여전히 제대로 된 대답을 받지 못했는데도 초조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피터는 메리제인과의 대화에서 해리를 떠올리면서 스스럼없이 웃었다. 메리제인은 그 미소가 자신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종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해리에게 옷을 덮어주고 그녀를 바라보는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다정한 모습을 훔쳐보면서 언젠가는 저런 사랑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피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메리제인이 마침내 대답했다. 피터의 마음을 일찌감치 눈치챘더라면 내심 해리를 질투하게 만들었던 그 한결같고도 선량한 애정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너무나 순수한 피터의 순정은 그렇기에 어느새 대상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방향성을 가지는 순간 그녀만을 향해 올곧게 뻗어갈 것이다. 메리제인은 그것이 못내 부러웠지만 자신의 무관심으로 놓쳐버린 것에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미안해."
명백한 거절의 말에 피터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너에 대해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고마워."
한치의 꾸임도 없는 진심이었으나 피터는 메리제인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힘없는 얼굴로 애써 웃으려 했다. 몇 번인가 더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피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상심으로 인해 축 처진 어깨를 보면서 메리제인은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피터를 온전히 차지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남은 아쉬움을 털어내었다. 당장은 실연의 아픔에 젖어있더라도 곧 해리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메리제인은 피터의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작아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느새 커져버린 새로운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되겠지. 메리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순간을 응원하기로 했다.